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는다는 건 삶을 무르익힌다는 것이다. 삶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깊은 삶은 기품 있는 삶이다. 삶이 깊어지면 남을 생각할 줄 알게 된다. 남을 생각할 줄 안다는 건 기품의 기본이다. 세월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인 그 기품. 이것이 아름다움 아닌가?
황인숙 시인의 산문집 『좋은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인터뷰 – 황인숙 시인 편>
오늘 모신 분은 사랑이 참 많은 시인입니다. 30년 넘게 시를 써오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계시고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자주 손꼽히시고, 또 변함없이 해방촌 고양이들의 곁을 지키고 계신 분이에요. 황인숙 시인님입니다.
김하나 : 시인님은 해방촌에 살고 계시잖아요?
황인숙 : 네.
김하나 : 1986년부터 해방촌에 사셨다고 하는 증언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서울 출생이시잖아요, 다른 동네에 계시다가 해방촌으로 오신 건가요?
황인숙 : 한 3년쯤은 하얏트 건너편에 살았으니까 같은 남산권이기는 했죠.
김하나 : 언니랑 같이 사셨을 때가 그때군요?
황인숙 : 네.
김하나 : 남산에는 언니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시게 된 거였어요?
황인숙 : 아, 네.
김하나 : 시인님이 남산을 만나고, 자정 지나서 남산이 어떤지도 점점 알게 되고, 남산의 산안개라든가 숲의 정령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점점 삶에 개입해 들어오잖아요. 처음에 의도해서 들어온 건 아니고 우연히 남산 근처에 살게 되었는데, 그것이 썩 마음에 드셨어요?
황인숙 : 네, 썩 마음에 들었는데, 제 기질을 보건대 어디 살았어도 그 동네 잘 못 떠나고 거기를 마음에 들어 했을 것 같아요. 가령 무슨 공단 지대, 영등포, 이런 데 살아도 그 정서를 체화하고 좋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하나 : 하지만 전혀 다른 시가 나왔겠죠?
황인숙 : 아, 네.
김하나 : 만약 공단 근처에 있다면 공단 근처의 리듬감이라든가 여러 가지 것들이 시인님의 시를 형성했겠네요.
황인숙 : 그랬겠는데, 언제부턴가 제가 일상시라고 할까 그런 걸 쓰는데, 초기에는 소위 운동권 사람들이 보기에는 음풍농월로 볼 낭만적인 시를 썼었기 때문에, 젊은 날 그런 데 살았으면 시가 어떻게 됐을라나 모르겠어요.
김하나 : 시에 “나는 밤나들이를 좋아하는데요”라고 하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리고 밤에 안개 속을 쏘다니시면서, 안개가 싹 벌어졌다가 지나가고 나면 삭 아무는 것처럼 “안개는 얼마나 쉽게 아무는가. 열리면서 닫히는가”라는 표현도 있었는데요. 저는 이번 책도 그렇고 시인님의 시를 읽을 때는 항상 남산 근처를 새벽의 안개를 가르면서 걸어 다니시는 모습 같은 게 떠오르거든요. 특히나 봄밤이면 조금 더 들떠서 쏘다니실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요즘은, 이 책에 나오는 시인님의 모습은 사뭇 달랐어요. 이제 양손의 짐이 많아졌기 때문이죠.
황인숙 : 예(웃음).
김하나 : 몇 년 전부터 계속해서 고양이들을 챙기면서 커다란 가방 안에 그릇, 물통, 사료, 간식, 똥 봉투, 물티슈 이런 걸 다 챙기셔가지고 고양이들 밥을 주고 계시는데, 이게 몇 년쯤 됐을까요?
황인숙 : 한 14년쯤 되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몸으로만 감당이 안돼서 카트를 끌고 다니죠(웃음).
김하나 : 카트에 아까 말씀드린 여러 가지들을 다 챙겨가지고.
황인숙 : 네.
김하나 : 이 책의 제목이 『좋은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잖아요. 표지에 보면 아주 화사하게 노란, 이게 은행잎일까요 꽃일까요, 모르겠는데..
황인숙 : 은행일 것 같은데요.
김하나 : 네, 아주 화사한 색깔로 그려져 있고. 이 계단에 고양이들이 있는데. 읽으면서 ‘아, 시인님 너무 힘드시겠는데?’ 이 생각이 구절구절 페이지마다 들어서, 제가 만약에 시인님의 친구였으면 진짜 잔소리 꽤나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황인숙 : 그러지 않아도 많이 듣고 있어서...
김하나 : 그렇죠?
황인숙 : 그런데 잔소리 들어봤자 저는 스트레스만 되니까 이제는 안 해요, 잔소리. 그냥 눈으로 꾸짖죠(웃음).
김하나 : 그러면 지금 고양이들이 몇 마리쯤 될까요? 시인님이 놔주시는 밥을 먹고 있는 고양이들이.
황인숙 :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꽤 멀리 다니고 있어요.
김하나 : 한 번 나가시면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까요?
황인숙 : 제가 하루는 저희 동네랑 갈월동 밑에까지 나가고, 또 하나는 플러스 동자동 있는 데까지 가는데, 긴 날은 진짜 여느 직장인 비슷한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닌가 싶네요.
김하나 : 그것뿐만이 아니라 비둘기들이 고양이 밥을 노리니까 ‘아, 비둘기들에게 따로 뭔가를 챙겨줘야겠다’ 하다가 점점 비둘기들이 너무 몰려와서 지역 사회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는 사건들도 여럿 있었고요. 그럴 때는 많은 생각이 드시겠어요. 내가 저 아이들을 먹이지 않을 수는 없는데, 사람과 동물이 같이 산다는 건 무엇이고... 정말 많은 생각이 드시겠어요. 그런데 한 번도 ‘아, 진짜 못 해먹겠다’라든가 ‘나는 더 이상 안 하고 싶다’라든가, 이런 마음이 드시지는 않으셨어요?
황인숙 : 그런 마음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게, 같이 일을 나눌 사람이 있으면 그런 생각이 있죠. ‘저 동네에도 누군가 고양이를 걱정하는 사람이 살 텐데,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동안만 자기 동네는 자기가 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은 하죠. 그런데 어차피 다른 생각 한다고 무슨 수가 생기는 게 아니니까 아예 생각을 안 해요.
김하나 :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서 나온 『아무 날이나 저녁 때』 안에 이런 부분이 있더라고요. 아까 음풍농월하고 지냈다는 말씀도 하셨었는데 “띄엄띄엄 살지 말라고 고양이를 맡기셨나 봐”라고 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 전에 띄엄띄엄 살던 때에 비해서, 고양이들 밥 챙기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난 뒤로는, 그 전과 다르게 정말 성실하게 살고 계신 것 같으세요?
황인숙 : 시 쓰기랄지 챙겨야 될 가까운 사람을 챙기기라든지 이런 거 저런 거는 굉장히 불실하죠. 그런데 시간 자체는 정말 24시간이 모자라게 사는구나, 라고는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전부 인생 총량의 법칙대로 옛날에 하도 듬성듬성 살아서 그 몫까지 꽉꽉 채워서 살게 되고(웃음). 진짜 저는 지갑도 갖고 다니기 싫어했거든요. 그 값으로 맨날 엄청난 짐을 이고지고 다니게 되고(웃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김하나 : 그러면 옛날에, 시를 처음으로 쓰고 등단을 하고 그럴 즈음의 시인님의 모습은 어땠어요? 그렇게 듬성듬성 살 때는 보통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셨던 것 같으세요?
황인숙 : 제가 해질녘, 황혼녘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어떤 날은 그 무렵에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노을이 지다 못해 검붉어진 하늘 아래서 깨니 그런 시간이 되고 그러면 진짜 황폐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웃음), 이런 식으로 살았어요.
김하나 : 그러니까 24시간을 주무시고 다음 날...
황인숙 : 네.
김하나 : ‘잠을 자는 데는 나는 문제가 없다’라고 쓰신 것도 보았는데, 지금도 그러신가요? 잠은 잘 주무세요?
황인숙 : 그렇게 흡족하게 잘 시간이 없는 거죠.
김하나 : 시간을 맞춰서 고양이 밥을 주러, 예전에 듬성듬성 살았던 것을 메우기 위해서 촘촘하게 사셔야 되기 때문에.
황인숙 : 네. 제가 정해진 일, 의무, 이런 거랑은 담쌓고 산 인간인데 그런 게 생겼네요(웃음).
김하나 : 처음으로 시를 썼다거나 아니면 시에 관심이 생긴 건 언제쯤부터였어요?
황인숙 : 처음 시라고 쓴 건 고등학교 때인데, 그때는 시 같지도 않은 시였고, 시 같은 시를 쓴 건 한 스무 살 때 부터였죠.
김하나 : 그때는 어디 학교를 들어가시기 전이었고 그냥 끄적거리신 거였죠?
황인숙 : 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참 잘 썼어요. 예컨대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그런 게 그때 쓴 시였거든요.
김하나 : ‘시를 한 번 써봐야겠다’로 쓰기 시작하신 거였어요? 아니면 쓰다 보니까 시가 되어간 거였어요?
황인숙 : 시라고 쓴 것 같아요.
김하나 : 시를 한 번 써봐야겠다.
황인숙 : 네.
김하나 : 나중에 학교를 가서 다른 선생님들의 칭찬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점점 더 시인의 길로 가시게 된 걸까요?
황인숙 : 네.
김하나 : 그 전에 아무도 나에게 시를 써보라거나 이런 게 없었지만 혼자서 써봤던 여러 편의 시가 있었고...
황인숙 : 그걸 쓸 당시의 일고여덟 편은 계속 첫 번째 시집에 살아있는데, 그렇게 쓰고 저 혼자 흡족했는데. 쓰는 것도 일종의 성실함이 요구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때 그렇게 쓰고 맨날 책이나 읽고 놔뒀다가 학교에 들어가서 칭찬을 들으면서 더 사랑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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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