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통과 아픔 앞에서 우아할 수 있을까?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샤르코-마리-투스(CMT)'라는 희귀병과 '퇴행성 고관절염'이라는 상대적으로 흔한 병 사이에서 불편함과 아픔을 겪어야 했던, 인내와 침묵만이 미덕이라고 여겼기에 말할 수도 내색할 수도 없었던, 질병의 낙인과 완벽한 몰이해 속에서 살아온 비참함과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던 사람.
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경계에서 부유하는 삶을 살아온 저자 오희승은 자신의 몸과 상처에 대하여,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불편함과 통증 사이를, 균형 잡힌 시선과 공감의 태도로 서른여섯 편의 글을 써 내려갔다. 질병과 아픔으로 가득한 삶을 어떻게 정의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고통 속에서 뿜어져 나오던 독과 칼 같던 생각을 가다듬어 다정한 언어로 첫 책 『적절한 고통의 언어를 찾아가는 중입니다』에 오롯이 담아냈다.
SNS에서 축하와 응원의 리뷰가 쏟아진다고 들었어요. 기분이 어떠신지요?
따뜻한 응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고통도 함께 이야기하는 글들이 많았어요. 리뷰를 읽으면서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들에게는 표현하지 못하는 고통을 안고 살았고, 모두가 힘들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이상하게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더 이상 미안해 말고 표현하자는 취지로 글을 썼는데 역시나 송구스럽고, 축하를 받아도 되는지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렇지만 붕 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마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를 오래 지켜보며 좋은 점뿐 아니라 부족하고 때로는 못난 부분도 분명히 보았을 테니까요. 포스팅으로 보여준 제 삶은 선택적으로 보여준 일부분이지만 절실했습니다. 달라지고 싶다, 나아지고 싶다, 성장하고 싶다는 갈망을 온전히 숨기지 못하고 글 속에 흘렸겠지요. 그랬던 저를 기억하고 “애썼다”라고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질병도 힘든데, 작가님은 희귀질환과 상대적으로 흔한 병, 두 가지를 안고 오랫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아픔에도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등 여러 잣대가 있을 텐데요.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신체적·심리적·사회적 요인으로 딱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영향을 주기 때문이에요. 제 경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불편한 몸에 애써 적응하고 잘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상태가 훅 나빠짐을 인지할 때였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미묘한 징조일지라도, 그동안 했던 노력들이 헛되게 느껴지고 앞날에 검은 장막이 드리운 듯 눈앞이 캄캄하니 절망에 빠지게 되거든요.
이 좌절감을 숨기고, 혼자 끌어안고 달래서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만, 결국은 그렇게 하다 보면 스스로 사회적 고립을 초래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더 불편해진 상태에 적당히 적응해나갈 것입니다. 일상도 어렵지 않게 굴러가겠지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그 순간의 충격을 쉽게 소화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건강함이 기본값으로 깔린 이 시대에서 아픈 몸으로 살아가며 가장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눈치를 많이 살피는 편이에요. 내 존재가 타인의 속도를 늦추고 폐를 끼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지냅니다. 혹은 타인의 속도가 저에게 해를 입힐까 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도 매번 느껴요. 혼잡한 셀프 주유소에서 주유할 때였습니다. 주유구 뚜껑을 돌려 여는 것도 빠르게 할 수 없었고, 기계에 신용카드를 넣고 뽑는 일도 손에 힘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손을 돌려가며 굼뜬 동작으로 했는데요, 줄지어 있던 차들에서 경적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럴 때면 이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후자의 경우는 주로 사람들이 밀치고 잡아끌어서 저를 다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눈치를 보고 적당히 먼 거리를 유지합니다.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마음의 거리도요. 갑자기 훅 들어와서 가까워지는 것보다는 서로의 속도를 잘 가늠하고 맞춰가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 ‘돌봄은 누구에게도 당연하지 않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로 가족이라서 당연히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간병을 받거나, 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모두가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 자신이 아프거나 아니면 아픈 가족을 돌보게 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간병을 하든 받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 가슴이 덜컥하고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게 되거든요. 질병과 돌봄이 인생에 큰 걸림돌이 된 것 같고, 더 큰 성공으로 나아가지 못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간병은 생로병사를 함께하는 체험이고 그 과정에서 인생의 여러 측면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 어떤 경우에는 돌봄이 개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기도 합니다. 돌봄이라는 과제를 다하지 못하면 큰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만, 오직 가족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음을 알아야 해요. 특히나 간병의 주체가 청년과 노년일 때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간병’ 하면 장년층의 부모 간병을 떠올리는데, 실제로 경제적, 심리적, 육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청년과 노년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롯이 책임을 떠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저 힘든 것을 떠나 개인의 삶 자체가 파괴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세 번의 수술로 통증은 사라졌지만, 샤르코-마리-투스(CMT)는 진행형일 텐데요.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무엇인지요?
제가 30대에는 40대가 되면 걷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지금은 그때 예측했던 것만큼 상태가 나쁘지 않고, 오히려 삶의 질은 상승했어요. 통증이 오고 견디기 힘들어진다면 다시 수술을 받아서 통증을 관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리의 기능이 떨어져서 보행이 어려워지면 보조기를 차고 목발을 짚는 방법을 선택해서 적응해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낙상사고는 여전히 두렵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자주 넘어지는 걸 막을 수 없어요. 집에서 혼자 곤란한 상태로 넘어졌다가 오래 고통을 받고 몸이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될까 두렵습니다.
궁극적으로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찾으셨는지요?
이 질문을 받고 문득,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Arrival, 2016), 원작은 테드 창의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갑자기 지구에 등장한 외계생명체와 대화를 시도해보는 언어학자의 이야기입니다. 고통을 표현할 언어가 외계인과 말하는 것과 비교할 만큼 어려운가?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는 언어조차 그것을 들여다보고 연구하면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고방식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 출간 후 저의 예전 모습, 그러니까 과거에 했던 말이나 행동들을 기억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내뱉었던 말들에 적절한 응답을 받지 못했고, 철저히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말들이 어딘가로 버려지지 않고 친구의 마음에 남아 그녀만의 언어로 서사를 구축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어요. 오랜 기간 서로의 인생을 지켜보며 각자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애쓴 일, 비록 시차는 있을지라도 적절한 응답을 하려는 나름의 애정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어요. 지금은 온전히 고통을 표현할 수 없고 이해시키기 너무 어렵다는 비관에서, 모든 표현이 유효하다는 희망으로 옮겨가는 중입니다. 마치 새로운 언어체계에 뛰어드는 것 같겠지만요.
‘견디는 삶’이 아니라 ‘부축하는 삶’을 향한 작가님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뉴욕의 한 지하철 계단을 오를 때였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벽면의 손잡이를 잡지 못한 채 계단 가운데 쪽으로 밀려갔었지요. 올라가는 방향이라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고 차분히 걸어 올라갔습니다. 중간 즈음 올라갔을까, 몸의 무게중심이 흔들리면서 순간 뒤로 쓰러지려는 걸 느꼈습니다. 이대로 넘어간다면 크게 다치겠구나, 일순간에 공포가 몰아닥쳤습니다.
그때 뒤에서 저를 받쳐주는 몸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버둥거리는 동안 그는 저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고 ‘앞으로나란히’를 한 자세로 온몸으로 부축해서 계단을 함께 올라갔습니다. 평지에 도착했을 때 제대로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그는 저의 걷는 모습이 아내와 닮아서 걱정되어 유심히 봤다며 말하고 쌩하니 가던 길을 가버렸습니다. 그 일로 무엇이든 알아야 제대로 돕고 부축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유심히 살피고, 물어보고, 배운 삶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부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희승 미술사를 공부했고 그림을 좋아한다. 매일매일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글을 썼다. 내세울 경력도, 출간한 책도 없다. 하지만 꾸준히, 열정적으로, 그리고 절실하게 나 자신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경계에서 부유하는 삶을 어떻게 정의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궁리해왔다. 내면으로만 파고드는 책 읽기를 하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견디는 삶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서로 부축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어졌다. 글이라는 상상 속의 공간, 그곳에서 서로의 마음을 부축하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의 풍경을 그려내고 그 풍경을 거닐며 이야기하고 싶다.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