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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입은요?] 표일배 씨와 홍차 점조직

쓰는 동안, 입은요 4화 - 영혼의 진통제, 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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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는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점조직 형태로 활동한다. 그들의 목적은 독자들의 무의식 속에 홍차가 스며들게 하는 것. (2022.12.01)


소설가는 마감 때 무엇을 먹을까?
염승숙 소설가와 윤고은 소설가가 글쓰기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번갈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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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표일배가 있으면 좋은데."

Y의 말을 듣고 표일배가 뭔가 했다. 맥락상 차를 즐기는 도구겠거니 했지만 생김새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계영배의 차 버전인가? 

표일배라는 단어가 즉각적으로 불러온 건 한 남자였다. 오래전 단편 「평범해진 처제」(소설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에 수록)에 '표고영'이란 이름의 인물을 등장시킨 적이 있는데, 어쩐지 표일배는 표고영의 아버지 이름쯤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서른다섯 살의 표고영은 주인공이 10년 전 규칙적으로 만났던, 주인공을 첫사랑으로 기억하는 남자다. 운동을 좋아하고 고깃집을 운영한다. 그렇다면 표일배는? 표고영의 아버지 표일배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없다. 아는 것은 방금 정해진 그의 이름뿐이다.

어떤 이름들은 이렇게 '온다'. 독자로부터 소설 속 인물의 작명 과정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더러 있는데 나는 이름에 의미 부여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고 글자의 모양이나 발음했을 때의 느낌을 우선시한다. 이를테면 소설 『밤의 여행자들』에 등장하는 '고요나'의 이름을 정할 때 성서의 요나 이야기를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결정적인 건 요나보다 '고요' 쪽이었다. '고요'라는 말을 할 때 입이 만들어내는 모양과 소리가 좋아서 거기에 '나'를 붙였다.

발음을 중시한다면서 내 이름은 왜 이러냐고 어디선가 볼멘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요리사의 손톱」(소설집 『알로하』에 수록)의 '정방배'일 것이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요즘으로서는(그 소설을 쓰던 10년 전에도) 보기 드문 행위를 함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이른바 인간 광고판인 셈인데 당시에 나는 그녀의 이름까지도 지하철 노선도를 참고해 정해버렸다. 그녀의 일터였던 지하철 2호선 위에서 찾아낸 이름이다. 솔직히 정방배 씨에게는 좀 미안한데, 그래도 최종 후보였던 '정사당'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말해주고 싶다.

내게 영감을 준 그 단어, '표일배'에 대해 찾아보았다. 아하 이런 원리로군, 했지만 내겐 딱히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다. 차를 그다지 즐기지 않으니까. 차를 선물받으면 기분이 좋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차를 선물하기도 하지만, 고백하자면 우리집에서 차는 언제나 2인자다. 커피에 비하면 확실히 줄어드는 속도가 더딘데 그마저도 함께 사는 L이 차를 좋아하기 때문에 소비되는 것이다. 나는 차뿐 아니라 액체류 음식물에 큰 기대가 없다. 셋만 예외다. 물, 커피, 와인. 그 셋을 제외하면 주스니 차니 우유니 맥주니 뭐니 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음료가 다 고만고만하다.

그러니 내가 차를 마신다는 건 몇 가지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미 하루치 카페인 복용량을 다 채운 상태이며,(당연히 카페인이 없는 차를 선택한다) 그럼에도 무언가 마셔야 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는 것. 내게 있어서 차란 홀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대면용 단어, 두 사람 이상 모여야만 가능한 세계다.

'Tea For Two'의 노랫말 같은 그 세계에는 정갈한 테이블보가 깔려 있고 3단 트레이와 사랑스러운 색감의 홍찻잔이 꽃잎처럼 흩뿌려져 있다. 홍차를 좋아하느냐고? 아니, 잔만! 홍찻잔이 커피잔보다 더 예뻐 보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뿐,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꼭 홍차라는 보장은 없다. 찻잔 내부에도 장식적 요소가 있으니 그걸 살리기 위해서는 커피보다 차의 색감이 더 어울리긴 하겠지만. 표일배는 기능적으로 편리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내 오후의 티타임에 올리기엔 외관이 약간 아쉽다. 아무래도 나와 차의 관계는... 쇼윈도인 것 같다. 차의 참맛을 알기 전에 차가 있는 화사한 풍경에 먼저 반해버린 것이다. 뭐 이런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다 홍차 점조직의 영향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홍차는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점조직 형태로 활동한다. 그들의 목적은 독자들의 무의식 속에 홍차가 스며들게 하는 것. 제인 오스틴의 소설 곳곳에서 점조직 활동이 감지되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활발한 활동이 발견된다. 그 소설에서 티타임을 나누는 이들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레몬 아니면 크림?"이라고 묻고, "크림"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상대방이 다시 "구름 한 점만큼"이라고 말하는! 그렇게 매혹적인 풍경마다 계속 차가 있다. 홍차는 이렇게 이미지를 (내게) 팔고 나는 홍차 맛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홍차스러운 무언가를 동경하는 것이다.

홍차 점조직은 완전 나를 겨냥한 활동도 한다. 차와 곁들일 만한 음식들을 나열하는 것이다. 거기에 홀리기 시작한 건 최근 일이 아니다. 아마도 열 살이 되기 전에 읽었던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이 맨 처음이었을 것 같은데, 막내 에이미를 통해 '머핀'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호기심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으로 넘어가면 조금 더 잔인해지는데, 앤이 표현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앤과 다이애나의 티타임에 등장한 라즈베리 코디얼(혼동으로 인해 술을 마시게 되었지만)이라든지 버찌파이, 레이어 케이크 같은 것에 침이 고인 나는 거의 20년을 집착하다가 어느 여름 그 소설의 배경이었던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떠나기까지 했다.

문학 작품 속 홍차들이 늘 우아한 티타임 속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또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홍차가 등장하는 소설인데, 여기 나오는 홍차는 날것 그 자체다. 홍차가 아니더라도 대안이 있을 것만 같은 화사한 테이블이 아니라 우리에게 홍차란 무엇인가를 묻는, 보다 절박한 티타임이랄까. 이 소설 속 인물들은 홍차의 품질이나 가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구호소의 홍차에 대해서 "홍차가 아니라 오줌"이라는 평까지 하지만, 그들에게 홍차는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다. 주방 접시닦이로 일하는 노동의 현장에서도 그들은 홍차가 있음에 안도한다. 찻주전자를 늘 데워놓고 하루에 몇 파인트씩 홍차를 마신다. "홍차가 우리를 버티게 해주었다"고 말하는 마음이 어떤 걸까. 그들에게 홍차는 거의 영혼의 진통제다.

다시 쇼윈도 관계로 돌아오면, 나는 여전히 홍찻잔과 디저트 트레이, 티타임 때만 펼치는 테이블보 같은 것을 좋아하지만 홍차는 남아돈다. 카페인 몫은 커피에게 모두 줘야 하기 때문에 홍차에는 아무래도 손이 덜 간다. 그러나 내게도 꼭 홍차여야만 하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우유와 함께할 때다. 밀크티는 대면용이 아니라 나만의 것이 될 때도 있고, 밀크잼은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 내가 불 앞에서 시도하는 몇 가지 중 하나다.

찻잎과 우유, 설탕을 넣고 주걱으로 끝없는 원을 그리는 행위는 성실한 왈츠와 같다. 내용물이 냄비 밖으로 넘치거나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저어주는 과정은 양치질할 때조차 다른 일을 병행해야 하는(다른 손으로 거울을 닦는다든가, 아니면 스쿼트라도!) 내게는 꽤 지루한 시간이다. 결국 싱크대 위에 두 세계를 펼쳐놓는다. 독서대가 등장하는 것이다. 주걱을 쥐고 잼을 저으면서 시선은 책에 두는 것이다. 싱크대 위에는 용암처럼 솟아오르는 잼 냄비, 그리고 잼과 아무 상관도 없는 책이 나란히 놓여 있고 가끔 오른팔이 두 세계를 넘나든다. 냄비 안을 휘젓다가 책으로 넘어와 페이지를 넘기는 것. 냄비에서 내용물이 튀어 올라 책 위로 떨어질까 봐 맘 졸이는 맛도 좋고, 나름 스릴 있는 독서랄까. 밀크잼 만들 때 중요한 건 홍찻잎을 너무 많이 넣지 않기. 된장으로 오해받은 적이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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