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링』 과 『저스티스맨』 의 도선우 작가가 신작 장편소설 『모조 사회』 (전2권)로 돌아왔다. 두 전작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와 그 속에서 내면화되어가는 폭력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면, 이번에는 미래의 이야기다. 대재난 이후 300년, 지구상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단 두 개의 대지인 ‘복지 자본 공동체’와 ‘모조 사회’가 소설의 배경이다.
어느 날 도시 한복판이 느닷없는 대지진으로 모조리 붕괴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고등학교 수학 교사인 수는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신비한 공간에서 눈을 뜬다. 마치 차원 이동을 한 듯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 그것은 차원 이동도 평행우주도 아닌 그때까지 몰랐던 현실이었으며, 수의 진짜 삶에 관한 믿기지 않는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우리에게 도래할 미래를 내다보고 현재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모조 사회』 에 대한 궁금한 이야기를 저자에게 물었다.
『모조 사회』 는 작가님의 세 번째 소설이자 첫 SF 소설입니다. 앞서 『스파링』 과 『저스티스맨』 을 읽은 독자라면 장르와 스타일 변화에 또 한 번 놀랄 텐데, 어떤 계기로 이 작품을 쓰시게 됐나요?
말씀하신 『스파링』 에 태주와 아라가 등장합니다.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을 두고 막을 내리는데요, 사실 제 마음속에선 당연히 해피 엔딩이었죠. 그런데 독자분들의 생각은 약간 달랐던 것 같습니다. 열린 결말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론을 독자분들께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아라와 태주의 이야기를 다시 엮어가는 것은 좀 심심하니까, 이야기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행복은 그들의 자손으로 이어져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기왕 그들의 자손을 이야기하는 김에, 아예 4대나 5대쯤 지난 후손들의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계기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배경도 그렇게 미래로 잡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소설이 SF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제가 장르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고 또 그런 것에 얽매이는 타입도 아닌지라 미래면 SF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상하다 보니 ‘여긴 미래입니다’라고 설정만 던진다고 해서 독자분들이 ‘아하, 미래군’ 하시지는 않을 터이니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는 미래의 세계가 필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평소 생각하던 또 하나의 소재가 접목되었고요. 수평 세계와 수직 세계의 대립. 제가 바라는 세계와 지금의 현실이 도달하게 될 법한 세계의 대립이었죠.
『스파링』 에서는 구조를 이야기하고 『저스티스맨』 에서는 그 구조를 지탱하는 인간의 한 형태에 관해 다루었던 참이라 내심 그런 질문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말하는 너의 대안은 무엇이냐.” 그 답이 복지 자본 공동체라는 형태로 발현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답이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쓰고 나니 또 질문이 되어서 저도 약간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300년 후의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유니버스’를 창조하는 작업이고 여기에는 상당한 과학적 지식이 요구되기도 했을 것 같아요. 쓰시면서 특별히 어려웠던 점이나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어려웠던 점은 어려운 지식을 매우 어렵게 공부한 다음, 그것을 다시 매우 안 어렵게 풀어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제 인생에 복잡계라든가 양자 물리학 같은 걸 공부할 일이 있을 거라곤 짐작조차 해보지 않았던 터라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면서 작업을 했던 것 같고요. 학원가의 일타 강사라고 불리는 분들이나 할 수 있을 법한 작업을 소설가가 해야 했으므로 그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즐거웠던 부분은 그것으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개연성 있는 과학의 진보를 논하는 것은 무척이나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견해놓고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하게 되는 입장이란, 자못 흥미진진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미래 세계에 꽤 공을 들이다 보니 작업이 끝나갈 무렵에는 실제로 저 역시 제가 만든 세계에서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실 도피처럼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고 싶다는 욕망이 실제로 생겨서 “이 놀라운 자기애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요즘도 가끔 합니다.
『모조 사회』 의 ‘모조’는 그 사회의 총수 이름이지만 ‘가짜’라는 의미가 바로 연상됩니다. 소설의 본격적인 출발점인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가 진짜라고 믿느냐’는 물음과도 연결되는 듯하고요. ‘모조’라는 이름에 담고자 한 의미가 있으신지요?
모조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 단어로서의 MOJO로, 마력이란 뜻도 있고 매력이란 뜻도 있고 마약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모조 도시 하급 시민들이 대개 마약 중독자 같은 삶을 산다는 점에 있어 그러한 설정과 합이 맞았고, 다른 하나는 말씀하신 가짜의 의미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가 진짜라고 믿느냐는 질문은 사실 모듈에 국한된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진짜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맞는지를 묻는 쪽에 더 가까운데요. 여기서의 세계란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일 수도 있고 개인의 삶에 관한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 쪽에 초점을 맞추고 의미를 담았습니다. 너는 지금 진짜 너의 세계를 살고 있는가. 저 자신에게 늘 하던 질문이거든요. 제목은 그것의 역설적 표현입니다.
이번 소설은 묘사에 각별히 공을 들인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면 ‘복지 자본 공동체’의 마법 같은 기술이나 ‘모조 도시’의 독특한 건축 구조가 눈앞에 그려진다고 할까요. 낯선 세계를 독자에게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이런 점도 고민하셨나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가 우리에게 낯익은 공간이 아니라면 그것을 표현해야 하는 작가에겐 조금 부담스러운 작업이긴 합니다. 작가 혼자만 아는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져서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건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짝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가 겹쳐야 독자들이 상상하는 과정에서의 피로가 좀 덜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어쨌든 소설의 배경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보니 묘사에 각별한 노력이 들어간 건 사실입니다. 가급적 누가 보아도 각자의 상상이 무리 없이 펼쳐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흥미롭습니다. 은수, 류건, 정탄, 진, 춘춘 같은 익숙한 이름부터 랭, 솔리하, 자하비, 칼리사, 노박 같은 이국적인 이름까지 다양해요. 여기엔 어떤 함의가 있을까요?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사실 함의랄 것까지는 없지만 그런 부분에 약간, 독자들은 알기 어려운 작가만의 잔망스러운 장치 같은 것들이 들어 있거든요. 가령 모조 사회에 등장하는 모든 숫자는 다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든가 하는 설정이 거기에 해당할 텐데, 이름도 살짝 그런 면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3세계라는 분류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준이라고 하니 그 기준대로 표현하자면, 그 세계에 속한 국가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름을 일부러 찾아 정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이 소설은 어차피 제가 창조하는 세상이니까 현실 세계에서 주축으로 잘 다뤄지지 않는 이름을 내 소설에서는 주축으로 사용하겠다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아주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에요. 아무도 모르는 걸 혼자 조몰락거려놓고 스스로 흡족해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그걸 알아채면 “헐?” 그러면서 굉장히 신기해하고 그럽니다. 좀 이상하죠?
소설 속 ‘복지 자본 공동체’는 유토피아에 근접한 고도 문명사회인데 풍광은 고대 원시사회에 가깝습니다. 무엇이든 쓰임이 다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원리도 그렇고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반영된 것인지요?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이상 국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젠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요? 다만 너무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고속 열차 위에 우리 모두 이미 올라탄 상태라서 내릴 수 없을 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와서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뛰어내렸다간, 그대로 즉사하기 딱 알맞은 상황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번 생은 망한 게 맞는데, 우리가 망했다고 후손들까지 망하게 할 순 없으니까 뭔가 하긴 해야 할 텐데, 그것이 과학과 인문의 융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속 열차의 무한 질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저는 과학이라고 믿고 있는데요. 이 과학이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득이나 독이 될 수도 있으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인문학적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도로 진보한 과학과 심도 있는 인문학적 성찰이 뒷받침되어 세상이 만들어지면 아마도 이 소설 속의 복지 자본 공동체와 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게 저의 상상이고요.
결말이 파격적이면서 강한 여운을 남깁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혹시 후속작을 기대해도 될까요? 더불어 작가님의 이후 작품 계획이 궁금합니다.
소재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얼마간 지속되면 그 방향으로 약간 정형화되어 굳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가로서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제 경력을 돌이켜보면 아직은 좀 더 다양한 방향에서의 창작 활동이 훗날 저 자신을 위해 더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로선 또 다른 장르를 머릿속에 넣고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모조 사회의 뒷이야기는 언제든지 다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지 않은 분량으로 공들여 만든 세계관이다 보니 그 이후로 파생될 수 있는 스토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최근 들어서,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약간 천착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 생각을 다듬는 데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는 이야기의 자갈들을 이리저리 골라내어 어떤 것은 전두엽으로 다시 집어 던지고, 어떤 것은 뒤로 빼놓기도 하다 보면 또 하나의 무언가가 완성될 거라고 봅니다. 현재로선 그 무언가가 좋은 소설이 되기를 바랄 뿐이고요. 끝으로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 도선우
2016년 『스파링』으로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17년 『저스티스맨』으로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장편소설 『스파링』으로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작가 도선우는 ‘재야의 숨은 고수’로 인정받으며 성공적으로 문단에 안착했다. 8년 동안 매년 한 편씩 장편을 써서 공모전에 응모했지만 소설계에서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었다. 소설 작법을 배워본 적도 없고, 한 명의 문인 친구도 없었으며, 습작을 평가받아 본 경험도 전무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단작 『스파링』은 “견고한 문장력과 안정된 호흡을 바탕으로 시종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고 나가는” 작품이라는 비평을 이끌어냈고,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갖춘 신예의 등장을 예고했다.“나는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사람이었다”는 작가의 고백 속에는 사업가로서 경쟁과 성공을 지향했던 과거의 그가 있다. 서른일곱이 될 때까지 글을 쓴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소설을 읽을 시간이 있으면 시사주간지를 읽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다 우연히 『호밀밭의 파수꾼』과 만나 “세계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일 년 동안 200권의 소설을 읽었다. 읽기의 희열은 쓰기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오로지 문학작품 안에서 길을 찾으며 묵묵히 써 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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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 사회 1도선우 저 | 나무옆의자
바이러스로 인한 대재난, 양자 나노기술의 혁명적인 발전, 두뇌 업로딩 기술과 영생을 꿈꾸는 인간, 신경회로 컨트롤러와 초확장 현실, 오염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으로 이주하려는 테라포밍 계획 등 있음 직한 가상현실을 폭넓게 그린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