우리 시대 고수(高手)들을 찾아 떠나는 조용헌의 『방외지사』와 『고수기행』. 모두 무협지 고수와 한 초식을 겨루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족보연구가, 산지기, 오디오 마에스트로, 차 품명가, 역술가, 소목장(小木匠) 등 생활의 기인(奇人)들. 돈과 성공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고, 정작 중요한 삶과 행복이 소외받고 있는 이때 그런 고수들을 취재하고 교유(交遊)하는 작가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가 궁금했다.
마침 신간
『조용헌의 소설小說』이 나온 걸 핑계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조용헌, 대학원에서 불교민속학을 전공한 그는 지난 18년간 한?중?일 3국의 600여 사찰과 고택을 답사했다. 이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 달사를 만났다. 이후 지금까지 천문과 지리, 인사에 관한 ‘강호동양학’의 재야 커리큘럼을 우리 고유의 문화 콘텐츠로 생산하는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현재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전북 익산. 하지만 인터뷰는 집필실이 있는 전남 장성의 휴휴산방(休休山房)으로 정했다. 그를 만나러 가던 날. 경상도 촌놈이 태어나 처음으로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KTX 열차의 좌석은 불편했다. 하지만 고수를 만난다는 설렘에는 미치지 못했다. 논산, 익산을 지났다. 이어 너른 평야가 펼쳐졌다. 김제평야다. 곧 장성에 다다랐다. 빨랐다. 용산역에서 2시간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리 안내받은 대로 휴휴산방행 전용(?) 택시에 올랐다. 축령산 중턱에 마련된 집필실을 찾아가자면 단골 택시라야 용이하기 때문이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길 안내를 하느라 어려움을 겪을 필요가 없기에 고정으로 이용하는 택시가 있었다. 시가지를 벗어나 20여 분, 구불구불한 산비탈을 지나 어느 아담한 집 앞에 내렸다.
| 장성군 추암리에 있는 조용헌 선생의 집필실 휴휴산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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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말 그대로 초당(草堂)에 온 느낌이다. 단촐한 한옥집은 현대식 펜션보다 더 아늑해 보이고, 더 편안해 보인다. 뜰 앞에는 절구가 졸졸 흐르는 물을 받아내 작은 연못으로 흘려보내는 소리가 경쾌하다.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똑똑 두드렸다. 조용했다. 그러기를 몇 번. 인기척이 없었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지금 점심 먹고 있는데, 문 열려 있으니까 방에 들어가서 잠깐만 놀고 있으세요.”
하지만 노는 건 쉽지 않았다. 조용한 곳에 반 시간 이상을 혼자서 기다리는 것은 지루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려서일까. 가지고 온 책을 뒤적였다. 기다림은 책에 집중하는 걸 쉬 허락하지 않았다.
모처럼 멀리 산에까지 왔는데, 방에 틀어박혀 책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집 주변을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이리저리 주인 없는 집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실로 쓰는 가운데 방이 하나, 집필실용 방과 부엌이 좌우로 대칭을 이루면서 하나씩 배치돼 있다.
깔끔한 댓돌로 내려서니, 흰색의 고무신과 산행을 위해선지 가벼운 등산화가 놓여 있다. 집 벽에는 돌을 넣어 한껏 운치가 있어 보였다. 부엌과 한쪽 방에는 큼지막한 창을 두어 안에서도 밖으로 소통하게 만들어 놓았다. 집 뒤란에는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와 땔감도 마련돼 있다. 겨울에 이런 장작을 때면서 온돌을 달구고, 몸도 화기(火氣)에 쏘이면 쑤시던 몸까지 나른해지고 풀릴 것 같은 느낌이다. 도시의 탁한 공기의 찜질방에 비할 소냐!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니 선생이 나타났다.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해서인지 환한 웃음을 띠고 사립문을 들어섰다. 품에는 책을 가득 안고. 얼른 달려가 짐을 받으려 하니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간단한 수인사를 나누고, 집필실에 앉아 차를 마셨다. 차의 깊은 향기와 맛을 논하기엔 아직 경험이 일천하지만, 그윽하고 깔끔한 맛이 텁텁한 탄산음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많이 기다렸죠? 향토사학자 한 분을 만났는데, 갑자기 오셔서 뵙고 왔어요. 영산강과 관련한 내용인데, 이게 또 내일자 칼럼으로 나갈 거예요.”
“이틀에 한 번 꼴로 연재하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연재, 이거 피말려요. 다들 1년 못 넘길 거라고 했거든. 공지영, 김영하 같은 소설가들도 다 1년 넘기지 못했어요.” 그는 3년을 넘기고 있었다.
“일본이나 외국에는 일주일 안짝으로 잠깐잠깐 다녀오고요.” 발로 딛고 몸으로 체험하는 답사전문가에게 방내(房內)에서 글만 쓴다는 건 참기 힘든 일인 모양이다.
“선생님에게 글쓰기는 무엇이고,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글쓰기는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나도 젊을 때는 이렇게 문필가로 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사주명리학을 공부했는데도 정작 나 자신의 행로에 대해서는 뒤늦게 깨달은 거죠. 글쓰기 방법은 우선 자료를 섭렵해요. 관련 자료를 다 찾고 난 다음에는 필드화를 하고요. 현장답사를 하는 거죠. 많은 지역을 돌아보면 통찰력이 생겨요. 요즘 작가들은 이런 점이 좀 부족해요. 방안에 앉아 머리로만 쓰는 거지. 그 다음이 전문가와 토론해야 해요. 자기의 생각을 검증받는 절차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관점을 정리합니다.”
이때, 그는 슬그머니 노트북으로 앉더니
“내일자 칼럼 보내야 하는데, 쓰면서 인터뷰 합시다.”라고 했다. 아니, 쓰고 나서도 아니고 쓰면서 어떻게? 잠깐 메일 보내는 것도 아니고. 신문 연재글인데 방해할까 싶어 잠시를 기다렸다. 채 30분이 되지 않아 끝났다. 아무리 5.5매 정도의 원고지 분량이지만, 금방이다.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주로 어떤 책을 읽으십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사책을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오는 군지, 읍지 같은 지리서를 많이 봐요. 그리고 『시경詩經』 같은 고전도 보죠. 독서는 누가 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억지로 하라고 해도 안돼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의문이 있어야죠. 호기심 없이는 안 되는데, 이건 전생부터 가진 운명적인 요소라고 봐요. 우러나와야죠. 하지만 너무 책을 많이 봐도 문제예요. 함몰되는 거죠. 자기 생각이 없어져요. 전문가와 토론하고 현장답사하고. 읽는 것에 그치면 소비자로 끝나요. 생산자는 못 하는 거죠.”
“답사를 많이 하라고 하시는데, ‘주유천하’ 하는 것도 일반인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나 못 하죠. 일단 아무데서나 잘 자고, 아무 거나 잘 먹고, 낯선 사람 만나도 잘 어울려야 돼요. 또 생계의 절박함은 없어야 하니까 조금의 돈도 있어야죠.”
“선생님의 글은 심플하고 담백합니다.”
“시인 고은 선생이 언젠가 제 글을 보시더니 ‘자네 글은 해방글이야.’ 하세요. ‘무슨 뜻이세요?’ 여쭸더니 ‘사람을 편안하게 해.’라고 하세요. 제가 ‘농담이시죠?’ 그러니까, ‘내가 농담하는 것 봤어?’ 그러시더라고요. 저는 짧은 문장을 좋아합니다. 무엇은 무엇이다, 이렇게요. 비유하는 거 싫어합니다.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치고 들어가죠. 글쓰기는 매사를 정리하고 사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태클을 걸 줄 알아야 합니다. 반골기질이 있어야 돼요. ‘왜 그렇지?’ 의문을 품어야 되고요. 순한 사람은 글 못 써요. 자기 관점으로 차별화해야죠. 주로 글 쓰는 사람들이 괴팍하단 소릴 듣잖아요. 그런 이유 때문이죠. 그런데 저는 문인들 만나면 답답한 게, 너무 내성적이에요. 자기 안에만 갇혀있고, 무슨 말 하나를 해도 상처입지 않을까 걱정되고. 그러니까 말을 머리에서 전환시키자니 머리가 아파요. 재미도 없고. 황석영 같은 분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아쉬워요.”
“긴 호흡의 글을 단문으로 읽는 맛이 좋은데, 신문 연재 후에는 그런 글을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신문 칼럼 쓰면서 좋은 점은 취재하고 자료 협조를 받기가 용이하다는 것이고, 단점이라면 호흡이 짧다 보니 심층적인 깊이가 떨어집니다. ‘칼럼 쓰기의 3단계’란 제목의 글을 쓰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그 중압감이 엄청났어요. 메이저 신문에 이틀에 한 번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한 3년 하게 되니 이젠 금방 써요. 놀아가면서. 허허.”
말이 그렇지 어찌 놀면서 되겠는가. 그가 글감을 찾기 위해 칼럼에서 한 얘기를 옮겨보자. “전국을 주유하면서 풍광도 보고, 사람도 만나고, 유적지도 답사하는 일이 그물을 던지는 일이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 분량도 잡히고, 운이 없으면 허탕 치는 수도 있다.”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2007년 10월 16일자 ‘칼럼 3단계’ 중에서)
“이쪽 방면으로 글을 쓰시게 된 계기는 어떤 일 때문입니까?”
“대학에 다닐 때 선생님을 만났어요. 의산(懿山)이란 호를 쓰는 외과의사이자 풍수연구가였는데, 함께 답사도 다니고 하면서 문하에서 10년 정도 실증적인 연구를 했어요. 불교 선생은 석두 스님이고, 도교 선생도 있었고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멘토겠네요.”
“각 분야에 스승을 두는 게 필요해요. 무림의 고수에겐 ‘사부(師傅)’가 있는 이치와 같죠. 글을 쓰려면 자료에 대한 섭렵이 되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심도 있는 질문응답이 가능하거든요. 석?박사 과정 거치면서 섭렵했죠. 답사는 사찰이며 풍수, 스님들 얘기 듣고 방외의 얘기를 많이 들었죠. 우리 역사에서 불교사는 거의 국사(國史)나 다를 바 없어요.”
“최근에 김지하 시인이 ‘캄차카 반도나 몽골 지방에 우리 단군 신화와 유사한 웅녀 신화가 있고, 묻혀져 있는 신화가 7천여 개나 된다’고 하시면서 ‘유럽이나 미국에 유학 갈 것이 아니라 여기에 가서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내용하고도 통하는 듯합니다.”
“캄차카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젊은 사람들이 뉴욕은 가 봐도 우리 땅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옛날에는 암행어사하고 외교사절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했거든요. 암행어사는 변장해서 밑바닥 삶을 체험하는 것이고, 외교사절을 하는 것은 국제 감각을 키우는 건데, 요즘은 너무 밖으로만 나가는 것 같아요. IMF 이후로 개인주의적 가치관으로 바뀐 측면이 있는데, 자연과 전통문화 그리고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져야 돼요. 여기에 개발해야 할 콘텐츠가 많고요.”
“우문(愚問)입니다만, 우리 땅 어디를 다녀야 합니까?”
“어디를 가도 되지만, 설악산을 비롯해 10대 명산, 퇴계 종택을 비롯한 36명당, 명량해전 울둘목, 경주 안압지 같은 72유적지를 먼저 돌아보면 좋죠.”
“강호동양학이란 무엇입니까?”
“이건 내가 지어낸 건데, 삶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문(文)사(史)철(哲), 유(儒)불(佛)선(仙), 천문?지리?인사, 즉 점성술, 사주, 풍수, 인간사, 한의학이죠. 이런 것들이 다 취재대상이에요. 쓸 글감이 널려 있어요.”
“선생님의 저작활동으로, 사주명리학이나 풍수지리학이 널리 대중화되는 듯합니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고 봐요. 시대정신이 사람을 택하는 것이죠. 내가 끌고 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TV 방송활동을 하시면 생각하시는 바를 더 널리 전파할 수 있으실 텐데요.”
“TV는 대중적 파괴력이 커서 대중을 의식하게 돼요. 또 문필가로 집중을 못 하고요. 에너지가 분산되니까. 예전에 MBC하고 EBS에서 잠깐 했는데, 요즘은 그래서 안 해요.”
“사주 공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사주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봅니다. 내가 사주명리학을 공부하기도 한 이유도 그것 때문인데요. 삶을 살면서 큰 ‘아웃라인(윤곽)’이 있는데, 사주는 디테일한 건 알 수 없지만 큰 사이클은 알 수 있다고 봐요. 말하자면 자기탐구의 일환으로 시작했어요. 자기 사주는 자기가 봐야 해요. 자기자신에 대한 공부거든요. 사주는 자기 그릇을 알게 돼서 사람을 편하게 한다는 소극적 가치가 있어요. 우리 사회가 성공과 경쟁만을 부추기는데, 사람마다 다 이길 수는 없거든요. 그렇잖아요? 전부 성취지향적으로 가니까 심장병이다, 정신병이다 죄다 생기는 거죠. 10억짜리 그릇이 100억 벌려고 하면 암 선고를 받거나 교도소에 가거나 하거든요.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 팔자라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건 제가 창안한 건 아닌데, 첫째, 적선(積善)을 많이 해야 해요. 그래야 자기 마음이 밝아집니다. 둘째, 독서를 해야 합니다. 기질을 변화시키는 길은 학문하고, 독서를 많이 해야 합니다. 셋째, 명상을 해야 합니다. 하루 시간의 10분의 1은 자기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바쳐야 해요. 십일조죠. 넷째, 선생을 만나야 합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사람, 인생의 기로에서 중요한 한마디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다섯째, 명당을 찾는 길입니다. 묏자리나 주택. 그런데 요즘은 풍수의 시대가 갔죠. 여섯 째, 사주팔자 공부를 해야 해요. ‘오버’하지 말아야 하는 거죠. 자기 분수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궁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궁합을 보는 건 두 사람의 기질과 성격을 보는 건데, 다들 콩깍지가 씌어서 말려도 안 돼요. 본능이 작용하니 통제가 안 돼요.”
“어느 인터뷰에서 무협지 같은 판타지를 쓸 계획이라고 하셨는데요.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아직은 시작을 못했는데, 해적 이야기 같은 무협지가 될 겁니다. 유불선, 샤머니즘에 기초한 신화를 토대할 겁니다. 요즘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우리가 ‘미신’이라고 경시한 것들이 죄다 상상력이에요. 풍수신화가 그리스?로마신화에 뒤쳐지지 않아요.”
“풍수신화라 함은 어떤 것을 말하는지?”
“산천을 신으로 보는 것이죠. 미아리, 계룡산에 다 있어요.”
“
『고수기행』 연작을 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계획이 없으십니까?”
“신동아에서 작년부터 연재하자고 하는데, 아직 못 하고 있어요. 쓸 사람은 많은데, 시간이 없어요. 우리 시대는 불행한 인사이더들이 너무 많아요. 행복한 아웃사이더들의 얘기를 널리 전파하고 싶어요.”
“소설가 김훈 씨가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책도 내면서 ‘밥벌이’란 말을 많이 하시는데, 선생님이 찾아다니는 분들은 거기에서 초탈한 분들인 것 같습니다.”
“굶어죽기도 힘들어요. 동남아 가보니까 우리가 얼마나 잘사는가 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런데 왜 우리는 박탈감을 느끼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나라 40대의 화두가 ‘나는 왜 돈이 없는가?’라고 하잖아요? 시대조류가 너무 성공신화에 매몰됐어요. IMF 때 배신당한 경험 때문인 것 같은데, 자구책은 소비를 최소화하는 거예요. 존재의 비용보다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좋은 차 없어도 살잖아요? 다 도그마가 만들어낸 것이죠. 루이비통이며 명품 찾고 하는 것들이요. 너무 바쁘게 일할 필요 없어요. 교육비 때문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80%는 타고난다고 봐요. 20%가 후천적인 건데, 한 해 5조 원을 미국에 갖다 바치는 건 문제죠.”
“자제분의 교육은 어떻게 하세요?”
“딸이 둘인데, 가야금 배우고 싶다고 해서 그것만 가르쳐요.”
“한?중?일의 미래는 어떻다고 보세요?”
“일본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해요.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전통이 대부분 파괴되었고요. 한국은 그 중간인데, 공통점이 많으니까 문화연대가 가능하다고 봐요. 한자와 유불선이란 공통분모가 있거든요. 연대가 필요하고, 또 그렇게 갈 거예요.”
“명문가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 무슨 명문가가 있느냐 하는.”
“빈부차는 불가피합니다. 다만, 납득가능한 빈부차라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취약하긴 하죠. 경주 최부자집처럼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상생의 정신이 필요하죠.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그런 정신 말이죠.”
“칼럼을 진행하시면서 독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리 땅, 우리 문화에 대해 몰랐는데 알게 돼서 고맙다는 것,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켜 주는 내용이라 좋다는 것이에요. 가끔은 아이들의 한자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학부모도 있고요. 항의도 많아요. 지명 틀리면 아주 난리가 나요. 명문가 집안에 우리 집안이 왜 없느냐는 항의도 있고요.”
“어떤 칼럼들이 인기가 좋았습니까?”
“칼럼 방향은 정보와 재미, 그리고 안심을 준다는 것인데, 팔자 바꾸는 방법이 제일 반응이 좋았어요. 그 밖에 2인자론, 사람에겐 그릇의 크기가 있다, 그런 내용들이에요. 인생의 성찰을 제공해 준다는 얘기를 하세요. 카네기 처세류 같은 경쟁지향적인 내용은 안 씁니다.”
“잘 사는 것, 행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연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번뇌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복잡한 일 안 만들고 욕심 안 부리는 것. 행복은 성취하는 것에 있지 않아요.”
“선생님의 고수 인터뷰집을 보면, 인터뷰하기 전에 그분의 사주를 먼저 뽑아보는 부분이 아주 재밌었습니다. 오늘은 제 사주를 한 번 봐주세요.”
“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야지요. 생년월일시가 어떻게 됩니까? (생년월일시를 적어드렸다.) 무신년(戊申年) 신유월(辛酉月) 신묘일(辛卯日) 갑오시(甲午時). 시(時)가 좋네. 금(金)이 아주 많군요. 그것도 차가운 금이에요. 맥주, 이런 거 못 먹죠? 거짓말 못 하고,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이지. 이런 사주는 불[火]을 만나야 돼요.” 이제 분수를 알았으니, 자족(自足)을 하는 방법만 찾으면 되는 건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중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장성 휴휴산방에 선생이 왔다는 소식에 광주와 익산, 정읍 등에서 몰려온 친구들이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들도 있고, 문화제 전문위원도 있고, 방송국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 낯익은 사람도 있다.
『방외지사』에 소개된 강기욱 씨다. 그는 광주 광산동의 고택에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백수(白手)로 ‘현대인들은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야 불안하지 않은데, 그것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다.’라고 한 당사자다.
가만 생각해 보니, 처음 휴휴산방에 와서 비어 있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충고처럼 여겨진다. 성공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삶은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하는 삶의 본보기, 사부(師傅)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