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몸, 내가 찾은 몸
옳고 그름의 관념이나 사회적 시선을 벗은 채, 내가 내 몸을 정중하게 응시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우리가 반드시 한 번은 해야 하는 작업이 아닐까요?
글 : 출판사 제공 사진 : 출판사 제공
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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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는 오랫동안 ‘트랜스젠더 시민권’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삶에 대한 요구는 ‘트랜스젠더로 자연사(自然死)’ 하기라는 작은 꿈을 실현하는 걸음과 이어져 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어 헤맴과 떠남을 되풀이했던 긴 여정을 빼곡하게 담은 이 책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을 가로지르는 당당한 몸짓이다.

오랫동안 퀴어 시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오셨죠이번 책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데, 그 동안 하지 않던 몸 이야기를 전면으로 꺼내 놓게 된 이유가 있으실까요.

제게 몸은 오래도록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 몸 아래 깔린 것만 같았어요. 제가 몸과의 거리감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입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저도 그래요. 저도 이해하지 못해요. 제 몸과, 무거운 것이 된 그 무게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어요. 힌트라도 얻고 싶었지만 우리 사회는 관심조차 없었고, 무가치한 것 취급했고, 지금도 퀴어적 혼란은 무시당하기 일쑤죠. 그들은 간단히 돌아설 수 있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죠. 그 몸을 가지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살아남으려는 마음이란 절박해지고 볼썽사나워지기 마련인데, 저조차 몸을 밀어내느라 발버둥 치다 보니 그동안 쓸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나이가 들고 보니 지금은 물끄러미 그 몸을 들여다봅니다. 제게 들러붙어, 저처럼 고생한 몸을 어루만집니다. 이제 곧 기억은 희미해질 겁니다. 남겨놓지 않으면 지워질 테고, 지워지고 나면 지난날 퀴어들의 생존처럼 간단히 삭제되고 말 테니, 어떻게든 남겨야 했습니다. 자연스레 지금이 아니면 이 몸을 문장으로 남겨 놓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혼란 기쁨』 책으로 나오기까지 10 가까이 새로 쓰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초고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수강생들에게 더 깊이 들어가 적어달라고 말하곤 했는데, 너무 깊은 자맥질이란 걸 알았습니다. 알면서도 멈추진 않았습니다. 제가 가진 몸을 향해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요. 용기라면 용기일 테고 무모함이라면 또 무모함이겠지만, 제 몫의 책임인 건 확실했어요. 이 몸으로 살아남은 ‘쓰는 사람’으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혼란을 담는 게 목표이긴 했어요. 제 안에 담긴 어긋남들을 함부로 삭제하지 않고 문장으로 옮기려 했지요. 그래서 초고가 다른 사람은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그 문장들이 지금의 ‘나’에 가장 가깝겠지만, 제 혼란처럼 저 혼자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란 걸 알았죠. 다시 고쳐 쓸 때마다 한 발씩 물러나는 거 같았어요. 그러니까 꽤나 가벼워진 이 책 한 권은, 두 배쯤 되는 혼란의 문장들을 열 번쯤 덜어내고 물러나는 동안 슬며시 드러난 몸인 셈입니다. 그 모습이 살아남은 쉰다섯의 ‘나’를 꼭 닮긴 했습니다. 

 

 책엔 남자 몸에서 여자 몸으로젊은 몸에서 늙은 몸으로 건너는 이야기로 가득한데특히 몸은 외투와도 같다 표현이 기억에 남아요

예뻐지고 싶은 마음이 무언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데, 그 말도 결국 예뻐집니다. 몸을 두고 예쁘다고 할 때, 저는 그 예쁨이란 게 뭘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어요. 성확정 수술을 하고 나서야 제게 걸맞은 예쁨이란 걸 알아차렸습니다. 물론 그것도 피드에 가득한 예쁘고 멋진 몸들과는 차이가 커요. 그래도 이전에는 전혀 알 수 없던 ‘예쁨’을 뒤늦게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드니, 저의 예쁨도 늙어갑니다. 이전의 예쁨을 고집하는 마음이 예쁠 수 없다는걸, 이제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뻐질 수 있는 존재인데, 너무 특정한 한 시절에 붙들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능성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열 살과 스무 살의 찬란함이 쉰이나 예순의 찬란함보다 더 예쁜 것이라고 누가 규정했을까요? 왜 우린 그걸 철석같이 믿을까요? 저는 열 살이나 스무 살의 예쁨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늙어가는 제 몸의 예쁨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낡아서 내 몸에 딱 들어맞는 외투 같은 그 예쁨이 참 귀합니다. 누구의 몸도, 성별도 다를 건 없다고 믿습니다.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두 예뻐질 겁니다. 

 

 제목이 강렬한데요, ‘혼란 기쁨이라는 어찌 보면 멀리 떨어져 있을 법한 감정을 나란히 놓아두었는데 제목을 이렇게 잡은 이유가 궁금해요.

‘혼란’이란 단어 옆에 ‘기쁨’을 나란히 놓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기쁨’은 ‘좋음’이나 ‘행복함’보다 더 즉각적인 몸짓을 떠올립니다. 상기된 두 볼, 웃는 두 눈, 치솟은 환호성, 그 모든 것들은 ‘기쁨’일 때 더욱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집니다. 돌아보면 ‘남자 몸’을 가지고 살며 그래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수술 이후에 조금씩 그런 제 몸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일부러 더 크게 웃고, 감탄하고,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이게 정말 기쁨인가?’ 싶은 불안은, 자연스레 끌려 나옵니다. 혼란 때문일 겁니다. 너무 오래 그 속에 붙들려 있어서요. 삼십여 년을 혼란 속에 고통스러웠으니, 또 삼십 년쯤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진짜 기쁨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하필 ‘혼란’ 곁에 나란한 ‘기쁨’은, 끝내 이 몸으로도, 누구든 그 어떤 몸으로도 가능한 희망의 영토를 확장하고 확정하고픈 제목인 셈입니다. 

 

소설가이기도 하시잖아요혼란 기쁨』  에세이 가운데소설로 확장해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책에 실리지 않은 초고에 담긴 내용이긴 한데, ‘인간’이라는 규정을 확장해 지금의 정의나 질서를 넘나드는 소설을 구상하고 있긴 합니다. 여성과 남성, 그 너머에 또 하나의 인간종을 만들어 달라지는 사회와 인간들에 관해서 말이지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질서나 공존 관념은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고정될 필요 없음에도 과도하게 집착적으로 유지되어 온 것들이 있지 않나, 저로서는 이따금 그 너머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건 진짜 혼란일까, 우리가 겁에 질려 혼란이라고 성급하고 단언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혼란 속 가능성이란 건 무얼까, 뭐 그런 이야기의 가지들을 계속 키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주름을 하나하나 펼쳐놓은 책으로 읽히는데쓰면서 특히나 혼란스러웠던 글과 기뻤던 글이 있을까요

어려웠던 글은 ‘갇힌 몸’ 챕터에 거의 모든 꼭지가 쓰기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위 ‘남자 몸’을 적어야 해서, 내가 적는 게 과연 남자 몸일 수 있을까, 육체적 디스포리아가 없는 남자들이 적어야 하는 남자 몸이란 건 확연히 다르지 않을까, 그런 혼란을 인정하고서 써야 해서 어려웠어요. 수술 이전에 제 안에 자리했던 감각과 인식과 감정을 최대한 길어올려 적고 싶은데, 끝내 정확히 적을 수 없겠구나를 깨달으며 글을 적어 가야 해서 힘들었습니다. ‘푸른 태양의 일격’이란 꼭지를 쓰며 행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생모인 복희씨에게 ‘욕심 많은 나무의 혼’이란 새 이름을 붙여주고, 그 삶의 이야기를 자꾸 적어 우리만의 ‘대’를 남긴다는 행위에 관해 적는 일이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혼란 기쁨』  다양한  이야기가 세상에 나올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고 여겨져요우리에게 어떤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실제로 비트랜스젠더 작가님들의 ‘몸’에 관한 여러 작품들이 있겠지만, 대부분 각자의 몸을 여성이나 남성에 한정해 그리거나, 혹은 다른 성별의 몸을 타자화하여 예술적인 방식으로 해석, 혹은 해체한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성별을 분리시킨 몸, 사회적 위계를 벗은 몸에 관한 글은 찾아보기 쉽지 않아요. 그런 몸을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와 동일시한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시도일 겁니다. 그러나 우린 늙어가며 몸과 분리되는 것만 같은 경험을 누구나 갖게 됩니다. ‘아직도 청춘’이라는 수사는 그 몸 안에 담긴 실존을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인식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그렇다면 우린 다른 속도로 낡아진 몸을 말하며 ‘나’를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옳고 그름의 관념이나 사회적 시선, 편견을 벗은 채, 내가 내 몸을 정중하게 응시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몸을 가진 모든 인간이 반드시 한 번은 해야 하는 작업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린 생각보다 더 멀리, 어떤 틀을 뛰어넘어, 상상치 못한 다른 곳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될 수 있는 건 아닐지요. 물론 그건 ‘혼란’을 닮았겠지만, 성별이나 정상 규정이 아닌 ‘산 몸’을 가진 존재로 기술하는 과정이라면, 결국 모두 평등을 확인해 우린 더 포용적인 인류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해나 공감이 희귀해져 버린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그런 힘을 찾으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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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기쁨

<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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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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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

1971년 경기도 문산 출생.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영자신문사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96년부터 영어강사 생활을 했다. 1998년 성적소수자 월간지 [버디]에 실린 단편소설을 시작으로 창작활동에 발을 디뎠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 데 함께했다. 트랜스젠더 정보홈페이지인 비포레인(www.bee4rain.com) 집주인이며 인터넷 문학웹진 '21C 젊은 글댕이들'의 글쟁이 중 하나이다. 인터넷 전자출판사 '미지로'에서 장편소설 『일생』『개년이』, 단편소설 『꼬마 눈사람』『그의 나이 예순넷』『미인들이 간다』 등을 출간했다. 서른아홉에 기적처럼 한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 덕분에 비로소 둘이 되었다. 사랑 덕분에, 이제 글을 쓰는 일도 혼자만의 것이 아닌 둘의 것이 됐다. 현재 [한겨레] 토요판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박조건형 작가와 함께 쓴 책으로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길을 잃어 여행 갑니다』 『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