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no Park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씨는 지난해 가장 바쁜 연주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재작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이후 전 세계를 무대로 100회 가까운 공연을 했으니, 비행시간 등을 고려하면 1년 내 연주만 한 셈입니다. 올해 국내에서는 5월과 6월 리사이틀에 이어 12월에는 덴마크 로열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독일 베를린에서 생활하며 연주 여행을 다니는 만큼 우리나라에도 공연이 있을 때만 방문하는데요. 며칠 전 운 좋게도 서울의 도심 카페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공연 일정을 소화하느라 매우 촉박하게 진행된 인터뷰이긴 했지만, 2019년을 여는 선우예권 씨를 만날 수 있어 덩달아 새로운 기운이 솟는 자리였는데요. 함께 만나보시죠.
ⓒRalph Lauer The Cliburn
공연 리허설을 앞두고 있어 인터뷰 시간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인사 후 바로 질문과 답변이 오가야 하는 상황. 문득 연주자 역시 기자만큼 새로운 장소와 환경, 사람을 접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내려놓을 부분은 내려놔야 하죠. 특히 처음 가는 공연장, 처음 맞이하는 피아노는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음향이 아쉬울 때도 있지만, 지나치게 예민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쉽지 않은 일이긴 하죠. 피아노는 제 악기를 가지고 다닐 수도 없고. 하지만 공연장에 오시는 분들은 그 상황에서 감상하시는 거니까 최대한 제가 원하는 연주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요. 모든 상황에서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런 감정에 충실하고, 또 그 감정을 음악에 적용하려고 하고요.”
그러고 보면 연주자라는 직업은 연주 실력도 중요하지만, 적응력과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지속하기 힘들겠네요.
“맞아요. 요즘은 부득이한 경우 오늘 한국에서 연주하고, 시차가 있으니까 바로 비행기 타고 내일 미국에서 연주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또 그렇게 살다보면 익숙해지는 면도 있고, 그런 상황을 어느 정도는 즐기는 것 같아요(웃음). 사실 연주자는 좀 과장되게 말하면 그러지 않을 경우 죽어 있는 느낌이 들 수도 있거든요. 저도 힘든 면이 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즐기고 있어요.”
그렇다면 선우예권 씨의 실제 성격은 어떨까요?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적응력도 있겠지만 예술가로서 타고난 예민함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선우예권 씨를 얘기할 때 ‘콩쿠르 최다 수상’이라는 수식어가 붙잖아요. ‘생계를 위한 거였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 국제대회만큼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방법도 없죠.
“두 가지 이유 모두 크다고 생각해요. 많이 알려지기도 하고, 적든 많든 부상을 보지 않고 나가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의 경우 상금이 목적이었을 때는 그만큼 절실했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스스로에게는 아쉬운 연주가 많았을 거예요. 지금 돌이켜보면 연주 스타일에서 급급한 면도 보이고. 그런데 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목적이 달랐고, 연주 자체에 대한 갈망과 갈증으로 기회를 찾았던 거라 연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던 무대예요. 그래서인지 그때 나온 앨범도 어느 정도 만족스럽고, 전체적으로 감사한 대회였죠.”
ⓒJino Park
덕분에 지난해 많은 무대에 설 수 있었는데요. 작년에 많은 초대를 받았다면 올해는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연주, 만들고 싶은 무대를 생각할 것 같습니다.
“네, 아무래도 콩쿠르 우승 직후에는 공연 프로그램이 콩쿠르 때 연주했던 곡들 위주예요. 그때 연주를 라이브로 전해드리는 성격이 강하니까요. 이후 슈베르트, 브람스 등도 연주했는데, 올해는 제가 하고 싶은 곡들로 좀 더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준비했어요. 한국에서는 5월과 6월에 리사이틀 투어가 있는데, 올해가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이기도 해서 클라라 슈만과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의 곡들로, 제가 아꼈던 곡들로 구성해서 좀 더 특별한 것 같아요. 슈만은 제가 많이 좋아하면서도 연주하기를 꺼려한 면이 있어요. 그런데 요새 더 애착이 가서. 제 연주로 들려드릴 기회가 많지 않았던 만큼 어떻게 보면 도전일 수도 있고요.”
협연도 있고 독주도 있는데, 각각 어려운 점도 있고 재밌는 점도 있겠죠?
“우선 협연은 같이 하는 작업이라서 지휘자와의 교류, 오케스트라와의 합이 중요하죠. 그래서 힘든 면도 있지만, 정말 음악을 공유하면서 연주한다는 느낌이 들 때는 마법 같은 효과들이 나타나요. 반면 독주의 경우 특히 피아노는 솔로로 하니까 외로울 수도 있지만 좀 더 자유로움이 있죠. 시간이나 공연장 음향에 따라 제가 변화를 줄 수도 있어서 재밌는 것 같아요.”
선우예권 씨를 비롯해 한국의 젊은 스타 연주자들이 많잖아요. 전 세계에서 수많은 무대가 마련되는 것 자체가 그 방증이겠지만, 무대에서도 객석의 남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나요(웃음)?
“관심을 보여주시는 건 느껴지죠. 해외에서도 한국 연주자들이 많은 관심을 받고, 일단 관객들이 집중할수록 따뜻한 기운이 있거든요. 한국 공연장은 좀 더 열성적으로 반응해 주시니까 해외 연주자들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감사하죠. 그런 게 없으면 저희도 할 수 없는 직업이니까요. 그런데 연주가 감성을 공유하는 일이지만, 지나치게 신경 쓰다 보면 오히려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고 겉돌기 쉬운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은 악보에 적힌 진실되고 세밀한 노테이션, 작곡가가 당시 느꼈을 감정을 최대한 정직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Ralph Lauer The Cliburn
사회생활을 무척 일찍 시작한 거잖아요. 외모는 앳돼서 대학생 같고, 이제 대학원 졸업한 친구들도 많을 나이인데 말이죠. 음악 외적으로는 또래의 모습과 비슷한가요?
“그냥 친구들 만나면 밥 먹고 얘기하고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혼자 나가서 산 게 15살 때쯤이라 혼자 있는 게 좀 더 익숙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중요한 건 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2주 정도 시간이 비면 그때 뭘 해야 할지 잘 모른다고 할까요. 저는 음악 외에는 흥미나 취미가 없어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바쁜 걸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다 독일로 옮기셨잖아요. 어떤가요?
“독일에서 생활한 지 2년이 넘었는데, 미국에서 11년 정도 있었으니까 언어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미국이 생활하기에는 편리하죠. 그런데 독일은 처음 느낌부터 편안했어요. 많이 우울하다고들 하는데, 그것에서 오히려 위로를 얻는다고 할까요. 겨울이면 3~4시부터 어둡고 푸르스름해지는데, 그래서 우울하다고 하는데, 저는 되게 예쁘다고 좋아하거든요(웃음). 재충전이 되고 안식처 같은 느낌이에요. 클래식 음악적으로도 전통이 있고 유서 깊은 곳이니까 거기서 오는 느낌도 다르고요.”
이제 본격적으로 2019년의 연주 여행을 시작하셨으니, 끝으로 다짐과 바람을 들어볼까요?
“올해는 좀 더 다양한 곡을 연주할 것 같아요. 협주곡도 10곡 정도로 많은 편이고, 리사이틀 프로그램도 3개 정도 되거든요. 슈만, 브람스, 베토벤, 슈베르트까지 제가 좋아하는 작곡가들의 곡으로 몰입도 있게 구성했는데, 많은 곡을 그냥 연주하는 게 아니라 더 가깝게, 깊이 있게 담아낼 수 있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가장 바라는 것은 연주자로서의 열정이 식지 않는 거예요. 주옥같은 곡도 많고, 저는 아직 배울 게 너무 많거든요. 몇 백 년 전,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작곡한 곡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성숙한지. 그 위대한 곡을 남겨준 작곡가, 음악에 감사하며 살고 싶고, 그 곡들을 소홀함 없이 연주하고 싶습니다.”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