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의 K열 19번 : 코로나와 OTT의 시대에도 극장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극장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즐거움과 시시함이 있다고 믿는다. 'K열 19번'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쯤은 앉아보았을 좌석이다. 극장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지면에 딱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
시간이 사라졌다
남편과 이혼하고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에서 혼자 아이 둘을 키우며 사는 쥘리의 삶은 숨가쁘다. 해도 뜨기 전부터 일어나 아이들을 깨우고 먹이고 입혀서 육아 도우미 집에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기차에 올라타면, 그제야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기차를 타고 쥘리가 향하는 곳은 파리 시내의 5성급 호텔. 그곳에서 쥘리는 룸메이드로 일하고 있다.
출근해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면 이미 하루의 절반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지만, 오늘의 본격적인 시작은 지금부터다. 그는 온종일 호텔을 돌아다니면서 방들을 정리하고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온갖 잡다한 일을 처리한다. 그러다보면 퇴근 시간이다. 아침에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동네로 돌아오면 어느 사이 깜깜한 저녁. 아이들을 찾아 귀가해서 다시 먹이고 씻기고 재우면, 밤이 찾아온다. 쥘리의 시간은 쉴 새 없는 점프컷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고 할 때, 각 작품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다양하다. 많은 경우 영화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시간 속에서 무엇이 쌓이는지, 그리하여 시간이 마침내 무엇을 해내는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간을 담는다. 하지만 에리크 그라벨의 <풀타임>이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시간이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속 쥘리의 시간은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끊임없이 쉬지 않고 떨어지지만, 그의 시간은 쌓이지 않고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풀타임 잡인 워킹맘의 시간이 감각되는 방식이다.
불평등과 함께 시간이 사라진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쥘리가 자기 욕심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변에서 쥘리에게 "집과 가까운 마트에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직장과 가까운 파리 근교로 이사를 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하는 이유다. 하지만 쥘리가 보기에 그건 선택지가 아니다. 5성급 호텔이라는 직장을 포기할 수도, '사람 살만한 동네'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쥘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 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한다.
문제는 쥘리가 어쩔 수 없는 곳에서 터진다. 전국 규모의 대중교통 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파리 밖의 집과 파리 내의 직장을 이어주던 촘촘한 교통망이 마비되고, 정부가 최소한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조차 포기하면서 '각자-도생-통근'의 시간이 열린다. 공공성의 소멸과 함께 쥘리의 삶은 더욱 고단해 진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지각이 잦아지는 것은 물론 귀가도 계속 늦어지면서 그는 토끼 두 마리를 다 잃을 위험에 처한다. 직장 상사는 더 이상 그의 태업을 용인하려하지 않고, 육아 도우미는 더 이상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을 봐줄 수 없다며 강하게 항의한다.
사는 것 자체가 팍팍한 쥘리의 숨통을 더욱 틀어쥐는 것이 파업인 것처럼 보이지만, 흥미롭게도 쥘리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누구도 파업 자체를 탓하지 않는다. 파업은 (그리고 이에 준하는 시민들의 여러 형태의 저항은) 실제로 무언가의 원인이 아니라 무언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파업 자체가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이미 수많은 '쥘리들'로부터 시간을 박탈한 프랑스의 정치·경제적 현실과 그것이 초래한 녹록치 않은 삶의 조건이 놓여 있다.
<풀타임>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명백하게 참조하고 있는 사건은 2018년 노란조끼 운동과 그와 함께 일어난 철도 노동자의 대대적인 파업이다. 유류세 인상과 대규모 공무원 감축 정책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파 정부인 마크롱 정권의 친기업 정책과 부유세 및 자본소득세 감축에 따른 양극화 심화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파리 시내의 높은 주거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파리 외곽으로 밀려났지만, 생계를 유지할만한 괜찮은 일자리는 여전히 파리 시내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유류세를 올린다는 건 "돈이 없어 밀려난 이들"에게 가난에 대한 추가 세금을 물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회 변화를 꿈꾸는 일조차, 그리하여 시위에 참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조차 때로는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눈앞에서 울고불고 떼를 쓰는 아이를 달래야만 하는 쥘리에게 시위는 불평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도 없는 정치적 행위다.
쥘리는 시간을 복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쥘리의 욕심, 그러니까 타인의 눈에 '욕심'처럼 보이는 무리한 노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이를 낳기 전 하던 일로 복귀하기 위해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빡빡한 스케줄 안에 새로운 스케줄이 하나 더 끼어든다. 바로 면접이다.
호텔에서도 룸메이드로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지만,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유통업계에서 인정받으면서 능력을 발휘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결혼, 임신, 출산을 지나 독박 육아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유지할 여력이란 없었다. 양육비도 제 때 보내지 않는 전 남편은 자기 일도 하고 새로운 연애도 하는 와중에, 쥘리의 기회만 유독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다. 그걸 되찾는 건 가족의 생계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원래의 궤도 위로 올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건 단순히 욕심의 문제가 아니다.
하루를 열흘처럼, 열흘을 하루처럼 사는 쥘리가 새로운 직장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사라진 시간을 복구할 수 있을까? 카메라는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쥘리의 1분 1초의 '도전'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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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