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은영 바다출판사 편집자는 오랫동안 대중문화잡지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2년 반 동안 잡지의 인터뷰 코너
“이 책은 독자 분들이 직접 지어주신 애칭이 있어요. ‘조당식’, 제목을 줄인 것인데, 사람 이름 같죠? 그래서 저희 회사에서도 ‘당식이’라고 불러요. (웃음) 잡지를 만들 때 임이랑 작가님께 식물 에세이 청탁을 드린 적이 있어요. ‘식물이랑’이라는 연재 코너였고, 한 달에 한 번씩 작가님의 글을 받아 읽을 때마다 큰 위로를 받곤 했어요. 제가 이 에세이를 단행본 편집자가 되어 만들게 될 줄은 그땐 몰랐고, 그래서 정말 감사하죠. 제가 받은 위로를 더 많은 분들께로 뻗어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책이에요. 위로가 필요한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책이라고 믿어요.”
책 만드는 편집자가 되고자 잡지사를 그만두었다. 파스텔에서 운영한 ‘편집자 되기’ 수업을 들으며 잘 알지 못했던 편집 실무를 배웠고, 강윤정 편집자의 강의와 기획안 피드백 속에서 전해준 응원 덕분에 용기를 많이 얻었다.
바다출판사는 수지 린필드의 사진비평집 『무정한 빛』을 비롯해 문화예술 분야의 양서를 출간하는 곳으로 눈여겨보았던 회사다. 입사 후 1년간은 출판사와 계약되어 있던 책들을 만들었고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를 시작으로 국내 저자의 에세이와 번역서, 매거진 『우먼카인드』를 만들고 있다. 잡지 에디터, 문화예술공간 기획 에디터로 일했던 경험은 편집자 일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됐다. 매달 인터뷰, 기사를 비롯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면서 문화예술 파트의 인적 네트워크가 풍부해진 상태였다.
“저자를 만나는 걸 좋아해요. 개인적으로 제가 진짜 좋아하는 분들, 같이 일하고 싶은 분들이기 때문이에요. 그 저자 분이 가진 어떤 면에 반한 이후로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분의 작품들을 섭렵하는 등 덕질을 하면서 ‘같이 일하면 어떨까?’ 상상해봐요. 대부분 즐거운 상상입니다. 책 작업은 일년 이상 소요되니, 저로서도 신중한 고민 끝에 기획 제안을 하게 돼요.”
염은영 편집자는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을 두고 ‘오래도록 좋아한 마음의 성취’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성덕의 결과물’. 서윤후 시인의 작품과 블로그 독자였고 『햇빛세입자』 저자 소개에 적힌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을 쓰기 시작했다”는 문장에 이끌려 산문집을 제안했다.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역시 꼭 만들고 싶었던 책이에요. 첫눈에 반한 사람과 이뤄진 기분이랄까.(웃음) 황 작가님 글을 처음 읽고 출근 지하철에서 펑펑 울었던 날이 지금도 생생해요.”
황예지 작가의 책은 이야기 딜리버리 프로젝트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에서 연재된 사진 에세이에서 출발했다. 암 판정을 받은 이도진 디자이너의 친구들이 그의 투병을 응원하기 위해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당시 가장 즐겁게 읽던 메일링 구독 서비스였다. 황 작가의 첫 글은 ‘피의 구간’이었는데, 그 원고는 지금도 거의 완벽하게 외울 정도로 좋아한다.
세상에 나와 너무 좋은 책들
책을 만드는 과정 중에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드디어 원고를 완전히 사로잡았다는 생각이 들 때. 교정 과정 외에도 이 원고와 친밀해지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해 읽는 과정을 거치는데, 끝내 이 이야기를 장악한 순간을 맞을 때 기쁘다. 지금 염은영 편집자가 만들고 있는 책은 전 세계 페미니스트 선언문을 모은 책 『우리는 다 태워버릴 것이다』 . 19세기 후반에서 현재까지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분노와 꿈을 담아 쓴 선언문을 모은 것으로 분노하고, 지치고, 압도되고, 소외되고, 배신당하고, 목소리가 없고, 불안한 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동안 삭제되고 소외되었던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역할을 하는 작품이에요. 여성학자 양효실, 이라영, 이진실, 한우리, 황미요조 선생님께서 번역과 해설로 함께 해주신 뜻 깊은 작업이기도 하고요.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로 쓰여진 이 선언문들에서는 깊은 숭고함을 느낄 수 있는 책이 될 거라고 자신해요.”
사회생활을 오래 했지만 편집자로서의 이력은 올해로 3년. 아직은 배우는 마음으로 편집 관련한 새 책이 나오면 일단 모두 읽는다. 새 필자를 발굴하기 위해, 『릿터』, 『에픽』, 『문학동네』 등 문예지뿐 아니라 주요 일간지 및 시사 주간지 연재 칼럼이나 인터뷰 코너, 문예 웹진과 뉴스레터를 꼬박 챙겨 읽고 위해 작가 개인이 운영하는 구독 서비스, 블로그 등도 살펴본다. 관심 있는 작가나 예술가에 대한 검색도 매주 혹은 상시로 업데이트한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기획 아이템을 만나곤 한다.
“편집 업무에 있어 가장 자극을 받았던 책은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입니다. 작년에 이 책을 만들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편집 요소가 상당히 많은 책이었는데, 이런 책을 한 권 만들고 나면 아무래도 편집 스킬 면에서 성장하는 부분이 있어요. 편집 관련 책을 꾸준히 읽는 것도 도움되지만 결국 실무 과정에서 제일 많이 배우니까요. 또 번역서 작업에서 가장 큰 원료가 번역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이주혜 소설가의 태도, 그분이 나눠주신 치열한 대화, 제게 보여주신 신의와 환대가 이 작업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와서 너무 좋아요. 리치는 권위와 전통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려 노력한 예술가, 끝내 침묵 당해온 이들을 깨어내고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 목소리를 되살리게 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에요. 그분의 중요한 저작을 알릴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요즘 염은영 편집자가 고민하고 있는 건 출간 속도와 책의 생명력. 에세이 분야에서는 책 한 권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속도가 굉장히 중요하다. 시의성에 방점을 찍고 준비했던 책들이 속도에 차질을 빚으면, 당시에는 중요했던 이야기가 지금 논의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책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오래도록 살아남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 역시 에세이 출간의 핵심이기도 하다.
“에세이는 트렌드가 반영되는 장르이고, 독자 분들의 생활에 특히 밀접한 장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아요. 가장 새것이었는데 가장 낡은 것이 되지 않도록 속도를 내는 일이 중요하죠. 그래서 ‘오래도록 읽히는 에세이는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편집자로서 가장 바라는 건 함께 일하는 저자, 동료, 독자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편집자가 되는 일. 각각의 책에 필요한 감각을 익히고, 저자와 독자의 필요를 언제나 진심으로 고민한다.
“책이 나오고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저자들이 칭찬받을 때예요. 그리고 독자 분들이 저자들에게 직접 보낸 리뷰를 보게 될 때가 있는데요. 저자들이 느낄 보람과 이 책을 만나 다행인 독자들을 생각하면 무척 감격스러워요. 개인적으로는 두 존재를 잇게 해드린 역할 수행을 잘한 것 같아서, 그 자체로 기뻐요.”
염은영 편집자가 만든 책들
임이랑 저 | 바다출판사
임이랑 작가님의 따듯한 위로가 깊이 묻혀 있는 책으로, 식물과 함께하는 삶의 안온함을 기대하게 한다. 그의 이야기와 식물들에 기대어 잘 살고 싶어지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이름을 가열차게 외우는 것, 그 세계에 몰입하는 것에 희망 있음을 엿본다.
에이드리언 리치 저 / 이주혜 역 | 바다출판사
어쩌면 평생 가장 중요한 책. 인생의 책. 이 책의 편집을 맡게 되었을 때의 환희와 두려움이 동시에 떠오른다. 에이드리언 리치라는 위대한 작가의 산문집을 만든다는 기쁨은 동시에 자기 부족함을 확인하는 괴로움과 비례했기에. 시인이자 비평가,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운동가인 리치의 중요한 산문만을 담았다고 과언이 아닌 책이다.
황예지 저 | 바다출판사
자신을 둘러싼 가장 가까운 관계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삶의 아름다움을 끝내 지키기 위해 분투한 사람의 지독한 기록이다. 아름다움의 근원이 다정함으로 녹아내릴 때의 찬란함이 사진과 문장마다 녹아 있다.
서윤후 저 | 바다출판사
서윤후가 글로 그리는 세계는 철저하게 순정하고 놀랍도록 치밀하다. 서정적인 언어와 수려한 문장 뒤에 감춰진 그의 장인정신을 만날 수 있는 근사한 산문집이다. 그는 서퍼다. 흔들리는 순간에 몸을 맡기고 그 파동으로 글을 쓰는 서퍼. 그의 세계를 꾸준히 지켜봐주시길,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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