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생리 예정일 열흘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가슴 뭉침이나 설사, 허리 통증 같은 징후조차 없이 시간만 성실하게 흘렀다. 생리 주기가 정확한 편이라 흔치 않은 일이었다. ‘너무 피곤해도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서 날짜를 짚어본다. 100%인 피임법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콘돔의 피임 성공률은 82~98%이다(『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 , 건강과대안). 천식 약과 피로회복제 등 정기적으로 먹던 약을 일단 멈췄다. 임신 테스터기를 사러 약국 갈 시간조차 없다는 게 약간 짜증났다. 계절이 변하고 해가 길어졌지만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면 언제나 깜깜했다. “오늘 노을이 예쁘다”라는 짝꿍의 문자에 “아, 그렇군요…. 근데 노을이 뭐지?”라고 신경질적으로 답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날도 피곤에 절어 겨우 집에 도착했다. 가방을 푸는 동안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임신 테스트기가 눈에 들어왔다. 약국 가는 걸 자꾸 까먹는다고, 갈 시간도 없다며 지나가는 말로 툴툴대던 걸 그가 기억한 결과였다.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우리’의 문제라는 걸 확인하는 경험은 언제나 든든하고 유쾌하다. 그러니까 저이와 함께라면 임신ㆍ출산ㆍ육아가 아주 나쁜 일 만은 아닐 거라고 착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고, 실제 상황과 별개로 그 순간은 무척 소중해진다. 그래서였다. 간만에 깔깔대며 웃었다. 임신 테스터기를 사는 동안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정답을 말했다. “복잡한… 마음…?”
테스터기를 한두 번 사용해본 것도 아닌데 굳이 설명서를 다시 읽었다. 아침 첫 소변으로 테스트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는 내용을 곱씹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아침 부은 눈으로 화장실을 가서 바지를 내렸을 때, 늦게 도착한 피가 비쳤다. 생리가 이렇게 반갑고 기쁠 수 있다니. 호들갑을 떨며 짝꿍을 깨웠다.
그날 아침 테스터기에 두 줄이 떴다면 우리는 어떤 아침을 맞았을까. 그리고 어떤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4월 11일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그 모든 과정이 이전보다 덜 두려웠다. 아직은 불완전한 선택지 하나가 더 생겼을 뿐인데도.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위헌소송에서 헌법불합치를 결정하며 2020년 12월31일까지 국회에 개선 입법을 요구했고, 별도의 입법이 없을 경우 낙태죄는 2021년 1월1일자로 효력을 상실한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나는 ‘안전한’ 방법으로 의료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였다. 헌법재판관이 주문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임신 중지와 임신 유지 사이에는 ‘선택’과 ‘생명’이라는 단어가 다 대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고민과 결단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죄’로 다뤄온 문화에서 성장해온 사람에게 특히 그렇다. 임신 사실보다 유산 사실을 먼저 알았던 날이 떠올랐다. 의사는 전체 임신에서 자연 유산 비율이 20% 정도 된다며 나에게만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정작 내가 그 ‘행운’을 무척이나 안도했다는 걸 의사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 일을 겪으며 나는 예상치 못했던 죄책감에 시달렸다. 죄책감이라니 가당치 않아서, 오래 괴로웠다. 고작 ‘세포’를 보내고 눈치 없이 긴 애도를 건너는 동안 기존 사회의 통념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사람인지 실감했다. 자신의 입장을 프로라이프니, 프로초이스라고 확고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명은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강력한 프레임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얼마간의 망설임 앞에 반드시 서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각자가 구성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를 끌어안고 산다.
지난해 7월 서울에서 네덜란드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전문 상담을 거쳐 전 세계 여성에게 우편으로 유산 유도약을 보내주는 웹사이트 ‘위민온웹’을 만든 레베카 곰퍼츠를 만났다. 나는 ‘바보 같은 질문’임을 전제하고 그에게 물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당신은 왜 임신 중지 이슈에 인생을 걸었느냐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임신 중지 운동을 하는 사람은 절대 엄마일 리가 없다거나, 아이를 싫어한다거나 혹은 그렇게 보여야 한다거나 하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임신 중지’라는 단어 안에 포함된 수많은 함의를 경험했다. 여성이 임신할 수 있고, 엄마가 되기를 선택하면서도 임신 중지를 지지할 수 있고, 이 모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법적으로 인정받는 데 66년이 걸렸다. 내가 지난 몇 년 간 ‘낙태죄’ 이슈를 취재하며 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말은 『배틀 그라운드』 (후마니타스, 2018)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이유림 씨로부터 왔다. 낙태가 더 이상 ‘죄’가 아닌 세상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재생산권’을 논의해야 하는 시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재생산권을 유림 씨는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이 다음 인간을 이 세계에 데리고 오는 일이잖아요.” 나는 그 말을 받아 적다가 잠시 멈췄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 문장에 굵게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여러 차례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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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하지만 여성의 몸에서 끝나지 않는다. “재생산은 어느 사회에서든 단지 구성원을 수적으로 충원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으며,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 가치 등을 생산하는 과정이다.”(16쪽) 결국, 재생산권이야 말로 ‘낙태죄’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이다. 평등하게 성적 관계를 맺을 권리, 출산 여부를 결정할 권리,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할 권리 등을 포괄하고 있는 재생산권을 보장할 때만이 생명권 역시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낙태를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충돌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동안 국가가 통제해왔던 재생산권을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로 논쟁을 가져와야 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낙태가 ‘합법’이 되는 것과 임신 중단이 여성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는 것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투쟁이 필요하다.”( 『유럽 낙태 여행』 봄알람, 2018)(29쪽) 사회경제적 사유로도 임신 중지를 가능하게 한다거나, 주수를 제한하는 방법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여성을 처벌하고 차별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없애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새로 만들고, 기존의 법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236쪽)
오늘날 우리가 거머쥔 승리의 경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앞으로의 싸움은 고되겠지만 이 ‘출발선’을 여성들이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걸 지금은 마음껏 축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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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낙태 여행우유니게, 이두루, 이민경, 정혜윤 저 | 봄알람
천차만별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다섯 나라 활동가들의 투쟁 이야기와 낙태권에 대한 그들의 언어가, 지금 한국의 낙태죄 폐지 투쟁에 든든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장일호(시사IN 기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주 ‘이상한 수치심’을 느낀다.
책산책
2019.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