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수십 곳이 줄지어 성업하던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 가운데 '열애'(윤시내)와 함께 남아 있는 두 카페 중의 하나 '쏭아'를 찾았다. 송창식의 별칭인 쏭아(Ssonger) 타이틀대로 송창식이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곳이다. 그는 지금의 젊음은 가늠하기 힘든, 절대적이고 거한 존재감으로 베이비붐 세대에게 깊이 각인된 전설이다. 근래 듀엣이라는 말이 그렇듯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함께 무대를 서는데 이날은 송창식 혼자 노래했다.
그의 소리는 카페 공간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컸다. 본인은 '잘 안 된다'고 나중 말했지만 현장에서 듣기에는 환상적인 발성이자 우람한 소리덩치였다. 게다가 본인 취향이 아닌, 팬들이 좋아하고 신나하는 곡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한 게 더 놀라웠다. '관객들을 위한 배려'는 대중가수의 으뜸 덕목이다. 그는 신청곡도 받아 자신의 히트곡도 아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기도 했다.
2002년 인터뷰 때도 그랬지만 송창식과 자리할 경우 어김없이 인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에 잠시 피난한 것을 빼곤 성장기를 줄곧 인천에서 보낸 '원단 인천맨'이다. 지금도 인천에 남다를 애정을 간직해 자신의 모든 일이 '인천이랑 관련이 있는 일'이라며 “활동 자체에 여유가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한 번쯤', '왜 불러', '상아의 노래'를 부른 뒤 관객의 신청곡도 받으셨어요. '푸르른 날',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그리고 이후 '맨 처음 고백', '우리는', '가나다라', '고래 사냥' 등 불후의 명곡들을 줄줄이 불러주셨습니다. 혹시 신청곡을 받지 않았다면 대신 어떤 곡을 하셨을까요?
보통은 '피리 부는 사나이'와 '담배 가게 아가씨'를 많이 불러요. 사실 (공연 레퍼토리들이) 거의 비슷해요. 쏭아 라이브 클럽에서 똑같은 곡을 계속하면 관객들이 재미없으실 거예요. 그래서 신청곡도 받고 빠른 노래와 느린 노래 섞어가면서 하지요.
'상아의 노래'는 뜻밖이었어요. '송창식'하면 싱어송라이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 수두룩한 본인 곡을 놔두고 이 곡을 하실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물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요.
'상아의 노래'는 솔직히 잊고 있었던 노래에요. 제가 녹음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신청곡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노랜가 찾아보니 제 노래더라고요. 이후에 제가 제 음반을 다시 사서 이 노래를 배웠어요. (웃음)
'상아의 노래'는 김희갑 선생님 곡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신청을 많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좋은 곡이니까 그렇겠죠? (웃음)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상아의 노래'가 제가 제일 먼저 취입한 곡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이미자 씨가 먼저 발매한 곡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저에게 김희갑 씨가 부탁했어요. 그래서 취입을 했지요.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왜 울어'라는 곡도 함께 녹음했죠. 저는 잊고 있던 것을 많은 분들이 제 기억 속에서 소환해주신 거예요. 김희갑 씨가 굳이 제게 '상아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에는 제가 그 노래를 부르기 딱 좋은 목소리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딱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보시는지.
목(성대)을 수술한 이후에 지금은 사실 '상아의 노래'에 맞는 목소리가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이후로는 테크닉으로만 부르게 되었어요. 다이내믹 그러니까 강약으로만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요. 원곡과는 완전 딴판이죠. 근데 3년 전에 다시 목 수술을 다시 했는데 지금은 오리지널도 안 되고 그 전 버전도 아니에요. 수술 이후 아직도 컨트롤이 안 되어서 아쉽습니다. 발성 연습을 꾸준히 해서 다시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제는 노인네 목소리가 나오겠죠? (웃음)
'한 번쯤', '왜 불러', '상아의 노래'를 부른 뒤 관객의 신청곡도 받으셨어요. '푸르른 날',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그리고 이후 '맨 처음 고백', '우리는', '가나다라', '고래 사냥' 등 불후의 명곡들을 줄줄이 불러주셨습니다. 혹시 신청곡을 받지 않았다면 대신 어떤 곡을 하셨을까요?
보통은 '피리 부는 사나이'와 '담배 가게 아가씨'를 많이 불러요. 사실 (공연 레퍼토리들이) 거의 비슷해요. 쏭아 라이브 클럽에서 똑같은 곡을 계속하면 관객들이 재미없으실 거예요. 그래서 신청곡도 받고 빠른 노래와 느린 노래 섞어가면서 하지요.
'상아의 노래'는 뜻밖이었어요. '송창식'하면 싱어송라이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 수두룩한 본인 곡을 놔두고 이 곡을 하실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물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요.
'상아의 노래'는 솔직히 잊고 있었던 노래에요. 제가 녹음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신청곡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노랜가 찾아보니 제 노래더라고요. 이후에 제가 제 음반을 다시 사서 이 노래를 배웠어요. (웃음)
'상아의 노래'는 김희갑 선생님 곡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신청을 많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좋은 곡이니까 그렇겠죠? (웃음)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상아의 노래'가 제가 제일 먼저 취입한 곡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이미자 씨가 먼저 발매한 곡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저에게 김희갑 씨가 부탁했어요. 그래서 취입을 했지요.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왜 울어'라는 곡도 함께 녹음했죠. 저는 잊고 있던 것을 많은 분들이 제 기억 속에서 소환해주신 거예요. 김희갑 씨가 굳이 제게 '상아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에는 제가 그 노래를 부르기 딱 좋은 목소리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딱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보시는지.
목(성대)을 수술한 이후에 지금은 사실 '상아의 노래'에 맞는 목소리가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이후로는 테크닉으로만 부르게 되었어요. 다이내믹 그러니까 강약으로만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요. 원곡과는 완전 딴판이죠. 근데 3년 전에 다시 목 수술을 다시 했는데 지금은 오리지널도 안 되고 그 전 버전도 아니에요. 수술 이후 아직도 컨트롤이 안 되어서 아쉽습니다. 발성 연습을 꾸준히 해서 다시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제는 노인네 목소리가 나오겠죠? (웃음)
부평구문화재단에서 부평·인천 출신 음악가들에 대해서 부각하며 로컬리티를 살리는 프로젝트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2002년 저와의 첫 인터뷰에서도 인천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셨는데요. 인천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인천은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인천에서 태어나서 인천에서 쭉 자랐죠. '6.25 피난' 이후에 다시 돌아왔어요. 자라는 시기는 쭉 인천에서 지냈으니까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고생의 기억은 다 인천에 있어요. 쉽게 이야기해 저의 고향이에요.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이 아직 다 인천에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어릴 적부터 음악성이 뛰어나서 친구들이 '모차르트'라고 했다면서요.
초등학교 때부터 악보를 그릴 수가 있었어요. 귀로 듣고 악보를 그리는 능력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생각난 멜로디를 악보를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당시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죠. 일단 제 주변에는 없었어요. 그러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이 저더러 모차르트라고 했어요. 모차르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이 하도 그러니까 나도 내가 대단한 줄 알았다니까요. (웃음)
음악을 향한 결심이나 열정의 기반이 인천이었겠네요.
그럼요. 초등학교 때부터예요. 가장 중요한 계기는 6학년 때, 인천여상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있었는데 그곳에 구경을 간 거였어요. 엄청난 쇼크를 받았어요. 사실 음악보단 지휘자라는 게 쇼킹했어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꿈이 됐죠. 하지만 당시 제가 입학한 서울예고에는 지휘과가 없었고, 지휘를 하기 위해서는 피아노 작곡을 했었어야 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해서 성악과에 입학을 한 거예요. 하지만 아니었죠.
인천에서 경기도 콩쿠르를 학교 대표로 간 적이 있었어요. 1등 없는 2등이라는 것을 했어요. 1등이면 1등이지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었죠. (웃음) 제일 잘했는데 1등 될 실력이 안 되었나 보죠? (웃음) 그래도 나는 '노래는 제일 잘한다!'는 자부심은 있었어요.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로만 알고 성악과를 갔는데, 내 노래는 노래가 아니었던 거죠. (웃음) 그때 처음 알았죠. 음악이라는 것이 공부를 해야 하는 지성적 행위구나.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성악도 전문가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이에요. 그런 점들에 충격이 커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2002년 인터뷰에서 그때까지 도니체티 오페라 < 사랑의 묘약 >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 같은 클래식 말고는 아는 곡이 없고 대중가요에 대한 접점이 없었다고 하셨죠.
'쎄시봉' 가기 전까지도 대중가요를 몰랐어요. 서유석 씨를 고등학교 캠핑 때 처음 만났는데요. 기타 치면서 팝송을 부르는데 에디 아널드(Eddy Arnold)의 'I really don't want to know'라는 곡이었어요. 곡 중간에 '하우 매니(How many~)'가 반복이 돼요. 그래서 저희가 그 형(서유석)을 '하우매니형'이라고 불렀어요. (웃음) 그 한 곡을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부를 정도는 안 되었죠, 저는 이후에도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이라는 오페라 곡 위주로 불렀어요. 쎄시봉에서도 이 곡을 불렀으니까요. 대신 트윈폴리오가 팝송을 해야 해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맛을 내기 위해서 말이죠.
트윈폴리오 이후에도 솔로로 화려한 커리어를 개척했는데, 내 소리에 대해서 멋지다는 생각을 하셨는지요?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 매료가 된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좋은 소리라고는 생각은 안 했어요. 왜냐면 록 음악을 못 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내가 록을 하려다가 목을 상했어요. 70년대에 많이 상했죠. '왜 불러'는 록을 하기 직전에 불렀던 노래에요. 진짜 록을 하고 싶었는데,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목이 많이 상했어요. 그래도 제 목소리가 굉장하다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50년 이상 노래를 하셨는데 만약 인생의 분기점 셋을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처음에 쎄시봉에 가서 노래할 때 팝송을 했는데 조영남 씨 노래를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서울대 성악과 학생이 부르는데, 음악적인 가치가 대중음악에도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이왕 할 거라면 최고로 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결심이 결정적인 첫 분기점이죠.
트윈폴리오가 분기점이 아닌가요.
윤형주와의 트윈폴리오는 '연습' 기간이에요. 당시에는 내 목소리를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죠. 그런 면에서 트윈폴리오에 대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분기점은 군대 가서예요. 1973년도에 영장이 나왔어요. 안 가도 되는 거였는데. 유명 가수라고 해서 갔어야 했어요. 박정희 정부 시절엔 그랬어요. 안가면 매국노가 되는 시절이었죠. 군대에 가서 처음으로 그동안 했던 걸 돌아봤어요. 하루는 < AFKN 아마추어 블루스 콘테스트 >를 봤는데 아무리 봐도 나보다 다 잘하는 거예요. (웃음) 내 위치가 어디인가.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어요. 내가 20년 동안 음악을 했는데 미국 아마추어보다 못한다는 거였죠. 아주 창피하고 속상했어요.
음악적으로 무엇이 못하는 점이었나요?
모든 면에서 내가 못 한다고 느꼈어요. 한국에서 나는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후에는 또 < 전주 대사습놀이 >'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봤어요. 여학생들 둘이 나왔죠. 하나는 가야금, 하나는 노래를 했는데 그날도 저 친구들도 저보다 잘하는 거예요. (웃음) 모두가 나보다 잘한다는 생각에 무너졌어요. 밤새 울어서 눈이 부어서 다녔죠. 너무 분했죠. 내가 바보인가? 음악을 수십 년 했는데.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고 남의 것을 흉내만 냈으니까 잘할 리가 있겠느냐. 내 음악을 해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간 공부했던 이론과 실기를 다 버렸어요. 진짜 분기점이죠. 그때 시작한 것이 지금의 노래에요.
음악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셨겠네요.
이후 깔봤던 음악들을 재평가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보니 내가 그걸 못했기 때문이에요 (웃음) 그때부터 유행가를 알게 되었어요. 진짜 대중음악을요. 7개월간 군 생활을 하고, 나오자마자 하던 곡들은 다 버리고 '한 번쯤'같은 곡을 처음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더 많은 팬이 송창식의 음악에 빠졌죠.
그래도 이전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군대 이후의 활동을 싫어했어요. 충실하게 노래하는 것을 왜 버렸냐고 실망하던 팬들도 많았어요. 특히 여성 팬들이 많이 떠났죠.
세 번째 분기점은요?
다음은 '가나다라'에요. 1979, 1980년도였는데요. 그때 음악이라는 것이 이론적이든 실기로든 저 스스로 적립이 되었어요. 공부해왔던 음악 이론이 다 정리되었어요. 내 몸이 가지고 있는 '한국말에서 나오는 음악'을 처음으로 냈죠. 이 작법에 대해서 논문을 썼으면 아마 박사가 됐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음악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하면서 작전을 짰어요. 한 번에 이런 이론들을 다 넣으면 너무 획기적이라, 제가 정리한 창작법을 한 곡에 10%, 20%씩 적용했다고 할까요.
그 시작이 '토함산' 아니었나요?
사실 시작으로 따지면 '피리 부는 사나이'예요. 1974년도에요. 아주 조금씩 넣었죠. 실제로 제대로 해볼까 마음먹은 것은 '가나다라'였어요. 당시 많이들 놀랐죠.
1985년 크게 히트한 '담배 가게 아가씨', '참새의 하루'도 많이 놀랐는데..
그 곡들 경우는 '내가 할 음악은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에 집착해 있다가 '과거에 했던 음악도 내 것이다'라고 해서 모든 것이 합쳐진 것에요. 부정해왔던 음악도 내 것이라 생각하니까 좋았어요. 그 곡들은 제가 공부했던 것들 이론들 모든 것을 합치면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음악이 칼로 무 자르듯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한 번쯤', '가나다라'가 음악 인생에서 전기(轉機)가 된 곡인데 '피리 부는 사나이'도 중요한 곡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도 있죠. 실제로는 '뽕끼'가 많은 곡이에요. 트로트라는 것이 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까 늘 궁금했어요. 특히 음악적 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트로트를 쉽게 받아들이는 특유의 한국적 감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우리말이라는 건 복잡한 지성으로 표현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라는 감성을 말이라는 지성으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기본적인 리듬에 복잡한 감성을 표현할 수 있으니 트로트 감성이 잘 먹힌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송창식 트로트는 달랐어요.
달랐죠. 같은 뽕짝이라고 해도, 제가 예고에서 배운 것은 '음악이 잘게, 잘게 분석될 수 있다!'라는 것이에요. 감성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성도 충족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반쪽짜리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구사했던 트로트는 기본 리듬도 달랐어요. 당시에는 모두가 '뽕짝~ 뽕짝!'이었는데, 난 '뽕짝~ 뽕짝~ 뽕짜작! 뽕짝~'!!!
음악이 송창식에게 무엇인가요?
타고 다니는 것이에요. 인생이 한길이라고 생각하면 난 음악을 타고 가는 거죠. 이게 고장이 나면 안 되거든요.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음악 속에서 같이 있는 것이죠. 타고 가는 것에 목표 지점이 있으니까요. 목표를 가지고 가는 것이죠.
왜 송창식 음악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요.
배짱이 맞는 거죠. 체질이 같은 거니까요. 체질이 같지 않으면 절대로 히트가 안 돼요. 아무리 어렵고 좋게 만들어도 체질로 표현이 안 되면 히트하기 힘들어요. 초창기에 아름다웠던 목소리로 불렀던 것은 지성만 맞았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체질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석을 하고 그것을 완성해야지요. 스테이지에서 노래를 부르면 부르는 상황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작전 속에서 있어요. 부르는 동안에는 내가 아닌 존재로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내 노래가 절대 쉽지 않지만, 사람들이 쉽게 듣는 이유는 체질적으로 맞는 거예요.
고향 인천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요.
사실 인천이랑 다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인천'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시작이 되었잖아요. 평생을 했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으니까요. 나중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활동 자체에 여유가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어요. (거기로 갈) 여건이 사실 안 되었어요. 여러 가지로요. 경제적인 문제도 그렇고요.
싫어하는 말이 있으신가요.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비난 댓글 같은 것에도 관심 없고요. 비난 댓글 쓰는 사람은 비난 댓글이 취미 생활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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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경제신문 기자
음악웹진 이즘(www.izm.co.kr)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