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와버렸다. 빛도 따뜻함도 부족한 요즘, 인류애는 바닥을 치고 잠은 쉽게 오지 않는다. 누워서 ‘눈 오는 산장 벽난로 소리’를 켜놓고 잠을 기다렸다. 하지만 방심한 사이, 또 구구절절한 일들이 떠오른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길어질수록 나는 생각에 점점 깊이 빠졌고, 스쳐 간 인연들을 떠올리다가 ‘아이고 의미 없다~!’ 하는 비관적인 생각에 굴러 떨어졌다. 과거는 과거일 뿐 돌아보면 안 된다는, 절에는 가지 않지만 누구보다 깊은 불심을 품은 채 속세에서 직장인으로 구르고 있는 내 친구의 조언이 떠올랐다. 마음을 주고 돌려받지 못했다고 억울해하는 내 모습을 부처님이 보시면, 중생이여 또 헛된 자기애에 빠졌구나 하고 혀를 끌끌 차실 것 같았다.
헛헛함에 벗어나 무언가 행동에 옮기고 싶었고, 그래서 한다는 것이 어플을 까는 일이었다. 데이팅 어플에 거부감은 없으나 누구를 만나서 급격히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언어교환 어플이었다. 자기소개를 등록하고, 문화교류를 원하는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의 프로필을 구경했다. 먼저 채팅을 보내지 않아도 몇 명의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케이팝을 좋아하세요?'
'네, 완전 좋아하죠.'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가요?'
'최근에 <듄>을 봤어요.'
'두 유 라이크 스트로베리?'
...뭐래. 이렇게 열심히 답장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대부분의 대화는 이틀을 넘기지 않았다. 흠, 역시 아닌가 봐. 나는 한동안 어플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일상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몇 명의 친구들이 생겼다. 처음에 우리는 각자가 사는 곳을 소개하고 차이를 설명하기에 바빴지만, 며칠이 지나면 사실 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이것이 문화적 배경과 살아온 환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결국 긴 시간 소통하는 친구로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건 오늘의 날씨, 오늘의 기분, 요즘의 고민 같은 것들이고, 긴 설명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밥 먹기 전, 잠들기 전, 틈이 날 때마다 일상의 공백을 두고, 띄엄띄엄 그러나 꾸준히 대화를 나눴다. 독일에서 중국에서 일본에서 우리의 일상과 말은 핑퐁처럼 왔다 갔다 했다.
가장 좋은 순간은, 서로가 살아가는 곳에서 일어난 사소한 변화를 나눌 때다. 서울이 갑자기 너무 추워졌다고, 추위를 경험하고 싶으면 꼭 놀러 오라고 농담을 하자, 도쿄의 K는 자신의 고향은 추운 곳이어서 도쿄로 온 뒤엔 늘 추위가 그립다고 하며, 너무 가보고 싶다고 진지하게 답했다. 그의 고향은 일본의 북쪽 야마가타 현. 지도를 찾아보니 『설국』의 배경인 니가타 현 바로 옆이라 분명 눈이 많이 올 것 같다. 역시나 눈이 많이 오고 스키장과 온천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미지 검색으로 사진을 넘겨보면서 가보고 싶다고 하니, ‘꼭 오세요. 누나랑 안내를 해드릴게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야마가타에는 토토로의 숲이 있다. 따뜻한 볕 아래 누워 커다란 토토로를 닮은 나무를 올려다보는 상상을 했다. 언젠가는 갈 수 있을까?
모르던 곳을 알게 되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일상을 공유받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마음에 조금은 숨 쉴 틈이 생겨난다. 여전히 춥지만,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친구에게 보내주기 위해 사진을 더 남기는 습관이 생겼다. 산책하는 공원의 풍경이나 지하철 안에서 보는 한강, 다들 똑 같은 패딩을 입고 걸어가는 겨울의 거리. 잠들지 못하는 밤에 또 다른 시간대를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내가 침대에서 뒤척일 때 누군가는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는 걸 떠올리면 안심이 된다. 작은 눈덩이 같은 하루를 함께 굴리면서 다음해에 다다르자. 그럼 다시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두 점이 조금 이동하여 만나게 될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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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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