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손희정의 K열 19번] 단성 생식하는 가부장제의 말로 - <멘>

알렉스 가랜드의 영화 <멘>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영화는 제목처럼 하퍼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남편인 제임스는 하퍼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목숨을 버림으로써 하퍼의 영원한 죄책감으로 남으려 한다. (2022.07.21)



손희정의 K열 19번 : 코로나와 OTT의 시대에도 극장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극장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즐거움과 시시함이 있다고 믿는다. 'K열 19번'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쯤은 앉아보았을 좌석이다. 극장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지면에 딱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 <멘>의 줄거리가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남편의 죽음 후 하퍼는 런던 집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고즈넉한 시골 마을로 떠나온다. 아름다운 전원주택에서 2주간 머물면서 머리도 식히고 마음도 달래려는 계획이다. 짐을 풀고 동네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던 하퍼는 산책길에서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한 남자와 마주치게 된다. 이후로 그는 계속해서 하퍼를 쫓아다니고, 그와 함께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멘(Men), 그러니까 ‘남자들’ 

영화는 제목처럼 하퍼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남편인 제임스는 하퍼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목숨을 버림으로써 하퍼의 영원한 죄책감으로 남으려 한다. 

“내가 죽는 건 당신 때문이야.” 

하퍼는 복잡한 마음속에서도 남편이 남긴 저주의 말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마음의 평안을 찾으러 온 시골 마을은 선악과(善惡果)의 신화가 지배하는 곳이다. 영화의 초반, 전원주택에 들어선 하퍼가 처음으로 하는 행동은 정원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하나 따 맛보는 것이었다. 그걸 본 주택 관리인 제프리는 이후 이렇게 말한다. 

“그건 도둑질이에요. 금단의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되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신화 속에서 여자는 남자를 유혹해 원죄를 짓게 했다. 그리고 그 죗값으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라는 벌을 받게 된다. 월경은 그 죄를 상기시키는 피 흘림으로 규정되었으므로, 애초에 선악과의 신화는 여성의 신체 자체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새겨 넣은 잔혹한 이야기였다. 

기묘하게도, 혹은 자연스럽게도, 하퍼는 금단의 열매에 대한 경고와 함께 시작된 마을 생활에서 그를 괴롭히는 온갖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관리인 제프리는 계속해서 하퍼를 '말로 부인'이라고 부르며 남편에 대해 상기시키고, 그를 ‘누군가의 아내’라는 자리로 끌어당긴다. 동네 성당에서 만난 소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놀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에게 “멍청한 년”이라고 욕을 하고, 성당의 신부는 남편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벌거벗은 남자는 불쑥불쑥 등장해 하퍼를 위협한다. 그리고 치안 담당자인 경찰은 하퍼를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여자로 취급한다.

영화는 고전적인 공포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도움이 필요한 여자(a damsel in distress)’의 형상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준비해 놓고 있다. 위기에 빠진 것은 하퍼가 아니라 ‘남자들’이다.



멘(Men), 그러니까 가부장제라는 시스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우리는 ‘멘’이 단순하게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개개인의 남자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흥미롭게도 제프리를 시작으로 소년, 신부, 경찰, 술집 주인, 술집 손님, 그리고 벌거벗은 남자에 이르기까지, 제임스를 제외한 모든 남성 캐릭터를 한 명의 배우 로리 키니어가 연기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선악과의 시공간을 떠돌아다니면서, 하퍼에게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선사했던 ‘남자들’이 실은 하나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멘’이라는 총체는 끊임없이 하퍼를 고통의 근원이자 남편을 잡아먹은 ‘구멍’, 멍청한 신경증 환자, 불온한 욕망이 스며드는 ‘찢어진 상처’로 환원시키며 통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퍼는 끝까지 그들의 룰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처럼 하퍼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끝내 자신의 의지를 갖는 것 자체가 ‘멘’을 파괴한다. 이때 제임스는 이 총체를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한 명의 구체적인 남자다.

‘멘’의 붕괴는 일종의 의만(擬娩, 여성의 출산을 흉내 내는 풍속)으로 이어진다. 시작은 벌거벗은 남자였다. 하퍼를 소유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의 배가 갑작스럽게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가랑이 사이로 여성형 성기가 드러나고 출산이 시작된다. 그의 자궁으로부터 소년이 태어나고, 소년의 배가 불러오자 신부가 태어나고, 신부의 배가 불러오자 제프리가 태어나고, 제프리의 몸에서 제임스가 태어난다. 그렇게 멘의 몸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지금까지 공포 영화가 여성의 자궁을 괴물스러운 공간으로 묘사했던 관습을 비틀면서 남성의 단성 생식의 순간을 그려낸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남성이 한 가정의 주인으로서 아내와 아이들을 소유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성적 시스템인 가부장제가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유전자와 이름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여성의 몸을 빌려야 하는 남성이 자신의 핏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여성 신체를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관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제도를 발전시키게 되었다는 견해는 꽤 설득력이 있다. 바바라 크리드는 크로넨버그의 <브루드>(1979)를 분석하면서, 이런 역사 안에서 남성이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경외와 질투, 그리고 공포가 고대 사회의 의만 관행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후 공포 영화에서 통제되지 않는 괴물스러운 자궁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영화 속 ‘멘’은 죄책감과 수치심 같은 감정에서부터 폭력, 결혼 제도나 종교 제도 등을 통해 여성을 지배하려는 가부장제에 대한 은유다. 하퍼 역시 한 명의 여자라기보다는 그런 가부장제를 살아왔던 여성의 역사를 체현한다. 이제 페미니즘의 오랜 싸움 안에서 여성들은 하퍼처럼 “나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폭력적인 시스템의 재생산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변화와 함께 가부장제는 더 이상 유성 생식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본다면 <멘>의 클라이맥스는 단성 생식하는 가부장제의 말로를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가부장제 이후에 다가올 성적 시스템은 어떤 성격이 될까? <멘>이 열어놓은 기이한 틈새가 ‘모두를 위한’ 상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꽤 재미있을 것이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손희정(문화평론가,『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문화평론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프로젝트38 연구원.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등을 썼다.

오늘의 책

게이고답지만 게이고답지 않은 소설

2001년에 발표된 게 믿기지 않는 게이고의 장편 소설. 어느 날 나타난 친구의 ‘여성이지만 남성의 마음을 가졌다’는 고백. 거기다 살인까지. 충격적인 이야기의 뒤엔 젠더, 사회의 정상성, 결혼 등에 대한 질문이 숨겨졌다. 그답게 세심한 미스터리 흐름을 좇게 만드는 소설.

다정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박지현 저자는 15년간 다큐멘터리 디렉터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왔다. 유재석과 같은 인기 연예인에서부터 일반인, 시한부 인생, 범죄자까지. 다채로운 삶을 접하며 확인한 것은 세상은 아직 살 만하고 우리사회에는 다정한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입지 키워드로 보는 부동산 이야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입지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부동산 역사를 담았다. 교육 환경부터 도시계획까지 5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역사 속 사건을 통해 부동산 입지 변천사를 보여주며 현대에는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광고인 박웅현이 사랑한 문장들

『책은 도끼다』, 『여덟 단어』의 저자 광고인 박웅현이 아껴 기록한 문장들을 소개한다. 그가 ‘몸으로 읽’어낸 문장들은 살아가는 동안 일상 곳곳에서 생각을 깨우는 질문이 되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의 든든한 안내자가 된다. 이제 살아있는 독서를 경험할 시간이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