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탄생 250주년, 베토벤을 생각해보는 시간
“그런 건 없어. 성장할 뿐. 1악장이 2악장이 되는 거지. 각 악장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거야. 자넨 구조에 강박관념이 있어. 올바른 형식이란 것에 매여 있다고. 내면에 속삭이는 얘기를 들어야지. 나도 귀먹기 전에는 듣지 못했네. 자네더러 귀먹으란 얘긴 아니야.”
글ㆍ사진 김정희
20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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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를 낳고 출산 휴가 중이었을 때다. 첫째 아이는 유치원을 가고 둘째 아이는 젖을 배불리 먹고 자고 있었던 세상 조용한 평일 오전이었다. 마루에 앉아 리모콘을 들고 TV를 켰다. 여기 저기 채널을 돌려가는 중 영화의 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18세기 유럽, 여자들이 긴 치마를 입었던 시대인 거 같다. 모자를 쓰고 누군가의 집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젋은 여성과 계단 사이 복도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의 대화였다. 

 

“날씨가 좋죠? 새벽부터 하루 종일 나가 계시네. 칼렌버그 숲에서 산책하시나 봐요. 창문이 없어서 이렇게 나와있다우.”


“답답하시겠어요.”


“그래도 이 시간이 삶의 낙이라우.”


“이사를 가시죠.”


“이사? 난 베토벤의 바로 옆집에 살아.  누구보다도 먼저 작품들을 듣는 걸.  심지어 초연 전에 말야. 비엔나의 모두가 날 질투할 걸. 7번 교향곡 때부터 계속이라우. 새로운 작품이 곧 나오지?”


“네, 그래요.”


“잘 도와드려요.”


“그럴게요.” 

 

베토벤? 무슨 영화지? 프로그램 정보를 보니 <카핑 베토벤>이라는 영화였다.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들어 보고 있는데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이 초연되는 장면을 약 15분 정도 보여주었다. 베토벤의 <합창>을 듣는 영화 속의 관객들이 울고 있었는데, 나도 함께 울었던 거 같다. 클래식에 대해 1도 몰라도, 그냥 그 자체로 사람의 영혼을 건드리는 힘이 <합창>에게는 있다. <합창>을 연주하는 장면을 15분 가량 볼 수 있는 것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가 충분히 된다. 많이 알려진 영화는 아니어서, 잠깐 이 영화를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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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핑 베토벤>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2007년 개봉

 

 

"베토벤은 9번 교향곡 합창 초연을 앞두고 자기가 그린 악보를 깔끔하게 다시 그려줄 카피스트를 구하기 위해 음악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학생을 보내달라고 한다. 그런데 음악대학 수석 졸업생은 바로 여자. 작곡가가 되길 꿈꾸는 안나였다. 처음에 베토벤은 여자가 자기의 악보를 잘 그릴 능력이 있을지 의심하지만, 원래 단조여야 할 음표를 장조로 잘못 그린 것을 짚어내는 안나의 모습을 보며 전적으로 그녀를 신뢰하게 된다. 드디어, 합창 초연 날. 귀가 멀어 들리지 않던 베토벤은 자신이 지휘를 잘 할 수 없을 것 같아 대기실에서 절망에 빠져있다. 안나가 베토벤이 잘 보이는 곳에 서서 자신이 박자를 맞추어줄 테니 자신을 보고 지휘를 하라고 베토벤을 안심시킨다. 안나는 연주자들 사이에서 지휘를 하고(관객에겐 안나가 안보인다), 안나를 보고 지휘를 한 베토벤. <합창> 초연은 대성공을 거둔다. 베토벤은 안나에게 <합창>은 우리 둘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합창> 다음에 베토벤은 대푸가를 작곡하게 되고, 역시 이 작품의 악보 카피를 안나에게 부탁한다. 대푸가는 <합창>처럼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으며 성공했을까? <대푸가>는 어떤 작품일까?  궁금한 사람은 이 영화를 보세요."

 

연인도 아니고, 제자도 아니고 함께 작업을 하는 동료로서의 안나와의 관계를 통해 베토벤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 영화는 그리고 있는데, 또 다른 베토벤 영화인 <불멸의 연인>보다는 <카핑 베토벤>의 베토벤이 더 진짜 베토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장면. 베토벤의 조카 카를에 대해 이야기하며 안나가 베토벤에게 겁을 먹고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지 않으니까, 그런 안나에게 베토벤이 이렇게 말한다.


“훌쩍대고 사과하고 그런 거 못 참아. 사과하지 마. 맞서 싸워.”


당시 작곡가는 귀족의 후원을 받아 음악 작업을 했었다. 자신에게 돈을 주는 귀족은 자연스레 엄청난 갑이었을테지만, 베토벤은 귀족의 돈을 받아 만든 음악에 대한 공연 수입은 100%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얘기할 만큼 당당했다고 한다. 또 베토벤은 악보를 인쇄해서 팔아 저작권료 수입을 가진 최초의 작곡가였다. 자기가 챙겨야 할 것은 실속있게 챙기는 성정을 가진 베토벤이 다른 사람 눈치보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얘기를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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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과 안나가 처음 만나는 장면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장면은  이거다.  <합창>이 끝나고 베토벤은 다른 작품에 들어가는데 대푸가라는 작품이다.(대푸가는 당시에는 엄청난 악평을 받았지만, 이 작품은 현대음악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혁신적인 음악이라고 한다.) 베토벤은 다시 안나와 작업을 하게 되고, 안나에게 지금까지 작곡한 악보를 보여주며 의견을 묻는다. 바로 안나와 베토벤과의 대화다.


“악장이 어디서 끝나는 거죠?”


“끝나지 않아. 시작과 끝의 개념을 잊어버려. 다리 같은 게 아니야. 살아있는 유기체야. 마치 구름처럼, 떠오르는 조류처럼.”


“음악적 효과는요?”


“그런 건 없어. 성장할 뿐. 1악장이 2악장이 되는 거지. 각 악장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거야. 자넨 구조에 강박관념이 있어. 올바른 형식이란 것에 매여 있다고. 내면에 속삭이는 얘기를 들어야지. 나도 귀먹기 전에는 듣지 못했네. 자네더러 귀먹으란 얘긴 아니야.”


“내면의 침묵을 찾아 음악을 들으란 얘기죠?”


“그래, 침묵이 바로 열쇠야. 음과 음 사이의 침묵. 침묵이 자넬 감싸면 자넨 영혼은 노래를 할 수 있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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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베토벤의 대푸가 악보 카피를 하고 있을 때 

 

 

베토벤은 인간의 감정을 넘어서 자연 아니 우주 그 자체까지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베토벤이 표현하고 싶었던 자연은 인간이라는 프레임으로 규격화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혼존하여 있는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베토벤에게 1악장, 2악장 등과 같은 전통적인 음악 형식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을 거고 베토벤은 대담하게 해낸 것이다. 자연을 음악에 담고 표현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형식을 파괴했고 형식을 파괴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작곡가라니, 멋지게 않은가? <합창>도 그렇다. <합창>은 성악과 합창이 들어간 최초의 교향곡이라고 하는데, 사실 교향곡에 노래가 들어가면 안된다고 누가 정했는가? 베토벤이 음악으로 표현 내고 싶은 것을 자신의 마음에 들게끔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 지금까지의 형식을 뛰어 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유를 느꼈던 것 같다. 답답하지 않고 시원해서 좋았다. 


그 이후부터 나는 베토벤의 음악에 마음이 갔다. 그래서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을 예술의 전당 관객석에 앉아 듣기도 했었고(티켓값은 10만원이 넘었다), 베토벤에 대한 책이 나오면 족족 사들이기도 했었다.(베토벤에 대한 책은 은근히 많이 나온다.) 썩 괜찮은 사실은 베토벤은 호기심을 가지고 좋아하고 탐구할 만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고난을 극복하며 성장해간 인간으로서의 베토벤, 음악이라는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서의 베토벤, 작곡가로서의 베토벤, 이 모두의 베토벤. 올해가 마침 베토벤이 태어난 지 250주년이라고 하니, 베토벤 음악이나 영화를 보며 베토벤을 느껴보길 추천한다.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의 9번 교향곡 합창 장면

 


 

 

관련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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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생애』
 로맹 롤랑 저 | 문예출판사 | 2005년 11월

『장 크리스토프Jean Christophe』로 유명세를 얻고, 1915년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로맹 롤랑의 베토벤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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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 절망의 심연에서 불러낸 환희의 선율-클래식 클라우드017
 최은규 저 | arte(아르테) | 2020년 02월

바이올리니스트 겸 음악칼럼니스트 최은규의 베토벤 테마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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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임현정 저 | 페이스메이커 | 2020년 03월

 24세 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했다는 기록을 세운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베토벤 이야기. 자신의 음악만큼 솔직한 글쓰기로 가장 쉽고 가장 재미있는 베토벤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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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독서교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