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친구 하나가 말했다. 그날 자기도 모르는 새 걷고 있었더라고. 분수처럼 솟아나는 상실감과 슬픔을 달랠 길이 없어 무작정 집을 나섰는데,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한강 다리를 지나고 있었더라고. 시계를 보니 네 시간도 넘게 지나 있었더라고. 목적지도 없이 그렇게 하염없이 도시를 떠돌았더라며 이야기하는 친구의 얼굴은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인 듯 담담히 웃고 있었지만, 듣고 있던 나는 마냥 따라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가 걷는 동안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렇게 정처없이 걸었던 적이 있다. 내 마음을 내가 어쩌지 못해 무작정 걸었던 기억이. 어느 겨울 날 낯선 동네의 깜깜한 골목길을 헤매며 마음에도 부디 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깜깜한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텐데 하고 애타게 바랬던 적이. 그때는 마음이 꼭 깎아지른 절벽처럼 느껴졌다. 그곳은 가로등 하나 없이 온통 암흑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얇은 외투 한 장만을 걸친채 추운 줄도 모르고 몇 시간을 걸었다. 그때는 내가 원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나를 떠밀어서 걷는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출 수가 없어서 그렇게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산책하는 사람들이었다. 산책을 한다는 이유로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닌데, 사랑에 빠지고 나서 보니 한결같이 산책을 하는 이들이었다. 제각각 다른 상황에서 알게된 각기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걷고 싶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걸을 수밖에 없어서 걷는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 이들이었다.
『시와 산책』을 읽는 동안 사랑하게 된 이 책의 저자 한정원 역시 그런 사람이다. 저자는 멈추고 싶지 않아 멈춰지지 않는 산책을 하는 사람, 그렇게 걷는 동안 기쁨과 슬픔 사이의 감정을 느끼며 미소와 울상 사이의 어떤 표정을 짓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거대해지는지 아는 사람, 때로는 그 마음이 너무나도 거대해서, 그 안에 바다와 벼랑과 낮과 밤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리하여 걸을 수밖에 없어서 걷는 자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다.
대학에서 시를 공부하고 한때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다는 저자는 시인이 되는 대신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세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하고 여러 편의 영화에서 연기를 한 그는 비록 시인이 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시를 읽으며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는 동안 얼어붙은 강을 바라보며 그 안에 묻혀 있을지 모르는 목소리를 상상하고, 그 언젠가 등을 보이고 강가에 서 있던 친구의 슬픔을 헤아리고, 이름 모를 나무를 마주하고선 여름에 어떤 열매가 열릴지를 그려보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25편의 글은 그렇게 산책을 하면서 그의 마음을 스쳐 지나간 것들, 그리고 그가 그럴 때 함께 떠올렸던 시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구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것,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것들보다는 그늘 속에 감추어진 것,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것, 시시하고 초라해보이는 것들에 더 오래 시선을 둔다. 이를테면 고양이들이 밤에 몸을 누이는 장소, 울다가 잠든 사람들의 집, 오랜만에 마주한 과일 트럭 아저씨의 달라진 모습 같은 것들.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것을 발견한 뒤, 무심결에 스쳐 지나가기 쉬운 그것들을 오래 오래 고요히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고통을 응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찬란한 햇볕은 아름답지만 그 아래에서는 때로 많은 것들이 쉽게 퇴색해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그는 무언가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오히려 침침한 기운이 떠다니는 회색빛 흐린 날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흐린 날에는 흐린 날의 미덕이 있음을 안다. 겨울은 춥고 혹독한 계절이지만 재촉한다고 겨울이 더 빨리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겨울은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고통은 반드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만 한다는 것을,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고통에도 계절이 있다는 것, 시간에 따라 조금씩 흐름이 달라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비록 사라지지 않을지언정 고통의 농도와 온도가 조금씩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는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조그맣게 자리한 세 뼘 정도의 볕을 발견하고 거기에 조심스레 몸을 맞추어 보기도 한다. 그 안의 희미한 온기를 느끼고 그것을 통해 다시금 살아갈 용기를 구한다. 어떠한 일을 겪고 난 사람은 결코 그 일을 겪기 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둘만한 소소한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여 사랑하는 사이 일상의 구태와 폭력에 물들지 않을 수도 있음을 믿는다. 그렇게 그는 ‘행복’을 꿈꾸는 대신 무엇이 행복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외로운 사람끼리 만드는 작은 원의 소중함에 대해 말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울고 있는 사람 곁에 조용히 앉아 기다리는 누군가의 어깨를 닮았다. 슬픔에 빠진 사람 옆을 묵묵히 같이 걸으며 그의 산책이 끝나기를 고요히 기다려주는 사람, 위로의 불가능을 알기에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 않는 사람, 대신 그의 슬픔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곁에서 오래 지켜보아 주는 그러한 사람. 그런 사람은 안다. 울음이란 스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쳐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그는 그저 울음이 그치기를 말없이 기다린다. 그 언젠가 내가 깜깜한 골목길을 헤매고 있을 당시,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 만났던 한 친구가 내게 그리해 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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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작가)
작가. 에세이『다정한 무관심』,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를 썼다.
봄봄봄
2021.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