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담배와 스타크래프트. 또래 남자들이 20대 초반에 일제히 시작한 것들이다. 나는 그 둘을 여태껏 전혀 하지 않았다.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30대가 되자 몇 가지 권유가 덧붙었다. 등산이나 캠핑, 사회인 야구나 스크린 골프 같은 것들. 이 역시 나는 죄다 거절했다. 술 한 잔 하자는 것도 대부분 사양. 20대 초중반엔 음주를 즐겼으나 지금은 1년에 열흘도 마시지 않는다. 꽤 많은 남성들에게 나는 조금 별종처럼 인식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럼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요?”
“아이 키우다 보면 좀 쉬고 싶지 않나요?”
운이 좋게도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 주변에 특별히 없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하룻밤만 자면 대부분 씻겨 나가는 정도다. 내겐 불면의 밤 같은 것도 없어서 이 방면으로는 크게 걱정을 해 본 바 없다. 하지만 쉬고 싶은 거라면 다르다. 늘 쉬고 싶다. 쉬고 싶은 마음이 크고 많다. 술 마시고 어울려 노는 것 말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
항상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시간까지도 계획을 빼곡하게 세워둔다. 이 시간이 아니면 책을 읽거나 무언갈 쓸 시간이 없어서 그렇다. 퇴근 후와 주말에는 한 사람은 아이와 놀고 한 사람은 집안일을 한다. 같이 나들이도 하고. 주말에 아내와 번갈아 가며 개인 시간을 가지지만, 안정적으로 확보되는 것도 아니고 온전한 휴식으로 보기도 어렵다. ‘부모’로서가 아닌 각자의 삶에 물을 주기 위한 시간이라 충만한 기운을 얻지만 에너지는 소모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으로서의 휴식은 아니다.
자유의 최고봉은 무엇을 할 자유가 아니라 '함'으로부터 물러설 수 있는 자유다. 이 쉼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만들 수 있다.
- 엄기호, 『단속사회』 중에서 (18쪽)
나는 스포츠(시청)만은 다른 남자들처럼 매우 좋아한다. 해야 할 일을 잠시 잊고 선수들의 플레이에만 오롯이 집중할 때 나는 회복된다 느낀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은 후엔 월드컵이나 올림픽, 아시안게임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한 번도 시청한 적이 없다. 날이면 날마다 하는 프로야구 경기도 못 봤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거나 회의실에 먼저 도착해 상대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엔 늘 스포츠 기사를 본다. 내가 온라인으로 트래픽을 가장 많이 일으키는 곳이 아마 ‘네이버 스포츠’일 것이다. 퀄리티 높은 기사는 틈새시간을 서너 번 모아야 하나를 완독할 정도지만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는 기사 몇 줄씩 쪼개어 읽는 게 너무 좋다. (특히 김형준의 인사이드MLB와 이창섭의 MLB스코프. 애정합니다.)
일상을 바쁘게 유지하는 것도 내가 결정한 것이니 누구에게 불평할 일은 아니다. 덕분에 쉬는 것과는 또 다른 행복을 느낀다. 아이와의 추억을 쌓고 매년 조금씩 성장한다는 실감을 얻는다. 하지만 내가 대단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점심시간이나 출퇴근 시간, 가끔의 주말을 끌어 모아 쓸 뿐인데도, 쉴 시간이 하나도 없는 건 좀 억울한 일이다. 사람의 적정수면이 3시간이면 좀 쉴 수 있을텐데. 다행히도 부모님들의 도움으로 이따금 아내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게 숨구멍이 되어 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작은 숨구멍이 있으니, 바로 운전하는 시간이다.
나는 서른 둘이 막 되던 겨울에 면허를 땄다.(이것도 20대의 문을 열면서 따는 또래들과는 달랐다.) 차를 사서 운전할 생각은 없었고, 여행지에서 렌트는 할 수 있어야겠단 생각이었다. 면허시험이 간소화 된 시절이라 큰 어려움 없이 땄는데 이후엔 정작 운전을 못했다. 연습해 볼 차가 없었다. 대중교통으로는 가기 어려운 여행지에 가려고 면허를 땄건만 아내와 나는 여전히 걸어야 했다. 그래도 우리는 걷는 걸 좋아해서, 한 시간 걷고 조금 쉬고 또 한 시간 걷는 식으로 다녔다. 내게 면허가 있다는 것을 한 몇 년 잊고 지냈다.
아이가 생기면서는 다시 운전을 생각해야 했다. 동두천으로, 포천으로, 철원으로 친구의 차를 끌고 연습했다. 도와줬다고 생색내지도 미숙한 운전에 낄낄대지도 않는 녀석이라 고마웠다. 약간의 자신감이 붙을 즈음 새 차 마냥 깔끔한 중고차를 살 수 있었다. 중고지만 아이를 태우기에 거슬릴 만한 부분이 없어서 선택이 쉬웠다. 차를 살 때는 친구 넷이나 함께 가서 이곳 저곳 체크해주었다. 한 쪽 라이트가 나간 걸 발견하고 교체한 후 인수했다.
연습은 했다지만 운전은 미숙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내와 드라이브도 하고, 쇼핑도 하고, 베이비페어도 가고, 춘천으로 바람도 쐬러 다녔다. 별 탈은 없었지만 능숙하진 않다는 걸 내가 알았다.
아이를 낳고 퇴원하는 날은 비가 왔다. 바람도 많이 불었다. 5월이라지만 쌀쌀한 날이었다. 미리 대여해 둔 카시트에 아이를 눕히고 시동을 걸었다. 아이가 타고 있다 생각하니 둘만 탈 때와 달리 긴장이 되었다. 담요에 폭 싸고 꼭 끌어안았지만 갓 태어난 아이에겐 너무 춥지 않을까 싶어서 조급해졌다. 조리원은 직선 거리론 멀지 않았지만, 차로는 조금 돌아가야 했다. 병원을 나와 좌회전 한 후 쭉 가다 유턴. 유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병원에선 신생아실에 있고, 우리는 이따금만 볼 수 있던 터라, 우는 걸 처음 봤다. 처음 겪는 아이의 울음에 당황해서 더 조급해졌다.
바뀌지 않는 신호가 야속하고 천천히 달리는 앞차와 시야를 가리는 비가 원망스러웠다. 조리원 주차장은 왜 하필 좁은 골목을 지나 있는지, 이 골목엔 왜 늘 차가 가득 늘어서 있는지, 주차장엔 왜 빈자리가 없는지. 미숙한 나는 그 좁은 길을 지나갈 자신이 없어서 큰 길가에 임시로 세워야 했다. 조리원 방을 배정 받고 아이를 신생아실로 옮기자마자 다시 내려가 주차할 곳을 찾았다. 비로소 좀 긴장이 풀렸는데, 내 몰골을 보니 비와 땀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룸미러엔 혼이 나간 얼굴이 비쳤다.
결국 어느 날, 조리원의 좁은 주차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다 문짝을 긁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자 운전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운전 해야 할 상황은 많았다. 예방접종이 잦으니 병원엘 가야 했고, 50일이나 100일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도 가야 했다. 죄다 주차면수가 적고, 진입공간이 협소하고, 이중주차가 만연했다. 긴장, 긴장. 차를 대놓고도 다시 빼주러 나갈 일이 신경 쓰였다. 미리 주차공간을 검색하고 너무 빽빽한 곳이면 버스로 갈 수 있는 다른 곳을 슬쩍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마음이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붐비는 주차장에 들어설 때마다 내가 자리를 제대로 찾을 수 없을까 봐 마음이 불안했다. 통로에 임시로 세워야 하는 상황에는 괴로웠고, 실제로 내 차는 중립 기어에서는 차 열쇠를 뺄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하지도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요금이 비싼 주차장에 가면 빨리 차를 빼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내 자리가 없을 것 같은 곳에는 갈 수가 없었다. 그 상황이 내가 어디 있어야 할지 모른다는 내 삶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 박현주, <채널예스> ‘초보운전자의 독서법’ 중에서 (‘주차에 대하여’ 편)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운전이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미숙한 시간을 통과하자 오히려 운전은 ‘작은 숨구멍’을 내주었다. 두려웠던 공간에서 포근함을 느끼고 있다..
내가 사는 주택은 입주 세대의 보유차량보다 주차면수가 적다. 늦게 가면 주차할 자리가 없고, 차를 대더라도 차를 빼주는 데 신경 써야 한다. 나는 이런 데 쓰는 에너지가 아까워 근처 처가의 주차장에 댄다. 차로 가든 걸어서 가든 집에서 10분 거리다. 집 앞에 도착해 먼저 아내와 아이를 내려주고 짐을 옮긴 다음 차를 끌고 주차장으로 간다. 아이가 웃고 보채던 차에 고요가 내려 앉으면 나는 음악을 플레이 한다. 대개는 가을방학의 노래다.
주행은 느리게 느리게 한다. 그래도 노래 두 곡 정도면 도착. 하지만 이 잠깐의 시간이 내게 근사한 만족감을 준다. 내가 원하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휴식이 바로 여기 있다. 주차한 후 이대로 노래 몇 곡 더 듣고 몸을 일으키고 싶지만 오래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이러는 동안에도 아내는 짐을 정리하고 아이를 상대하고 있다. 내가 운전하는 동안엔 아내 혼자 뒷좌석에서 아이 수발을 들 수 밖에 없으니 아내는 줄곧 피곤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게 차는 ‘육아면제구역’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나는 10분을 쉰 게 아니라 그 이상 쉰 것일 것이다. 그러니 노래 두 곡만 듣고도 휴식이 되었을 거다.
이미 면제를 누려 놓고, 그걸 더 연장하려 꼼수를 부릴 순 없는 노릇이다. 아니 육아는 생활이고 삶이다. 삶을 면제하거나 면제받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은 일. 운전할 날은 아직 많으니 내가 쉴 날도 아직 많다. 얼른 몸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바람직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시동을 끈다.
그리고 노래 한 곡 더 듣고 일어난 날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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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엄기호 저 | 창비
우리 모두가 자신이 속한 가족, 직장 내에서 소통이 쉽지 않음을 호소하면서도 그 불통의 당사자와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취향의 공동체’ ‘힐링’을 통해서만 이를 해소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
찻잎미경
2019.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