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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K열 19번] 병든 세계를 치료할 수 없다는 절망 -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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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특별히 사회적인 의미를 담으려 한 건 아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영화의 공기는 어쩔 수 없이 세기말 일본인의 좌절과 공허감에 물들어 있다. (2022.07.07)



손희정의 K열 19번 : 코로나와 OTT의 시대에도 극장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극장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즐거움과 시시함이 있다고 믿는다. 'K열 19번'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쯤은 앉아보았을 좌석이다. 극장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지면에 딱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인생 필견의 영화 중 한편으로 꼽히는 영화.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7)가 개봉했다. 한국에 일본 영화가 정식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지 20여 년 만이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000년대 초 일본에서였다. 어학연수를 갔지만, 공부는 핑계에 불과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숙사 단칸방에 틀어박혀 일본 영화를 섭렵하며 보냈다. 범죄 스릴러물을 표방하는 <큐어>는 잡식성으로 쌓아가던 나의 일본 영화 리스트에서 단연 가장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도쿄 외곽, 낡은 기숙사 건물, 작은 방, 손바닥 만한 싸구려 브라운관에서 VHS로 만났던 <큐어>가 자아낸 두려움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 어떤 공포와도 달랐다. 그렇게 이 영화는 내 마음속에서도 전설이 되었다.

그 전설이 2022년, 디지털 4K 리마스터링본으로 극장에 걸렸다. 이번에는 영사 시스템이 좋기로 소문난 극장에서 보았다. 화질 나쁜 비디오로 볼 때보다 더 무서웠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무언가 분명하게 식별되지 않을 때 닥쳐오는 공포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나 모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사운드 디자인의 세밀함은 놀라웠다. 스멀스멀 옥죄어오는 불안 속에서도 <큐어>의 영화 언어를 온전히 즐길 수 있어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 영화만큼이나 기이한 감정의 조합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도쿄 인근의 모텔에서 한 여자가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피가 흥건한 시체 위에는 목에서부터 가슴까지 열십자 모양의 자상이 남아있다. 최근 도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 사건과 같은 상황이다. 담당 형사 타나베(야쿠쇼 코지)는 사건 해결에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수법은 같지만 가해자는 여러 명이고, 그들은 서로 일면식도 없을뿐더러 아무런 접점도 없다. 심지어 그들 모두 교사, 경찰, 의사 등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무언가 공통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수사를 이어가던 중, 타나베는 이들이 모두 범행 직전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라는 의문의 청년과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나베는 마미야를 취조하면서 진실을 밝히고자 하지만,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는 마미야는 오히려 타나베의 심리를 꿰뚫고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두 사람 사이에 심리전이 펼쳐지면서 서서히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당신은 누구인가?” 

마미야가 체포당하기 전, 도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 직업, 가족관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답하려고 하지만, 마미야의 반복적이고 집요한 질문 앞에 혼란스러워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관계나 지위 안에서 자신을 설명하는 이런 반사적이고 습관적인 답변으로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미야는 수차례 질문을 고쳐 물으며 사람들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유혹한다. 그렇게 해서 이들이 만나게 되는 ‘자아’는 텅 빈 채로 굉음을 내면서 무한히 회전하고 있는 세탁조와도 같은 상태다. 영화는 정확하게 말한다. 타나베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살인자들 사이의 공통점이란 다름 아닌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이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마미야는 타인을 파괴하고자 하는 악한 마음을 심어주지는 못한다고. 

그는 다만 이미 그곳에 있던 원망과 혐오를 일깨울 뿐이다. 첫 살인 사건 시퀀스에서 널브러진 시체를 보며 경찰들은 말했었다. “창녀의 자연스러운 결말”이라고. 하지만 그의 죽음은 그가 생전에 어떤 일을 했는가와 무관하다. 그런 참극을 초래한 건 가해자의 마음 속에 있던 증오일 뿐이다. 결국 마미야는 평범한 우리를 되비추는 거울일 뿐, 대단한 괴물은 아니다. 



절멸을 꿈꾸는 오컬트의 정조

“그저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특별히 사회적인 의미를 담으려 한 건 아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영화의 공기는 어쩔 수 없이 세기말 일본인의 좌절과 공허감에 물들어 있다.

1990년대, 일본에서는 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끊임없는 추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더 이상 희망찬 내일을 말할 수 없게 된 불안의 시대. 이 시기에 맞물려 실체를 알 수 없는 적과 맞서면서 존재 자체가 무기(武器)가 되어버린 10대들의 이야기가 일본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되었던 1995년, 사이비 종교 집단이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했던 옴 진리교 사건이 일어난다. 범죄물로 시작되었던 <큐어>가 애초의 의도와 달리 세계의 절멸을 꿈꾸는 오컬트의 정조를 품게 된 건 이런 시대상과 분리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놀랍게도 이 정조는 2022년 대한민국과 이질감 없이 접속된다. 지금의 우리 역시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병든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미야는 정신 의학을 전공하고 의사를 꿈꿨던 청년이다. 세계를 치료(cure, 큐어)하고 싶었던 그는 최면술에 깊이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절망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의 근원은 타자이며, 그 타자를 해치는 방식으로 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을 깨버렸을 때에야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는 파괴적인 결론에 자신을 맡겨버린 것일 지도 모른다.

21세기에 들어서면 일본에서는 슬로우 라이프와 단샤리(斷捨離, 미니멀 라이프)의 시대가 열린다. 그때 찾아온 징후적인 작품은 오기가미 나오코의 <카모메 식당>(2007)이다. 절멸을 통한 ‘큐어’가 아닌 몸체를 줄이면서 소소하게 자신의 삶을 바꿔가는 ‘힐링’이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답형으로 결론 내리기는 아무래도 어렵지만, 마미야의 방식이 결국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의 파괴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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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희정(문화평론가,『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문화평론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프로젝트38 연구원.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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