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그저 신의 꼭두각시일까
어쩌면 다들 조금씩은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원고를 읽으며 어릴 때 본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브래드 피트가 나온 영화 〈트로이〉가 떠올랐다.
글ㆍ사진 황지연(문학동네 편집자)
20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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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의 전쟁, 일리아스』 원고가 처음 주어진 날을 기억한다. 교정지 뭉치가 내게 다가오던 그때, 교정지에 묻어 있던 감정은 설렘이나 기쁨보다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몇 달 안 된 새내기 편집자였고(지금도 그러한데) 매 순간 나의 불안과 부족함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일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니 그 불안을 (나의 안인지 나의 밖인지 모를) 어딘가 한편에 놓아두고 첫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다.”(9쪽)

 

『신과 인간의 전쟁, 일리아스』 는 시인, 소설가, 전직 교수이자 자타공인 ‘전쟁 덕후’ 존 돌런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를 현대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써내려간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일리아스』 “모닥불 피워놓고 둘러앉아 밤새 늘어놓는 이야기”(9쪽)라고 칭하는데 그에 걸맞게 술술 읽힌다. ‘고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잠시 뒤로 물러나고 오로지 ‘이야기’로서 다가온다.

 

어쩌면 다들 조금씩은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원고를 읽으며 어릴 때 본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와 브래드 피트가 나온 영화 〈트로이〉가 떠올랐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올림포스 신들이 그리스파, 트로이파로 나뉘어 배치된 만화 속 그림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영화를 보면서는 저 많은 모래가 몸에 달라붙으면 얼마나 귀찮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게 띄엄띄엄 수집해오던 트로이전쟁의 단편들을 이 책을 편집하며 처음으로 짜맞추게 되었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채 다시 전쟁에 참여했음을 새삼 알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기보다는 이러한 조각들이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든다는 것에 수긍할 뿐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인간들은 그저 신들의 꼭두각시인 것만 같다. 애초에 트로이전쟁은 증오의 신의 계략과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의 질투에서 비롯되었으며, 신들이 어느 쪽에 힘을 실어주느냐에 따라 전투의 형세가 바뀌니 여기에서 인간들이 주체적인 존재이긴 한지 의심스럽다. 인간이 꼭 스스로의 힘으로 행위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수많은 인물들이 어떠한 의지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들여다보게 된다.

 

『신과 인간의 전쟁, 일리아스』 만의 묘미를 좀더 언급하자면, 전투 중간중간 능글맞고 익살스러운 농담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팟캐스트 〈라디오 전쟁 덕후Radio War Nerd〉를 운영할 만큼 보증된 저자의 입담인데, 기나긴 전쟁의 긴장을 덜어주어 피식 웃게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이 풀어내는 『일리아스』 속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사소한 감정들, 이를테면 욕망, 질투, 자존심에서 전쟁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이것이 이 책을 고전 중의 고전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또 이곳저곳에서 묘사되는 핏빛 전투 장면들에서는, 역으로 이 같은 삶의 비루함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하게 된다. 감추느라 부단히 애써왔던 삐죽빼죽한 욕망들이 날것으로 날뛰는 이야기에 뭔가를 들킨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한다.

 

계속 ‘처음’을 말하게 되는데, 이 책으로 나는 『일리아스』 를 시작부터 끝까지 처음 읽게 되었고, 처음으로 편집을 맡게 되었다(작업하며 계속 배웠으며, 주변 분들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만 처음이라 하여 어떤 감정을 불러내고 싶지는 않다. 감정은 간혹 수법 같아서 조그만 것을 크게 부풀리고 큰 것을 작게 어그러뜨리기도 한다. 어쨌든 이 글로 책 작업의 몇 지점을 끝맺는다.

 

옮긴이 정미현은 「옮긴이의 말」에서 “저자가 배달꾼을 자처했으니 나는 국내 배송기사쯤 되려나”(403쪽)라고 썼다. 그렇다면 나는 배송 포장지쯤 되려나. 모쪼록 독자들에게 별 탈 없이 가닿길 바란다.

 

 

 


 

 

신과 인간의 전쟁, 일리아스 존 돌런 저/정미현 역 | 문학동네
원전보다 더 원전의 속성에 가깝게 전투 장면을 보강하고, 이야기에 담긴 신과 인간의 감정들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도록 현대의 언어 감각에 맞춰 각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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