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의 수사를 더하면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 요소는 더 강화되죠. 독서의 감성을 살짝 바꾸는 시도가 중요합니다.”
사전 연재 당시 ‘격이 다른 만화’로 입소문을 탄 웹툰이 있다. 독특한 그림체, 철학을 담은 서사. 독자들은 말한다. “드디어 내가 읽을 만한 그리스 로마 신화가 나왔구나!” 원전은 읽기 어렵고, 어린이용 만화는 왠지 민망해 차일피일 미뤄왔던 그리스 신화 입문 『올림포스 연대기』. 김재훈 작가가 ‘어른을 위한 교양만화’로 그리스 신화 대장정의 첫발을 뗐다. 수많은 해설서와 각색 작품이 넘치는 영역에 도전장을 낸 그의 각오가 남다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 구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만화로 쓰고 그리는 그리스 신화를 구상한 건 대학원 재학 시절이었어요. 이제 교양만화를 해봐야겠다 그때 결심이 선 것 같아요. 당시 영상디자인을 전공하면서 텍스트로 이루어진 인문학 콘텐츠를 만화나 영상매체로 갈아 태우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어요. 마침 미술감독을 맡았던 그리스 신화 TV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고요.
그 무렵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디자인 캐리커처』라는 만화가 책으로 출간됐어요. 그 책을 계기로 출판계 인사들을 몇 분 만났는데, 당시 민음사 대표였던 장은수 선생이 향후 어떤 주제의 책을 쓰고 싶냐 물어보시더군요. 철학과 역사, 그리스 신화 주제를 다뤄보고 싶다 했더니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그리스 신화가 언제나 매력적인 콘텐츠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만화로 된 그리스 신화를 가지고 독자들과 만날 적기는 따로 있을 것 같다. 기다리며 추이를 지켜보자.”
그 후 꽤 긴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에 과학과 문화, 철학 분야에서 여러 책을 냈어요. 최근 몇 년간은 『어메이징 디스커버리』 시리즈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 때문에 해외 취재가 어려워지고 작업은 무기한 중단됐어요. 그래서 미뤄뒀던 그리스 신화에 관한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꺼내야겠다고 작심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죠.
TV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당시 미술감독을 역임하신 경험이 이번 작업에 영향을 끼쳤을까요?
당시 그 프로젝트를 지휘하면서 함께 작업한 유능한 친구가 있었어요. ‘김준’이라는 PD였는데, 그리스 신화에 관해 정말 아는 것도 많고 기억력도 좋은 친구여서 제가 미처 몰랐던 신화의 디테일을 많이 배웠습니다. <올림포스 가디언>은 밀리언셀러였던 어린이 만화책을 기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 전체의 스테레오 타입을 익힐 수 있었죠. 동시에 제가 만화로 펴내게 될 김재훈식 그리스 신화의 변주 방법을 틈틈이 생각하고 메모할 수 있었어요.
최대한 원전을 바탕에 두려고 노력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트로이>라는 영화가 있지요. 그 영화의 재미와 가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바탕이 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지금도 그리스 신화를 각색한 문학과 영상물이 수없이 나오고 있죠. 그런 작품들은 독자들이 신화의 기본 내용을 숙지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지금까지 그리스 신화를 만화로 재구성한 콘텐츠를 보면 성인 독자층을 중심으로 해서 청소년까지 고려한 사례가 없었어요. 김재훈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원전의 골자와 각색의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제가 문화예술을 감상하고 만화를 그리는 태도가 다분히 보수적인 탓도 있겠네요. 새로운 창작물이 아닌 교양만화 작업은 원전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원고를 준비하면서 어떤 자료들을 많이 참고하셨나요?
건축의 가장 중요한 골자로 늘 곁에 두었던 원전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입니다. 신화를 엮어서 낸 책으로는 불핀치와 구스타프 슈바브의 책을 참조했고요. 신화학자들이 친절하게 신화의 의미를 설명한 자료 중에는 『장영란의 그리스 신화』를 맨 앞에 뒀지요. 그 밖에도 여러 선생님의 책을 참조했습니다.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으로 신화를 재구성한 책으로는 로베르토 칼라소의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결혼』을 롤모델로 삼았어요. 신화의 기억을 전방위로 때로는 역순으로 가로지르며 방대한 서사를 완성한 명작입니다.
이번 작품에 ‘해학의 수사’를 더하고 싶었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해학은 비극과 상반되는 별도의 감수성이 아니에요. 해학은 비극과 동반되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수사는 서사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일종의 기교죠. 그런 점에서 해학의 수사를 더한다는 건 비극 일부분에 희극 요소를 첨가해 극의 면모를 바꾸는 게 아닙니다. 비극을 더 강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노력이죠.
『올림포스 연대기』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나 컷은?
신화 속의 신들은 취향이 정말 각양각색이라 독자마다 선호하는 신의 이미지가 있을 거예요. 반듯한 아폴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마초적인 군신 아레스를 좋아하거나 재기발랄하고 부지런한 헤르메스를 좋아하기도 하죠. 저는 어릴 적부터 모성을 지닌 여신에게 감정 이입을 많이 한 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모성에서 나온다는 믿음이 있죠. 헤르만 헤세의 소설, 아마 『지와 사랑』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대목에서 울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서사를 떠받치고 있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 대한 느낌이 저에게는 남달랐어요. 또 원전을 읽으면서 가장 신다운 면모를 갖춘 건 아테나 여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 저에게 중요한 사명은 따로 있었어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자질을 만든 어머니 메티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었죠. 그래서 메티스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과 제우스의 눈앞에서 사라지며 내면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이후 시리즈에 대한 계획도 궁금합니다.
저에게 가장 엄격한 비평가는 아내입니다. 아주 엄격한 편이어서 지금까지 제가 쓰고 그린 책을 보고 재미있다는 호평을 해준 적이 없어요. “편하게 읽기엔 좀 어려운 구석이 있어.” “지식 정보는 많이 담긴 것 같은데 재미는 별로야.” 항상 이런 식이었죠. 그런데 『올림포스 연대기』의 초고를 보고 딱 한마디로 평을 해줬어요. “재밌네.” 저로서는 유례없는 칭찬을 들은 거죠. 그래서 아내가 “이제 재미없어졌네”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 그리스 신화를 붙들고 씨름해볼 생각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다할 수는 없겠지만, 신화의 마지막 영웅들이 일리온(트로이의 옛 명칭)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재훈 (글·그림) 지식과 정보를 직관적이고 흥미로운 만화로 재가공하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영상디자인을 전공했다. TV만화 <올림포스 가디언>의 미술감독, 중앙일보 문화 카툰 연재,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카툰 등의 활동을 펼쳤다. 문화, 철학, 역사, 과학 등 글과 기호로 이루어진 지식을 그림과 영상매체에 적합한 콘텐츠로 재가공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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