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을 기다립니다] 이수명 시인께 - 황인찬 시인
<월간 채널예스> 2023년 4월호
자유롭게 미끄러지다 갑자기 다른 모든 것을 멈춰버리는 문장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저는 자주 궁금합니다. (2023.04.05)
선생님, 그간 건강히 잘 지내셨는지요. 선생님을 뵙지 못한 지 한참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잘 드리지도 못했네요. 이렇게 편지를 드리는 것이 그간의 격조를 벌충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 인사에 저의 반가운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아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근래 선생님을 자주 뵙지는 못하였지만, 저는 여전히 선생님과 선생님의 시를 자주 생각합니다. 저의 시 쓰기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두고 있는 여러 시인들의 시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중에서도 선생님의 시는 저에게 참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는 까닭입니다.
제가 시를 쓰게 된 이유는 선생님 때문이니까요. 선생님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선생님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말을 잠시 골랐습니다. 하지만 역시 약간의 엄살을 섞어 선생님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만나고 시라는 고약한 것에 빠져버리고야 말았으니까요. 시가 아름답고 흥미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시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게 된 것도, 무엇보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도 분명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
문예 창작학과에 막 입학했던 무렵, 저는 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시를 알고 싶다는 마음 또한 딱히 없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학부 2학년 시절에 선생님의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면서부터였습니다. 수업 시간에 시에 대해 말할 때 선생님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 제대로 이해한 내용은 거의 없었지만, 그 알 수 없는 이야기 가운데서도 문학에 대해 솔직하고 열렬한 모습을 보이던 그 순간이 아주 멋져 보였다는 것만은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멋진 모습에 동경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선생님은 너무 멋있는 사람이었고, 그토록 멋있는 사람에게 나도 칭찬을 받고 싶다는 것이, 시를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동기였음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의 시 쓰기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시작되고야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작정이야말로 시 쓰기에서는 가장 큰 힘이자 동력이겠지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시를 써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그 두려움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며, 사실은 은밀하게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는 시 쓰기를 통해 배웠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시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질문은 행위를 묶게 마련인 까닭이다. 생각하지 않을 때 시는 움직인다. 동시에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에 시에 이를 길이 없어 보인다. 시는 시적 공허에 대한 직면으로 자주 대체된다."
선생님의 첫 번째 시론집 『횡단』의 서두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제가 시를 쓰며 배운 것을 저는 자주 선생님의 시와 시론에서 확인하곤 했습니다. 분명 수업 시간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사실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던 말들인데, 시와 직접 마주하고 부딪히며 깨닫게 된 것은 결국 모두 선생님께 배운 것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시론을 읽으며 그리고 시를 읽으며 시에 대한 저의 생각들이 선생님에게서 왔음을 알게 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의 시 공부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빗물이 땅에 스미듯이, 옷에 향이 배듯이 선생님과의 수업 시간은 저에게 쌓여 있었습니다. 결국 배움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식을 얻는 일이 아니라 자세가 닮아가는 일이 배움이겠지요. 선생님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한 저의 시 쓰기는 선생님의 시적 태도를 닮아가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시를 쓰면 쓸수록 선생님의 시에 더 깊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선생님의 시가 포착하는 세계가 얼마나 투명하고 정교한 것인지, 시를 쓸수록 시를 알아갈수록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시'라는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그토록 멀어지고 넓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저의 시 쓰기는 선생님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받았기에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 배운 것을 생각하고, 선생님의 시를 생각하며, 그와 분리되고 구분될 수 있는 저의 시 쓰기를 고민하는 일이 습작 시절 저의 시 쓰기가 되었지요. 저의 시 쓰기의 시작점에는 선생님의 시가 있었고, 제가 한 명의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시작점으로부터 씩씩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멀리 나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된 지 어느새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저는 여전히 선생님의 배움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시간과 더불어 더 멀리, 더 자유롭게 운용되는 선생님의 시를 보며 기쁜 마음으로 낙담하는 날들을 오래 보내고 있지요. 멀어지기는커녕 한참 앞선 곳에서 가볍게 유영하는 선생님의 시를 뒤에서만 지켜보고 있는 형국이라고, 자주 생각하곤 합니다.
이 편지는 신작을 기다리는 작가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제가 신작을 가장 기다리는 시인은 선생님입니다. 매번 변화하고 나아가는 선생님의 시를 따라 읽으며 이 끊임없는 변화가 시인의 할 일이고, 변함없이 이어지는 탐구에의 자세가 시인의 본분임을 배웁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시는 어떻게 그렇게 계속 자유롭게, 그리고 더 명쾌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요. 배움에서 멀어지고 싶다고 바로 앞에서 말해 놓고는, 다시 또 배움을 청하고 싶어지는 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아마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출간되었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을 찾아뵙고 함께 오래 이야기 나누던 날, 선생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이렇게 가볍게 움직여도 되는데 왜 그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훌쩍 높은 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시집입니다. 선생님의 이전 작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세계에 대한 예민하고 정확한 감각으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엄격하지만 자유롭고, 부드럽지만 날선 사물들이, 그 사물에 대한 감각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생각난 것처럼 움직이는 선생님의 시가 저에게 얼마나 자주 놀라움을 주는지요. "이 털실은 부드럽다. / 이 폭설은 따뜻하다. / 이 털실은 누가 던졌기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털실 따라 하기」, 『마치』)처럼 자유롭게 미끄러지다 갑자기 다른 모든 것을 멈춰버리는 문장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저는 자주 궁금합니다. '물류 창고'와 '도시가스'를 오가며 너무 명백해서 오히려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그런 세계가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선생님도 알지 못하는 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멋대로 짐작해 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시란 무엇인가를 알기 원하는 일이 아니고, 미지에서 탄생하여 미지에 착륙하는 일이니까요.
바로 그렇기에 저는 항상 선생님의 시가 궁금하고, 더 읽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신작을 기쁜 마음으로, 애가 타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미지에의 움직임과 마주할 때, 무심코 어떤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의 기쁨이야말로 제가 시를 사랑하게 된 이유였으니까요. 제가 시를 사랑하는 이유를, 그리고 시를 쓰며 괴로운 까닭을 새삼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선생님의 시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움직일 인찬의 시를 위해!"
제가 등단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사인과 함께 선생님이 시집에 적어주신 말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충분히 가까이 가지도, 또한 충분히 멀어지지도 못한 채로 엉거주춤한 모양의 시를 쓰고 있을 따름이지만, 여전히 이 말을 자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선생님께 배운 대로 충분히 멀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러나 가까운 곳에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저 또한 놓지 않고 시를 써나가겠습니다. 계속 멀어지고 더욱 자유로워질 선생님의 시와 가까이, 그러나 멀리 움직일 수 있도록 애써보겠습니다.
이만 편지를 줄입니다. 머지않아 선생님을 뵙고 반갑게 인사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자주 즐거우시기를 바랍니다.
황인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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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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