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을 기다립니다] 나푸름 작가께 - 안윤 소설가
포기하지 않아 닿을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나는 소설을 통해 알았다.
글ㆍ사진 안윤
202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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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나푸름 작가님.

작가님과 저는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지요. 만난 적 없는 사이라는 게 엄연한 사실인데도 어쩐지 저는 그 사실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한 사람이 만든 세계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면, 안다고는 할 수 없어도 만났다고 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오래전 문학에 걸려든 이후로 저는 줄곧 그렇게 수많은 작가를 만나 왔거든요. 작가님께서도 그러시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2021년 초여름을 기억합니다. 전염병으로 삶의 모습이 달라진 지도 1년 반이 지나 있었지요. 도처에 죽음과 불안, 혐오가 도사리고 우리 각자의 유일한 얼굴은 마스크 속에 감춰졌어요. 그럼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봄꽃이 진 자리에 새잎이 돋고 이어 사위가 신록으로 넘실거렸지요. 아름다운 흉몽 같았습니다.

그즈음 저는 무거운 마음이 발목 언저리까지 가라앉을 때면 마음을 추슬러 모래주머니처럼 매달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습니다. 무엇을 단련하고 싶었던 걸까요. 홀로 동네를 서성이고 천변을 걸었습니다. 무정하고 다정한 세상 속에 제가 흘러가도록 놔두었습니다. 마스크가 축축해지고 숨이 차올랐습니다. 그렇게 숨이 막히는 순간에 제 숨소리는 더 또렷하게 들렸어요. 숨소리가 자꾸만 커져서 저를 둘러싼 풍경을 밀어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감각은 세 단계로 감지되곤 했는데 처음에는 이상하다가 이어 안도감이 들었고 마지막에는 슬퍼졌어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금 슬퍼지고 만 저를 가까스로 서점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평정을 찾고 싶었던 걸까요. 서점 안 서늘한 공기에 적당히 땀이 식었을 때쯤 신간이 진열된 평대에서 작가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작가님의 첫 소설집을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초록색 띠지를 두른 책은 제목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신간들 사이에서 『아직 살아 있습니다』를 집어 들고 '나푸름'이라는 이름을 손끝으로 짚어 보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책을 대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저는 표지와 제목에 끌렸다면 다음으로는 '작가의 말'을 읽어 보는 편입니다. 특히 소설집이라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작가가 소설을 한 편 한 편 살아내는 동안 새겨진 시간의 나이테가 그 짧은 글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니까요.

포기하지 않아 닿을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나는 소설을 통해 알았다.

평대 앞에 붙박인 채 '작가의 말'을, 마지막 문장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저를 이 편지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제 마음과 꼭 맞는 조각들을 글 속에서 발견하고는 무척 기뻤거든요. 그해 저는 등단을 했고 여전히 무엇도 기약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매일 환한 모니터 앞에 거북목을 하고 앉아 어둠 속을 더듬듯 문장에서 이전 문장으로, 간혹 다음 문장으로 더디게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어요. 오로지 불확실함만이 가장 확실하고 선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작가님께서 남겨 놓으신 문장처럼 포기하지 않아 닿을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알고 싶었고, 진정으로 믿고 싶었어요. 소설을 통해서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늦가을에야 『아직 살아 있습니다』를 찬찬히 다 읽었습니다. 아홉 편의 소설 속에는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미세하고 날카로운 삶의 균열들이, 돌이킬 수 없을 변곡점들이 서늘한 문장으로 포착되어 있었어요. 등단작인 「로드킬」과 「틈」, 「중국인 부부」에서 드러난 부부, 연인 관계와 그들 각각의 캐릭터는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그 서스펜스에 등골이 싸늘해졌습니다.

특히, 저는 「윌슨과 그의 떠다니는 손」에서 사고로 왼손을 잃은 윌슨에게 어느 날 돌아온 투명한 왼손과 「아직 살아 있습니다」에서 박 대리가 죽은 뒤에도 로그아웃되지 않은 채 사무실에서 일하는 박 대리의 더미, 「메켈 정비공의 부탁」에서 의뢰인 대신 여행과 모험을 경험하고, 그 기억을 판매하는 키튼 앤드 마거릿 주식회사의 기버(giver)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제게는 없는 색조와 질감으로 만들어진 낯선 세계였어요. 그러면서도 불안하고 부조리한 현실의 뼈대를 닮은 소설들이었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상실로 맞닥뜨리게 되는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상실은 무엇일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진짜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이 던지고 있는 질문들이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인간에게 불가피한 어떤 상실, 죽음 그리고 그 뒤에 달라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사정에 관해 저도 제 나름의 물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작가님께서 건네는 질문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저마다 자신만의 창으로 본 세상을 자신의 세계로 그려 보인다지요. 작가님의 창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습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목차 순으로 또 발표일 순으로도 읽어 보았습니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7년이라는 시간을 따라가며 그 흐름을 느끼고 싶었거든요. 책을 읽고 나서는 인터뷰도 검색해 읽고 출연하신 팟캐스트도 찾아 들었어요.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오디오 픽션 「여름 정원」도 발견했고요. 그렇게 조용히 작가님의 자취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면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제 미래의 어느 날을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제 첫 책의 모양새 같은 것,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은 뒤의 마음 같은 것, 앞으로 무릅써야만 할 불확실함과 기다림 같은 것을요.

이따금 작가님 이름을 검색해 봅니다. 지난해 발표하신 단편 소설 두 편도 보았어요. 「죽음은 한 번 찾아온다(웹진비유 51호)」와 「매장된 시신은 땅에 유용한가(에픽 #08호)」를 읽으면서 작가님의 이야기가 '다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저는 그 '다음'의 이야기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7년 7월 '문장의 소리(제506회: 매일매일 기다려 특집)'에서 등단 4년 차가 된 작가님은 쑥스러운 듯 말씀하셨어요. 일단 어서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드신다고요. 4년이 더 흘러 『아직 살아 있습니다』가 출간되었지요. 2021년 여름 <릿터>에 실린 인터뷰에서는 첫 책이 나와 무엇보다 후련했다고, 설레는 마음보다 후련한 마음이 훨씬 컸던 것 같다고 하셨고요. 그 후로 또 2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지요. 시간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인간이 발명한 투명한 눈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곳에서 헤아려 봐야 하는 건 시간도 목적지도 아닌 방향인지도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것은 제가 매일 저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해요.

저는 하루를 시작할 때 일기를 씁니다. 제게 소설 쓰기는 여전히 즐거움보다는 두려움 쪽에 더 가까운 일이어서 스스로 하루 치의 용기를 북돋아 줘야만 하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매번 두려울까, 두렵다고 징징대면서도 또다시 시작하고야 말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작가님은 어떠신가요. '작가의 말'에 쓰셨던 것처럼 여전히 소설 쓰기가 두렵고 알 수 없는 일인지요.

얼마 전 한 시인께 글쓰기의 두려움에 관해 토로했더니 이런 말씀을 해 주셨어요. 두렵다는 말이 참 좋게 들린다고요. 두렵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요.

나푸름 작가님. 이렇게 두서없이 작가님 소설의 안부를 묻습니다. 이 편지가 작가님께 부담스럽지 않은, 기꺼운 재촉이 될 수 있으려나요. 재촉까지는 아니어도 한 독자의 애정 어린 기척으로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 『제법, 나를 닮은 첫 음악』에 실린 작가님의 에세이 덕에 귀 기울이게 된 비틀스의 을 들으며 좀 걸어야겠습니다. 요즘 천변은 어김없이, 다시 새롭게, 온통 푸름으로 가득하거든요.

그럼, 무엇보다 몸과 마음 무탈하시기를 멀리에서나마 바라며.


안윤 드림.



*안윤

소설가. 2021년 장편 소설 『남겨진 이름들』로 제3회 박상륭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방어가 제철』을 썼다.



*나푸름


소설가.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로드킬」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 『아직 살아 있습니다』를 썼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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