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블란쳇이 이토록 얄미운 적이 있었나? 그 당당한 말투와 매혹적인 저음, 우아한 시선 처리에 홀린 듯 빠져드는 동시에 이렇게 분통 터진 적이 있던가? 왓챠의 <미세스 아메리카>를 보며 든 생각이다. 1970년대 미국 성평등 헌법수정안(ERA:Equal Rights Amendment) 비준을 둘러싼 10년간의 투쟁을 그린 이 작품에서 케이트 블란쳇은 미국 보수 진영의 ‘퍼스트레이디’라 불렸던 안티 페미니스트 활동가 필리스 슐래플리를 연기한다. 슐래플리는 ‘우리의 특권을 빼앗지 말라’(Stop Taking Our Privileges)를 의미하는 ‘STOP ERA’(훗날의 이글 포럼)라는 단체를 만든 인물인데, 여기서 ‘특권’이란 여성이 남편의 ‘보호’ 하에 가정에서 지낼 권리를 말한다.
“전 살면서 한 번도 차별받아 본 적 없어요.” 많이 듣던 대사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여성이기에 차별받고 아내이자 엄마의 자리로 제한되는 슐래플리의 삶을 보여준다. 30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의 저자임에도 독립된 경제력을 지니지 못한 여성이 정치 활동의 자금줄인 남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은, 그가 여섯 아이를 키우는 주부로서 바쁘게 살아가며 원치 않는 섹스를 노동하듯 수행하는 모습과도 연결되어 있다. 국방과 안보 분야 전문가이자 상당한 정치적 식견을 가진 슐래플리가 남자들 사이의 ‘홍일점’으로 성적 대상화되거나 당연한 듯 서기 취급을 당하는 순간의 위화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평등을 지향하는 대신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ERA 반대 전선에 투신하는 선택은 동의할 수 없음에도 이해할 수 있다는 면에서 복잡하다.
슐래플리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여성들이 있다. 당대의 페미니스트 아이콘이자 잡지 <미즈>의 공동창간인 글로리아 스타이넘(로즈 번), 60년대를 뒤흔든 페미니즘 고전 <여성의 신비>의 저자이면서 레즈비언 배제적 견해를 밝혔던 베티 프리단(트레이시 울먼), ‘싸움꾼’이라 불렸던 인권변호사 출신 하원의원 벨라 앱저그(마고 마틴데일),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경선 후보로 출마했던 셜리 치점(우조 압두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와 함께 미국시민자유연맹 산하에 여성권익증진단을 설립했던 변호사 브렌다 페이건(아리 그레이너), 슐래플리와 같은 공화당원이지만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질 럭겔스하우스(엘리자베스 뱅크스)까지 다양한 인물이 각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어 역사를 쌓아나간다.
이들은 ERA 비준을 위해 함께 뛰는 동지지만 연대야말로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아무도 안 좋아해. 하물며 진보주의자도.”라는 대사처럼, 소위 ‘진보 진영’ 내에서도 늘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는” 취급을 받아온 페미니스트들은 당연한 권리를 요구할 때나 아주 작은 진전을 이루려 할 때마다 안팎에서 머리가 터지도록 싸울 수밖에 없다. 흑인,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는 권력자들에겐 정치적 거래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스트 간의 차이와 갈등을 날카롭게 담아낸다. 우유부단하거나, 질투심이 강하거나, 독선적이기도 한 각자의 인간적 결점 또한 지우지 않는다.
뛰어난 선동가였던 슐래플리는 “ERA가 통과되면 여성도 징집될 것이며 양육수당은 폐지될 것”이라는 과대망상에 가까운 주장과 가짜 뉴스로 주부들의 공포심을 자극해 세를 불리며 끈질기게 페미니스트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미세스 아메리카>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구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여자들의 ‘정치’에 초점을 맞춘다.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슐래플리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여성운동의 의제에 훨씬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반페미니즘 저서인 『긍정적인 여성의 힘』에서조차 “페미니즘에서 영감을 얻은 평등권 법안에 사실상 공감을 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수전 팔루디는 이글 포럼의 주요 멤버였던 로즈메리 톰슨(멜라니 린스키)을 비롯한 뉴라이트 여성들의 활동에 대해 분석한다. “이런 여성들 중에는 이 경험이 정치 운동과의 신나는 첫 만남, 자신들의 공적인 목소리를 발견한 해방인 경우가 많았다.”
즉 “여성해방론자들은 전염병 보균자와 같다”고 주장했던 슐래플리를 가리켜 벨라 앱저그가 “미국에서 제일 해방된 여자 아니냐”라고 말한 것처럼, 이들은 해방의 열쇠가 가정에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가정을 벗어나 열렬히 ‘일’한 여성들이기도 했다. 모순과 역설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여성의 삶은 이처럼 더 복잡한 법이다. 그래서 ERA는 비준되었냐고? 직접 확인해보길 추천한다. 다만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과거의 의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투쟁과 연대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귀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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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