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방면에서 바라본 세미양 오름 남쪽 모습
오름은 제주에서 통용되는 순우리말이다. 전설에 따르면 거인 설문대할망이 제주도와 육지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치마 틈새로 흙덩이가 한 줌씩 떨어져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약 120만 년 전, 한반도 남쪽 바닷속에서 마그마가 분출하며 70만 년 전까지 지속적인 화산활동으로 제주섬이 생겨났다. 이후 화산이 다시 분출하며 약 10만 년 전에 한라산이 생겨났고 7만 5천 년에 걸쳐 한라산 주변에 기생 화산인 오름이 솟아났다. 멀리서 보면 다들 얼추 비슷해 보여도 가까이 다가가면 같은 오름이라도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또 다르다. 오름을 알면 제주섬이 더 친근해진다. 행정상으로 제주도에는 368개의 오름이 등록되었으며, 그 유명한 성산일출봉과 산굼부리도 오름에 속한다. 대중에 알려진 오름은 물론 이름마저 독특한 생소한 오름이 곳곳에 있다. 앞으로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거치며 제주의 오름을 <채널예스>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제주로 이주한지 3년이 되었다. 부모님에게는 "왠지 제주에 가면 결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라는 말도 안 되는 설득을 하고 옷가지만 챙겨서 제주로 내려왔다. 보름 넘게 정착할 집을 찾아 다녔다. 수십 채의 집을 둘러본 끝에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발견했다. 이사를 하고 집을 꾸미면서 매일 창밖으로 보이는 한라산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짙은 녹음이 산 전체를 감싸고 있지만, 계절이 세 번 지나 겨울이 오면 하얗게 탈바꿈한 모습을 상상해봤다. 제주 속에 히말라야 설산이 아닐까?
어느 순간부터 한라산 옆의 작은 산이 눈에 띄었다. 봉우리 부근에 나무가 없이 푹 들어간 형태라 볼 때마다 특이했다. 걸어서 도달할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저곳에 가야지, 생각만 일 년을 하다가 주말 늦은 오후 나 홀로 이곳에 갔다. 지도에 찍힌 이곳의 지명은 '산'이 아니라 세미양 '오름'이었다. 제주대학교에서 5.16도로를 타고 한라산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간다. 눈 짐작과 달리 걸어가기에는 다소 무리였다. 그래도 제주 전역의 368개 오름 중에서 세미양 오름은 제주 시내에서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 중 하나이다.
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제주 시내
오름 입구에 버스가 정차했다. 버스에서 내려 제주경찰교육센터 출입문을 옆에 끼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세미양 오름 울타리와 입구가 보인다. 입구에 들어서면 구수한 말똥 냄새가 코끝에 느껴진다. 의외로 드넓은 초원에 여러 마리의 말이 방목 중이다. 느닷없이 등장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말들의 시선을 피해 천천히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초반 숲길은 완만한 경사길이라 걷기 편하다. 울창한 소나무 숲에 들어서자 이방인을 맞이한 새들의 재잘거림이 정겹다. 길 좌우에는 수국 줄기가 아직 몸을 움츠리고 있다. 이들은 6월은 되어야 꽃이 피어날 테다. 편안했던 길은 조금씩 경사가 가팔라지더니 발걸음도 자연스레 느려진다. 온몸에 땀이 날 무렵 작은 삼나무 숲이 등장했다. 조금 전 소나무 숲과는 판이하다. 갑자기 흑백 화면으로 변한 이 공간이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배병우 작가의 사진집에서 익히 본 나무들이 떠오른다.
조금 더 오르니 오름 정상(삼의봉)에 도달했다. 입구에서 정상까지 15분도 채 안 걸린다. 정상 주변에는 나무가 많지만 빽빽하지는 않아 사방이 탁 트인 기분이 든다. 한쪽에는 그늘 밑에 편히 쉴 수 있도록 정자가 있다. 한쪽으로는 움푹 들어간 산정분화구가 보이고 그 너머로 숲이 완만하게 이어지는데 그 끝은 한라산 북벽이다. 분화구 안에는 빽빽한 억새에 둘러싸인 묘들이 여러 개다. 한라산 방면으로 용암 유출 흔적의 작은 골짜기가 있지만, 이 위치에서는 그 모습을 가늠하기 힘들다. 여기서 50미터 정도 더 걸어가면 나무가 없어서 북쪽 방면으로는 제주 시내와 그 너머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맑은 날이면 추자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해 질 무렵이라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서둘러 길을 걷는다. 세미양 오름은 분화구를 중심으로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볼 수 있다. 경사가 크지 않은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작은 샘이 나온다. 그 안에는 알에서 깬 무수히 많은 도롱뇽 새끼들이 나무에서 간간히 떨어지는 하얀 꽃잎을 먹고 있다. 이곳에서 좌측 오르막길로 들어서면 5분만 걸어도 다시 삼의악으로 간다. 밑으로 계속 내려가면 고사리평원과 참나무숲길, 수국오솔길, 삼나무숲길, 밤나무숲길, 진지동굴이 차례로 등장한다. 하지만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소나무 사이를 걸을 수 있다
나는 오르막을 선택했다. 천천히 5분 정도 걸었더니 아까 마주했던 정상의 정자가 다시 나타난다. 그새 분화구를 한 바퀴를 돌았다. 어느새 서쪽으로 붉은 석양이 물들고 있다. 제주 하늘과 바다, 도시, 그리고 한라산과 내가 지금 있는 세미양 오름을 따스하게 비춰준다. 이 오름에서 사람을 마주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야생 꿩과 노루가 더 친근하다.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던 세 마리의 노루가 나의 존재를 뒤늦게 깨닫고 한참을 나와 눈맞춤을 하다가 키 높은 억새 사이를 껑충껑충 뛰며 수풀로 사라졌다. 혹시 노루가 짖는 소리를 들어봤는가? "왕왕!" 개가 짖는 소리와 정말 똑같다. 세미양 오름에서 만난 노루도 그렇게 짖으며 사라졌다. 믿기 힘들면 유튜브에서 검색해보시길.
정상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나 보다. 어둠이 금세 찾아왔다. 헤드랜턴을 챙기지 않은 게 실수였다. 스마트폰 조명으로 지나온 숲길을 비추기엔 어림도 없다. 캄캄해서 계단의 깊이가 가늠이 안 된다. 사방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기분이다. 간만에 식은 땀마저 흐른다. 예로부터 세미양 오름은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묘가 많다. 잠들어 있던 조상님들이 '이보게, 뭘 그리 서두르나? 좀 쉬었다 가게.'라고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만 같다. 짙은 어둠 속을 뛰다시피 해서 5분여 만에 가까스로 내려왔다.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참 다른 스릴 넘치는 오름 트레킹이었다.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 홍은택 옮김
3천360킬로미터에 이르는 험난한 산길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롯이 두 발로 걸어야 하는 미국 동부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장거리 종주 등반의 원조로 불린다. 빌 브라이슨. 전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경험을 해본 그였지만, 흑곰과 늑대의 습격의 대비는 물론 20kg에 육박하는 무거운 짐 자체가 그에게는 고난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저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며 특유의 유머와 섬세한 관찰, 아름다운 묘사로 마침내 <나를 부르는 숲>을 써냈다.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이 책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나 역시 책을 읽는 내내 기존에 걸었던 네팔 히말라야와 캐나다 로키산맥 외에도 미국 애팔래치아의 일부라도 걸어보고 싶어졌다. 언젠가는 그와 함께 제주 오름을 걷고 싶다.
한라산 북녘 자락의 해발 400m 지대에 정좌하여 제주시가를 굽어보고 있는 듯한 오름이다. 한자음을 빌어 삼의양악(三義讓岳)오름, 삼의악(三義岳)오름, 삼의양오름, 사미악오름, 사모악오름, 세미오름, 새미오름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며 지도마다도 다르다. 정상 삼의봉 표고 574.3m, 비고 139m, 둘레 2,473m, 총면적 41만 2000㎡ 규모의 기생 화산으로 정상에 원형 분화구가 있다. 예로부터 오름 정상부에서 샘이 솟아 나와 '새미오름'이라 부른다. 아무리 가물어도 샘이 마르지 않아서 방목 중인 말과 소들의 식수로 사용되었다. 큰 오름은 아니지만 해송과 자귀나무, 곰취, 산수국이 군락을 이뤄 자생한다.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면 정상과 둘레길을 돌 수 있다. 겨울철에 정상에 오르면 겨우 내내 쌓인 눈으로 하얗게 변한 한라산이 더욱 절경으로 다가오지만 산책로가 다소 가파르기 때문에 아이젠 착용은 필수이다.
◇ 접근성 ★★★
◇ 난이도 ★★
◇ 정상 전망 ★★★
지도 앱이나 내비게이션에서 '삼의악오름'이나 '세미양오름' 또는 '제주경찰교육센터'를 검색해서 찾아오면 된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 주차 자리는 언제나 넉넉하다. 시내버스(212, 222)를 타고 '종합사격장 정류장'에서 하차해도 된다. 화장실과 매점이 없으니 간단한 먹거리를 챙기자. 봄철에는 고사리를 캐러 오는 지역 주민들도 많다.
◇ 주소 : 제주시 아라일동 산 24-2
바람 카페
산기슭에 자리 잡은 조용한 카페이다. 크고 작은 고양이들이 카페 안과 밖의 테이블과 의자, 또는 그 밑에서 조용히 잠을 자거나 손님들과 어울린다. 핫초코와 드립 커피의 맛이 일품이다. 책장에는 주인의 취향이 가미된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가득하다. 주변에는 한라산신제를 올리는 산천단이 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노목으로 알려진 총 8그루의 곰솔(천연기념물 160호)이 있는데 무더운 여름날에 산책하기 좋다.
◇ 주소 : 제주시 516로 3041-15
◇ 전화 : 070-7799-1103
◇ 시간 : 12:00~21:00 / 월요일 휴무
별빛누리공원
제주의 밤하늘은 공해가 없지만 의외로 흐린 날이 많아서 별 관측이 용이하지는 않다. 그럴 때는 제주 시내에서 멀지 않은 별빛누리공원이 대안이다. 4D 입체 상영관과 15m 돔스크린이 장관인 천체투영실에서 들어서면 어느 순간 우주 속으로 빠져든다. 구름이 없는 맑은 저녁에는 600mm 카세그레인식 반사망원경으로 천체를 직접 관측할 수 있다.
◇ 주소 : 제주시 선돌목동길 60
◇ 전화 : 064-728-8900
◇ 시간 : 14:00~22:00 (10~3월) / 15:00~23:00 (4~9월) / 월요일 휴무
◇ 입장료 : 성인 5,000원 / 청소년, 군인 : 3,500원 / 어린이 : 2,000원
마방목지
천연기념물 347호로 지정된 제주 혈통 조랑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이 가까이서 보인다. 매우 온순해서 담 너머로 풀을 주면 뜯어 먹는다. 드넓은 평야 뒤로는 한라산 백록담이 우뚝 솟아 있어 절경이다. 고도가 높은 관계로 5월에서 10월 사이에만 말을 방목한다. 겨울철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여 많은 제주도민이 눈썰매를 타러 모여드는 명소이다.
◇ 주소 : 제주시 516로 2480
◇ 전화 : 064-710-2298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다소 가파르다
오름의 대부분 길은 완만하게 펼쳐진다
삼의악 오름에서 만난 노루
서로 다른 색의 벚꽃
오름 정상부에서 샘이 나온다고 해서 세미양 오름이라 부른다
샘 안에는 도롱뇽 새끼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살고 있다
최경진
4년차 제주 이주민이다. 산과 오름을 좋아하여 거의 매일 제주 곳곳을 누빈다. 오름은 100여회 이상, 한라산은 70여회, 네팔 히말라야는 10여회 트레킹을 했다. 스마트폰으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고 있으며(www.nepaljeju.com), 함덕 부근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