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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검사 J의 무탈한 나날] 여기는 심쿵요정들이 살고 있어요!

시골검사 J의 무탈한 나날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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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이 발행하는 '제철의 낭만'이라는 멋진 제목의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있는데, 매주 한 번씩 배달되는 편지에는 그들이 이곳에서 목격한 상주의 매직들이 싱싱하게 담겨 있다. 제철 산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심쿵 포인트'들이 빼곡하다. (2023.04.05)


격주 수요일, <채널예스>에서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좋아하는 서점 전경

책상 위에 허리 굽은 할미꽃 한 송이가 작은 도자기 화병에 꽂혀 있다. 꽃은 반쯤 벌어졌고 오소소한 솜털이 꽃과 줄기 전체를 덮고 있다. 향기도 없이 작고 고요한 꽃이다. 이 때문이다. 미간을 좁힌 채 쓰고 있던 다소 예민하고 시니컬한 글의 창을 닫고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우리 검찰청 1층에 있는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사무처장님이 아침에 가져다주신 꽃이다. 보통 미리 약속을 잡고 조심스레 내 방에 오시는데 오늘은 불쑥 나를 찾아오셨다. 무슨 일이신가 했더니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온 할미꽃 화병을 내미신다.

"아침에 나오니까 집 앞에 할미꽃이 피었더라고요, 할미꽃 보기 힘든데... 보시라고 가져왔어요."

세상에나. 갑작스런 일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어버버 하는 사이, 배고프면 먹으라고 곶감 몇 알도 놓고 가셨다.

집 앞에 핀 할미꽃을 발견하고 나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신 순간에 대해, 이걸 작은 화병에 꽂아서 손바닥에 받쳐 들고 오시는 동안의 발걸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분은 꽃을 받은 내가 이렇게 한없이 설렐 것까지 미리 알고 계셨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른다.

'제가 정말 좋은 걸 가지고 왔는데 지청장님도 엄청 행복하실 걸요?'

손바닥을 내밀던 사무처장님의 표정은 분명 그런 표정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할미꽃 한 송이에 온 마음으로 행복해지는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그러고 보니 이곳 상주에 와서 나에게 그런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우선 우리 사무과장님이 그렇다. 사무과장님은 청의 사정에 대해 나에게 이것저것 보고를 많이 하시는 분인데, 어느 날은 은밀히 전할 말이 있다는 듯 조용히 말했다.

"우리 청 정원 가장자리에 튤립이 심겨져 있습니다."

"튤립이라고요?"

놀라는 나를 보는 사무과장님의 표정이 그랬다. 

'그것 봐요 내가 정말 엄청난 소식을 알려줬죠?'

모두들 만난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된 사람들이고, 검찰청 안에서 일로 만난 사람들이다. 나는 이제까지 어느 검찰청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어쩌면 프로의 세계에서 '할미꽃'이나 '튤립'이라는 말들은 금기어다. 누구나 이 단어들을 알고 있지만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런 마음 같은 걸 품고 있다는 건 어쩐지 비밀이어서 서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어째서 불쑥 봉인을 해제하고 꽃을 내미는가. 거기에 까무룩 행복해지는 내 마음은 어째서 또 이렇게 쉽게 들키는가.

어쩌면 이것이 상주의 마법 같은 것이 아닐까? 땅이 너르고 하늘이 순한 상주 들판에는 예로부터 '심쿵요정'들이 살고 있어서, 외지에서 온 '무뚝뚝이'들을 놀라게 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 심쿵하게 꽃을 내미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또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원래 예전부터 서로에게 꽃 소식을 전하며 이토록 다정하게 살아왔는데 내가 먼 데를 헤매느라 보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러다가 상주에 와서 순해진 눈과 귀로 마침내 그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인가. 그걸 용케 알아보고 돌아온 탕아에게 순순히 꽃을 내미는 사람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얼마 전 발견한 상주의 동네서점 '좋아하는 서점'을 떠올렸다. 그곳은 청년 지역 일자리 프로젝트로 상주에 내려왔다가 눌러 앉아 동네 서점을 차렸다는 서울 청년이 운영하는 책방이다. 상주의 너른 들판과 자연들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고 물건을 만든다는 청년 두 명이 더 합세해 지금은 세 명이서 운영한다고 했다. 나는 이들이 발행하는 '제철의 낭만'이라는 멋진 제목의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있는데, 매주 한 번씩 배달되는 편지에는 그들이 이곳에서 목격한 상주의 매직들이 싱싱하게 담겨 있다. 제철 산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심쿵 포인트'들이 빼곡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서점을 방문한 날, "상주분이 아니시죠?"라고 물으며 책을 건네던 책방 주인의 표정도 바로 그랬다.

'당신은 지금부터 정말 멋진 것들을 보게 될 텐데, 아마 좀 놀라게 될 걸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도 우리가 주고받는 것이 꽃만은 아니다. 꽃 일리가 없다. 나는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을 다루는 일을 한다. 선하고 너른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범죄는 빚어지고, 범죄의 속내는 언제나 어둑어둑하다. 그 어두운 곳에서 사실과 법리를 가려 죄를 구성하고 벌할 것을 청하는 일을 한다. 내 앞에 당도한 사연은 제각기 가볍거나 무겁게 아프고, 내 앞에 앉는 사람들은 누구나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눈빛을 가졌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과 삶의 악다구니를 지천에 피는 꽃으로는 다 가릴 수가 없어서 우리는 법을 만들고 교도소를 짓고 사람을 가둔다. 비극은 조금씩 농도와 밀도를 달리할 뿐 인간의 마을 어디에나 있고, 그 앞에 책상을 두고 앉은 자로서의 나는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심박수를 최대한 느리게 조정하는 방법으로 검사다운 표정을 유지한다.

그런데 다 비슷해 보이는 슬픈 인간들의 도시 너머 어느 곳엔 유독 심쿵요정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 이것은 원래 있던 이야기는 아니고 실은 내가 만든 이야기인데, 나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믿어 볼 참이다. 이 마을에서도 사기 사건, 음주 운전, 절도와 폭력 사건들이 벌어지고 기록으로 묶여 검사의 책상 위로 배달되지만, 그 위로 불쑥 꽃을 내밀고, 심쿵! 해버린 검사의 표정이 어떻게 풀리는지 기대에 차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에 어떤 꽃이 피는지 다 알아 두었다가 철마다 찾아보고, 그 좋은 걸 나누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범죄도 조금은 유순해 지고 상처도 조금 빨리 아문다.

우리 검찰청 1층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는 내가 추정하는 심쿵요정 한분이 계신다. 나에게 할미꽃을 가져다주신 그분이다. 심쿵요정님은 검사의 기소와 처벌로는 미처 다 회복될 수 없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는 일을 하신다. 상처가 얼마나 깊은 줄도 모르고 밥을 짓고, 알바를 하다가 문득 눈물이 차오르곤 하는 피해자들 옆에 서 계신다. 오늘은 상담을 위해 방문한 어린 피해자의 신발을 손수 빨아주고, 컵라면에 물을 부어주고 있다는 목격담이 접수되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이래도 심쿵요정의 존재를 믿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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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정명원(대구지방검찰청 상주지청 검사(지청장))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썼다.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가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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