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신의 글은 참 묘하다. 황경신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황경신처럼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결단코’ 없다. 황경신의 글은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글이다. 시도, 동화도, 소설도, 에세이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에 다 속하기도 한다.
시의 여운, 동화의 따뜻함으로 반죽을 만들어 빵을 굽고, 판타지의 자유로움이라는 크림을 바른다. 그리고 톡톡 튀는 발랄함과 유머러스함으로 장식하고, 마무리로 ‘매혹’의 파우더 슈거를 살짝 뿌린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작은 조각 케이크’가 그녀의 글이다.
한 번도 ‘작가’가 되길 소망하진 않았지만 어느새 여덟 번째 단행본 『슬프지만 안녕』을 낸 황경신을 <페이퍼> 사무실에서 만났다.
짧고 가볍고 욕심 없이 글을 쓴다
한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위치한 <페이퍼>의 사무실은 한가했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잡지와 책 무더기 사이로 한두 사람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마감을 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마감이 얼마 전에 끝나긴 했지만, <페이퍼> 기자들은 재택근무를 하거든요. 평소에도 사무실은 이런 분위기예요. 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사무실이 편한 사람은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하고.”
올해로 11년째 <페이퍼>를 만들고 있는 황경신은 자신의 일상의 대부분을 <페이퍼>에 투자하고 있다. 그녀에게 글을 쓰는 작업은 <페이퍼>를 만드는 작업의 일부다.
“다른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했으면 글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편집장은 잡지의 색깔을 만드는 사람이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글을 쓸 때, 생각을 많이 하지도,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도 않는다.
“글을 쓰고는 금방 잊어버려요. 싫증을 잘 내는 스타일이라 호흡이 긴 글, 장편 소설 같은 것은 쓸 엄두가 안 나요. 한 스토리를 오래 끌고나가는 것을 잘 못해요. 그래서 제 이야기들은 거의 한 가지 에피소드로 끝나 버리죠.” 시나리오나 장편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쓰다 보면 지겨워졌단다.
“배경과 제목 정도만 생각하고 글을 써요.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즐기죠.”
욕심도 없다.
『슬프지만 안녕』에 쓰인 글처럼 어쩌다 보니 글을 쓰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페이퍼>를 11년째 만들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책을 내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드라마 대본까지 쓰게 되었다.
“제 글은 <페이퍼>와 함께 써지게 된 것입니다. <페이퍼>가 없었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글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발견하다
<페이퍼>와 황경신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페이퍼>를 시작해 지금까지 만들어 온 것이다.
“<페이퍼> 전에는 그냥 직장생활을 했죠. 직업이 삶에 별 의미가 없었죠. 그냥 월급을 주니까 다니는 곳 정도?” <페이퍼>는 그녀에게 전혀 다른 삶을 선사해 주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페이퍼>를 뺀다면 아주 작은 부분만이 남을 것이다.
“<페이퍼>를 만들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앞으로 자신과 <페이퍼>가 어떻게 갈지는 모른다.
“계획대로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잖아요. 처음 <페이퍼>를 창간했을 때, 3년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벌써 십 년이 훌쩍 지나갔잖아요.”
<페이퍼>에는 고정된 틀이 없다. 하고 싶다면 그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있다. 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
“몇 달씩 같은 스타일로 가다 보면 어떤 틀이 생겨버려요. 그럼 그 틀을 흔들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죠. 회의도 1시간 반 이상은 안 해요. 좋은 아이템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별로다 싶은 아이템에 대해서는 반응이 없으니까요.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서는 회의를 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다들 알아서 일을 하는 편이에요. 창간 때부터 같이 일한 필자가 대부분이라 서로 아주 잘 알죠.”
끝없이 새로운 것을 모색할 것, 그것이 <페이퍼> 식구들의 숙제다.
“그동안 <페이퍼>는 참 많이 바뀌었어요. 무가지에서 유가지로 전환하면서 바뀌고, 가격이 인상될 때마다 바뀌고, 또 시시때때로 ‘재창간’하는 마음으로 개편도 많이 했고요. 그럼에도 <페이퍼>가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건 독자와 함께 지금까지 변화해왔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늘 신나고 새로운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나이 듦’이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페이퍼>가 한 기획 중 가장 그녀의 기억에 남는 것은 ‘일탈’이라는 특집이었다.
“<페이퍼> 기자들이 오전 10시쯤 대학로에 가서 필자들에게 어떤 핑계를 대서든 대학로로 나오게 했어요. 다들 회사를 땡땡이치게 했죠. 나온 필자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어요. 그렇게 모여서 대낮부터 맥주를 마신 기억이 있네요. 두 번은 못할 기획이라고 했어요. 한 번 더하면 목숨이 위험할 거라고.” ‘일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기자와 필자 모두가 실제로 ‘일탈’을 한 것이다. 고정된 일상으로부터.
편집자로서 그녀는 필자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야 할 때가 있다.
“편집자는 잡지의 색깔을 맞추어야 하니까 필자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해야 하고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편집자와 필자는 호기심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편집자는 안테나를 세워 궁금한 것을 채집해 ‘제일 잘 쓸 것 같은 필자’에게 글을 쓰라고 부추긴다.
“필자가 잘 쓸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즐겁게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편집자로서 제 일이죠.”
다른 인생을 꿈꾸기 때문에 허구를 쓴다
수많은 글의 형식 중 그녀가 굳이 ‘허구’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한 가지 인생밖에 살 수 없어요. 삶이라는 길이 한 가지밖에 없어서 허구를 쓰겠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 같아요. 연극배우들이 무대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저도 허구를 쓰면서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거죠.”
텍스트의 형식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을 하지 않는다.
“어떤 형식이든 이야기는 있는 것이니까 저에게는 형식이 크게 문제가 안 돼요. 이야기가 형태를 바꾸어서 <페이퍼>에 연재되기도 하고, 드라마의 대본이 되기도 하고,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얼마 전 ‘한뼘 드라마’의 대본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작업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영상으로 옮겨지는 것을 경험했는데 무척 즐거웠다고 했다.
“단행본 작업은 제게 99% 책임이 있었다면 드라마 작업은 공동 작업이니까 제 책임의 퍼센티지가 그만큼 줄어들어요. 대신 제 생각 말고 다른 사람의 생각들도 많이 덧붙여지죠. 그런 점도 특별한 경험이었고, 대본이라는 것이 상영을 전제로 한 것이니까 이런저런 제약이 있잖아요. 그런 제약이 있는 글쓰기를 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나름대로 재미있었어요.”
그녀는 정식으로 등단을 한 것도, 글을 배운 것도, 습작을 한 것도 아니다. 프로다운 치열함도 없다. 그저 좋아서 글을 쓰는 아마추어다.
“‘작가’라는 말도 어색해요.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한 화두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들이죠. 저는 그 영역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라이터(writer)라는 말이 편해요.”
역사도 싫고, 공간에도 약하다. 치밀한 플롯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앉아서 글을 쓰는 것도 자신이 없다. 이야기의 씨앗을 계속 담아두고 살을 붙이는 것도 취미가 없다. 뭔가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을 잡아 한달음에 글을 써내려간다.
“픽션과 판타지를 살짝 넘나드는, 쉽고 편안한 글들이에요.” 그러면서 자신은 평생 ‘문학상’은 받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이고 웃었다.
“<페이퍼>는 잡지 영역에서 벗어나 있고, 제 글도 기존 글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죠. 비슷한 것도 없고요. ‘페이퍼’의 스타일이 제 스타일이에요.”
슬프고 불쌍한 이야기에 끌린다
글쓰기에 큰 영향을 준 작가로는 안데르센과 하루키를 꼽았다.
“어렸을 때 집에 10권짜리 안데르센 동화 전집이 있었어요. 안데르센의 동화는 슬프고 잔인한 이야기잖아요. 그래서인지 어둡고 슬픈 것, 또 완벽한 것보다는 어딘가 비고 불완전한 것에 더 마음이 끌려요.”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 중에는 결말이 슬픈 것이 많다. 특히 ‘사랑’을 다룬 이야기들은 모두 슬픈 여운을 남긴다.
“어렸을 때 만화를 빌리러 만화가게에 갔는데, 그때 ‘슬프고 불쌍한 것 주세요’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안데르센 동화 말고도, 제가 읽었던 동화들은 다 슬픈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동화가 왜 그렇게 슬플까, 나중에 내가 크면 행복하고 즐거운 동화를 써야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글에 관련된 꿈을 꾸었던 유일한 기억이에요.”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의 책은 어떤 욕구를 느끼게 해요. 미묘한 부분을 건드리죠. 책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뭔가를 하게 하고, 삶으로 걸어 들어오죠.” 하루키의 소설을 읽노라면 갑자기 맥주를 마시고 싶고, 스파게티를 삶고 싶고, 재즈를 듣고 싶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
“재미있는 책은 무척 많죠. 그렇지만 그런 책은 읽고 나서 덮어버리면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책으로 끝날 뿐이죠. 그런데 하루키는 책이 책 자체로 끝나지 않아요. 그런 점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특히 초기 작품들에요.”
가장 오래 살아남은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페이퍼>에 연재한 글과 인터뷰를 모아 책을 냈고, 장편 소설, 그림에 대한 책, 여행서도 각각 한 권씩 썼고, 번역도 3권이나 했으니 한 해에 2권 정도 꾸준히 책을 냈다.
첫 번째 책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는 그녀의 책 중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처음 책이 나온 출판사에 사정이 생겨서 절판되었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게 되었죠. 1998년에 나와서 지금까지 서점에서 살 수 있으니까 제 책 중 제일 오래 살아남았네요.”
가장 어렵게 쓴 책은
『그림 같은 세상』.
“제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림 같은 세상』은 <페이퍼>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서 펴낸 것인데, 그 글을 연재하기 전까지 미술에 대한 제 수준은 ‘피카소’나 ‘마그리트’ 정도를 좋아하는 평범한 수준이었어요. 연재하면서 그림을 찾아서 봤죠.” 그 책이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를 물었다.
“음, 편안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책을 읽고 나면 누구나 좋아하는 화가 한 사람 정도는 생기기 때문에 그래서 그 책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이번에 낸
『슬프지만 안녕』은 여러 번 걸러서 글을 쓰는 경험을 하게 했다.
“‘한뼘 드라마’의 대본을 <페이퍼>에 싣기 위해 다시 썼고, 그 글을 다시 손봐서 책으로 냈어요. 거의 2년 이상 이야기를 다듬은 셈이죠. 지금까지 글 쓰는 스타일하고 많이 다른 상태에서 글을 써서 무척 재미있었어요. 최근 글이기도 하고, 드라마 대본을 위해 썼기 때문에 굉장히 영상적인 글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목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고, 표지로 김원 이사님 사진이 들어가서 굉장히 애정이 많이 가는 책이에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책이 좋다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는 릴케, 자크 프레베르, 파블로 네루다로 모두 시인이다. 좋아하는 소설로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를 꼽았다. 모두 꽤 오랫동안 절판되었다가 1~2년 사이에 다시 나온 책들이다.
“저는 교훈을 주는 책을 싫어해요.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책이 좋아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예전에 <페이퍼>에 글을 쓸 만큼 좋아했던 책입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주로 고전들이다.
“일주일에 네 권 이상 책을 읽을 만큼 책을 열심히 읽었던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게 많이 읽지 않아요. 지금은 고전에 대한 갈증이 있는 시기에요. 찰스 디킨스,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들의 책이요.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디킨스나 셰익스피어는 그때 읽지 못했거든요. 사실 그때 읽었어도 별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어느 책이나 읽어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지금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읽고 있어요,”
즐겁게 쓰고, 즐겁게 읽는다
그녀는 작가라면 한 번씩 겪는 ‘글이 써지지 않는 슬럼프’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글을 못 쓰게 된다면, 정말 한 줄도 못 쓰게 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가끔 해보거든요. 그런데 별로 걱정이 안 돼요. 필생의 역작을 쓰겠다는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즐거울 때까지 글을 쓰자, 그게 전부니까요.”
쓰는 것은 즐겁기 때문에 쓴다. 그렇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글은 쓰지 않을 자유가 있다.
“글에 대해서 원하지 않는 이런저런 요구에 대해서 ‘그건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죠. 그건 전업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예요. 생계가 달린 전업 작가는 자기 글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잖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지금처럼 글을 쓰는 것이 제게 가장 잘 맞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자신이 즐겁게 쓰고, 그 글을 사람들이 즐겁게 읽어준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책을 통해 유명세를 얻을 생각도,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욕심도 ‘손톱만큼’도 없단다. 유명해지면 불편해질 것 같고, 갑자기 많은 돈을 벌게 되면 돈에 끌려가는 인생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다.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주 적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녀에게는 즐겁게 글을 쓰고, <페이퍼>를 만드는 것으로 행복이라는 잔이 넉넉하게 채워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