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 수요일, <채널예스>에서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장화를 샀다. 상주중앙시장에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검찰청 동료들과 상주의 명물 남천식당 국밥을 먹으러 간 날이었다. 남천식당은 무려 1936년부터 대를 이어 장사를 하고 있는 국밥집이다.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오후 2시면 닫는다. 빈자리에 앉으면 주문할 것도 없이 국밥 한 그릇을 앞에 놓아주는데, 테이블에 놓여 있는 고추 다짐과 양념을 적당히 넣어서 먹으면 된다. 된장 베이스의 배추 우거지국밥으로 날계란도 하나씩 들어 있는데 가격이 3000원이다. 셋이 가서 후루룩 후루룩 뜨겁게 속을 채우고 나서 1만 원을 내고 1000원을 거슬러 받았다. 속은 이미 든든한데 거슬러 받은 1000원 한 장이 뭔가 허전해서 세 개 1000원 하는 시장 꽈배기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갖가지 싱싱한 모종이 눈을 홀리는 모종 판매점 옆에 장날이 아닌데도 문을 열고 있는 신발 가게가 있었다. 가게 앞에 쭉 전시되어 있는 장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 나 장화 사야 하는데...
마치 처음부터 장화를 사러온 사람처럼 홀린 듯 신발 가게로 접근했다.
가게 앞에 전시된 묘하게 힙한 느낌이 나는 체크무늬 장화를 집어 들자 가게 안에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엉덩이를 일으키며 말했다.
"그건 중국산이에요, 국산은 여기 있어요."
"국산이 더 좋아요?"
"당연하지, 바닥이 달라요."
국산이라며 아주머니가 내민 장화는 브라운 계열의 잔잔한 꽃무늬가 가득한 디자인이었다. 꽃무늬의 압박에 다소 망설이는 마음으로 주인장께 건네받은 장화를 신어봤다. 구두 속에 찌그러져 있던 발이 장화 속으로 쑥 미끄러져 들어가는데, 우와, 이거 뭔가. 발가락 마디마디 시원해지는 해방감. 아주머니가 자부한 대로 바닥은 탄탄한데, 몸체의 고무는 가볍고 유연했다. 게다가 그 브라운의 꽃무늬가 그날 마침 입고 있던 베이지색 정장과 어째서인지 찰떡이 아닌가. 함께 간 일행들이 모두 동의하며 부추기는 가운데 결국 그 장화를 샀다. 내친김에 남편에게 전화해 발 사이즈를 물었다. 왜냐고 되묻는 남편에게 장화를 하나 사려고 한다고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사이즈를 들은 아주머니가 얼른 남자용 장화 하나를 봉지에 넣었다. 남자 것은 디자인이고 뭐고 따질 것도 없었다.
"여성용은 1만 4000원, 남자 것은 1만 5000원, 합이 2만 9000원!"
장화라는 것을 사본 적이 없어서 이 가격이 적당한지 어떤지 알 수 없었으므로 두 말 않고 값을 치르고 돌아서는데, 아주머니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 뭐 행사라도 있어요? 왜 장화를 사러 오면서 양복들을 입고 왔데?"
그러고 보니 그 시간 그 시장에 양복쟁이는 우리 밖에 없었다.
"아니, 뭐... 저희는 원래 이렇게 입고 다녀가지고요..."
무언가 혼자만 드레스 코드를 못 맞추고 있다가 들킨 사람처럼 부끄러워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리하여 나는 장화를 가지게 되었다. 점심에 얼결에 발사이즈를 털린 남편이 저녁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왜 갑자기 장화를 산거야?"
"모름지기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장화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왜?"
그러니까... 왜냐하면 말이다.
실은 장화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어떤 유튜브 채널을 보고 나서다. 방송국 PD가 시골집을 사서 고치고 사는 이야기를 담은 채널인데, 몇 년 전에 나온 것이라지만 최근에야 보게 되었다. 콘텐츠를 보는 동안, 예쁘게 변신한 시골집과 그 앞으로 너르게 펼쳐진 평야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주인공 피디가 신고 있는 빨간 장화였다. 그는 장화를 신고 화면 속을 누볐다. 발밑에 뭐가 있는지 모를 수풀이 우거진 풀밭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성큼 걸어 들어갔다. 장화가 있어서 가능한 일 같았다. 장화가 내 발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믿음과 동시에 그 신발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를 든든하게 했으리라. 저 도시내기에게 망설임과 주저함 대신 용기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저 장화가 분명하다. 어쩐지 확신하며 생각했다. 나도 나만의 장화가 있어야겠다. 훼손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큼 나아갈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언제고 닥칠 테니까...
장화가 없어서 나아가지 못한 일들을 생각해보았지만, 구체적인 순간으로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내가 이전에 장화를 가져본 적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장화의 기억은 어린 시절 신었던 발등에 개구리 눈알이 튀어나와 있는 초록색 장화에서 끝난다. 그 이후로 줄곧 장화가 없었으므로 발이 젖고 진흙이 빠지는 길에는 가지 않았다.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성큼 용기를 내지 못한 대가로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장화가 있는 나는 보다 다양한 길들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수풀이나 어떤 진창 흙길들에 성큼 걸어 들어갈 순간들이 나에게도 가능성으로 주어질 것이다.
장화가 없을 때는 몰랐는데 내 장화를 가지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장화를 신고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논밭뿐만 아니라 시장 국밥집에서도 편의점에서도 거리에서도 장화를 신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우리 검찰청 구내식당 여사님도 고운 색깔의 체크무늬 장화를 신고 계셨다.
세상엔 장화를 신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만 없었어 장화?
그런 줄도 모르고 변변한 장화 한 켤레 없이 온갖 세상사에 아는 체를 하고 살아 온 날들이 무모하게 느껴진다.
시골에 계시는 엄마께 전화를 걸어 장화를 샀다고 말했다. 이미 오랜 경험을 통해 누구나에게 장화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엄마는 나에게 왜 장화를 샀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보다 실용적인 질문을 했다.
"어디서?, 얼마 주고 샀는데?"
"상주시장에서, 만사천원, 국산이야."
장화 애송이는 빠르게 대답하고 약간 긴장한 채로 전문가님의 평가를 기다린다.
"잘 샀네, 나도 지난 장날 새로 장화 하나 샀거든, 중국산인데 1만 5000원, 그런데 실패야. 살 때는 몰랐는데 일하면서 신어보니 너무 뻣뻣해."
아, 이미 수많은 장화를 가져 본 사람도 새 장화를 장만하면서 실패하기도 하는구나. 역시 어느 세계에서나 디테일로 들어가면 또한 심오하고 새로운 세계가 있기 마련이지. 내 장화를 신고 어떤 수풀이나 어떤 진흙길에 성큼 걸어 들어갈 용기 있는 날의 디테일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아직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겨우 인생 첫 번째 장화를 장만한 애송이로서 다만 장화 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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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원(대구지방검찰청 상주지청 검사(지청장))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썼다.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가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jmpark26
2023.06.14
황성주
2023.05.20
그래도 시골생활 한가한 검사의 컨셉이 너무 좋으니 계속 이대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