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마감 때 무엇을 먹을까? 염승숙 소설가와 윤고은 소설가가 글쓰기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번갈아 연재합니다. 매주 목요일을 기대해주세요. |
마감에 쫓기며 허방 짚는 심정으로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소설가를 떠올린다면... 글쎄, 어떻게 보일까? 그의 곁에 끊임없이 조잘거리며 시선을 맞추려는 어린아이까지 매달려 있다면? 나의 경우, 사실은 아이가 없는 인생을 그려본 적이 없는 데다가 아이를 기다리고 소원하는 시간마저 길었던 터라, 어느 정도는 마음을 다잡는 '각오'랄까 하는 것이 있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 소설을 쓰지 못할 수도 있어... 그 시기가 길어질 수도 있겠고... 아이를 돌보는 일이 소설을 쓰는 것보다 우선이 되어야 할 거야, 그래도 ...와 같은, 어쩌면 아무것도 몰라서 가능했던, 야무지고 성실한 체념.
그래선지 너무나 잠을 잘 자고 좀처럼 울지 않는 유순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얼마쯤 얼떨떨한 기분으로 다시 소설을 쓰는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아이와 함께 하는 소설가의 삶이란 한마디로, 만만치가 않았다.(그저 웃지요) 소설을 쓴다는 건 오로지 시간과 체력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육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이를 성장시키는 과정에도 시간과 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매 순간 누적되는 피로와 싸워야만 했으니까.
아이를 먹고 놀게 하는 동안 최대한 동선을 줄여, 일할 짬을 낼 수 있는 곳으로는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식탁만한 공간이 없었다. 다 식은 이유식 그릇이나 부러진 색연필이 널브러진 틈바구니에서 한탄도, 자조도 없이 써왔다. 소설을 쓴 것도, 아이를 낳은 것도 다 나의 선택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식탁에 앉아 글을 쓴다고 해서 될 대로 되라, 정도의 심정이라는 건 아니다. 책상이든 식탁이든, 어디에서고 완성만 하면 된다! 라는 마음가짐도 아니다. 쓰는 장소가 식탁일지언정 한 편의 원고를 '끝'내기 위한 과정은 지난하고 요원하기만 하다.
초고를 쓸 때는, 어느 정도 서툴고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보여도 무감하게 지나간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좀 더 신경써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장에 체크하거나, 서사적인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장면과 장면을 떨어뜨려놓기도 한다. 말 그대로 원고를 처음 써낼 때의 과정에는 완성도와는 별개로, 완성 그 자체만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진행시켜서 끝(장)을 본다는 느낌으로!
끝을 봤다면, 그러니까 초고가 완성되었다면 안도감과 함께 '시작해볼까'하는 기분이 든다.(응?) 어쨌거나 이제야 좀, 뭔가를, 제대로, 쓸 수 있겠군, 하는 기분. 마감은 초고 이후에야 온다. 초고를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소설가의 마감이 시작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쓴 사람은 난데 어째서 당신이?'라는 의아한 눈길을 쏘아대며, 나는 내가 만들어낸 인물을 엉덩이 툭툭 털어 일으켜 세운다. '자, 움직이세요,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시간이 없다고요.', 기진맥진한 그를 등 떠밀어 다시 장면 속으로 집어넣는다. 불필요한 단어와 부정확한 문장을 지우고, 부자연스러운 맥락을 다듬고, 인과 관계가 불분명한 장면을 손보고, 인물 행동의 논리적 필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능태를 고심하고, 도입부와 결말부의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려 애쓰고, 첫 문장을, 제목을... '좀 더, 좀 더'의 간절함으로 붙들고 매달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설가는 '펑크'의 두려움에 맞닥뜨린다. 일단 완성은 했지만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마감할 수 있을까, 원고를 발표할 수 있을까에 관한 곤혹스러움에 휩싸여 울고 싶어지니까. 언제나 그렇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 이게 소설인지 아닌지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일단 쓰고 완성해낸 것으로 충분하다고 잘도(!) 떠들어대면서 정작 나는 형편없는 걸 썼다고, 이래선 안 되는 거라고 절규해버리고 만다.(마감을 끝내기 전에 작가 생활부터 끝나버릴 것 같은 뼈아픈 탄식!) 펑크는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유령 같아서, 어른거리는 그 형체가 한번 의식이 되고 나면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커튼을 젖힐 엄두는 못 내면서, 그러니까 펑크 낼 자신은 없으면서도 펑크를 반복적으로 '고려'하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래도 이럴 때 조이스 캐럴 오츠의 말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그는 다작으로 유명한 소설가인데도, 초고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의 내린 적이 있는 것이다. "초고 작업은 더러운 바닥에 떨어진 땅콩을 코로 밀어내는 것과 같다."라고.(더러운 바닥에 떨어진 땅콩을 코로... 아아, 그렇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마감'이란 결국 다시 쓰고 고쳐 쓰면서, 자기 작품에 확신을 갖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마감을 '끝'낸다는 건 완성된 초고를 몇 번이고 가다듬고 매만지는 행위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통해 거짓 없는 아름다움과 직면하려는 태세와 같다고도 생각해본다. 소설가는 자신이 주시하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변하지 않고 일어나는 양상에 대해 쓰려고 하는 동시에, (나에게) 보이지 않는 불합리와 (남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불편에 대해서도 핍진하게 쓰고자 욕망하기에 그렇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가의 경험적 진실과 진정성 있는 사유가 녹아 있기에 또한 그렇고.
대학에 들어와 소설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강의실에서 선생님께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을 여전히 명심하고 있다. 소설은 현실의 거울이자 시대 사회의 산물이므로, 소설가는 보다 '큰' 것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던 말씀. 나는 소설을 써오는 내내 그것을 잊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다만 나 자신만이 통렬히 궁금하던 이십 대를 지나 세계의 외부로도 지극한 관심을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나로부터 달라질 수 있었던 건 분명,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안의 어떤 구조적 질서를 파악하고, 개인의 좌절과 희망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고민해온 것이니까. 장편 소설 『어떤 나라는 너무 크다』와 『여기에 없도록 하자』는 그런 분투의 결과물이지만...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점점 지쳤던 듯하다. 내가 보는 건 이 세계의 단면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라는 실체 없는 한계와 마주했다거나 아무도 읽지 않고 또 관심 갖지 않는 작품을 쓰고 있다는 철없는 비탄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2019년 여름에 네 번째 소설집 『세계는 읽을 수 없이 아름다워』를 내고 난 뒤 오랜 기간 소설을 쓸 수 없었다. 평론을 쓰며 일은 계속했는데도 소설은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단순히 초고를 완성하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전혀, 첫 문장조차 시작하지 못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그것이 작가가 글을 쓰려고 할수록 글이 막히는 일종의 슬럼프, '작가의 벽(writer's block)'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2020년 여름이 오고 다시 2021년 여름이 돌아오기 직전까지, 그때에 나는 내가 더 이상은 소설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낙심에 강렬히 사로잡혀 있었다. 동시에 펑크의 공포에도! 당장 그해 가을과 겨울, 계간지와 격월간지 등에 실릴 단편들을 써야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터였다. 마감일에 가까워서 펑크를 내는 건 도리가 아니니 지금이라도 못한다고 알려야겠지, 고민하면서도 어떻게든 쓰고 싶어서 괴로워했던 날들.
결론적으로 펑크를 내지 않고, 마감에 맞추게 된 소설 쓰기의 동력이 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아이다. 나의 아이 때문이었다. 다섯 살 여름에 접어들며 아이는 두 가지를 배우고 싶어 했는데, 하나는 한글, 다른 하나는 자전거였다. '가나다라'를 지나 '아'에서 '이'까지, 자모음을 익히고 글자를 읽어나가는 것과(아이가 제 이름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읽을 수 있게 된 글자는 '주차 금지'였습니다. 도시에 이 표지판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걸까요) 세발자전거의 안장 위에서 다리를 뻗어 페달을 밟아나가는 진도는 정말이지 하염없이 느렸지만... 아이가 한글과 자전거의 기초를 배우며 통과해나간 그 여름에 나 역시도 아주 기본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진리와도 같은!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하면, 는다.
아이가 스티커를 친구 삼아서 '꽃'과 '우산'과 '무지개'를 서툴게 읽어나가는 동안에, 나도 텅 빈 모니터 화면 속에 단어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두 해가 넘도록 한 줄도 쓰지 못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그리고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따라 느리게 나아가던 아이가 뭔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다는 걸 문득 알아챘을 때, 얕은 숨소리와 함께 혼자서 수십 번 뱉어내던 그 소리가, '파이팅... 파이팅...'(실제 발음은 '하, 이, 틴'이었죠)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어쩐지 뭉클해지고 말았다. 읽어주지 않는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상심하면서 나는 자신감을 잃고 우울해하기만 했구나, 내가 나한테 파이팅 한 번 외쳐주지도 않고...
인간은 유약하고, 시간과 체력은 나날이 부서진다. 소소한 일상의 반복으로 신경은 분산되고 마음은 조각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쓴다. 마감을 한다. 인생은 불완전한 초고와 같은 것. 고쳐 쓰고, 다시 쓸 수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끝'을 향해 몇 번이고 나아간다. 어쩌면 그게 다다. 소설가가 사는 방식은, 그게 전부다.
지난해, 펑크 내지 않고 마감을 '무사히' 지나온 뒤로 나는 무심결에라도 소설을 써나가는 태도와 기세에 대해 유념하려고 애쓴다. 내게는 그것이 삶을 지속해 나가는 힘이니까. 좀 더 큰 것에 다다르고자 인내하는 일정량의 수고로움일 테니까.
여러분도 부디 잊지 마시라. 때로는 타인의 격려에 의지하는 것보다 자신을 독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더욱 애틋한 용기를 준다. 그러니 오늘도 페달을 밟아나가는 기분으로 매일, 매순간, 파이팅... 파이팅...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염승숙(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