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새해가 되었다. 이제는 어떤 꼼수를 써도 나이 50이 넘은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느덧 모임에 가면 웬만하면 중간 이상의 위치이거나 가장 나이 든 사람인 존재가 되었다. 언제나 젊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살아온 사람 입장에서 썩 반가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냥 부정해서도 안되는 상황이다. 30년 전에 비해서 앞으로 살아가야할 시간이 훨씬 많이 펼쳐져 있으니 “나 이렇게 살다가 죽을 테니 건들지 마라.”는 식의 마음가짐은 절대 금물이다. 의도가 어떻든 간에 내 경험담을 이야기하거나, 혹은 남의 인생에 조언을 했다가는 꼰대로 낙인 찍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떻게 하면 잘 늙어가는 중년의 아저씨가 될 것이고, 더 나아가 괜찮게 나이 먹은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좀 모자란 듯 사는게 좋다
일본의 만화가 ‘야마다 레이지’는 2017년 출간한 『어른의 의무』 에서 좋은 어른은 1) 불평하지 않는다. 2) 잘난 척하지 않는다. 3)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한다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고 일본의 여러 인생 선배들을 인터뷰한 후 정리한 적 있다.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세상에 대해 불평만 하고, 억울한 마음만 갖는 것 보다는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 운이 좋은 것이나 감사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좋다. 기분이 나쁘다고 그것을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들까지 내 기분에 영향을 받을 자리가 많으니, 가급적 내 마음을 기분 좋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건 나뿐 아니라 주변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나이가 들수록 의무와 같이 되어야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어른들의 생각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세상을 참 살아왔다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사람들이 “내가 한 70년 살아보니 삶이란 이런 거 같다”라고 엑기스를 뽑아주면 앞으로 다가올 나머지 삶을 대할 마음가짐을 갖는데 좋지 않을까?
김지수의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이 이런 요구에 잘 부합하는 책이었다. 김지수는 <조선비즈> 문화부 기자로, 이 책은 저자가 만난 평균 연령 72세의 어른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지면에 소개한 것을 다시 정리해서 묶어낸 것이다. 윤여정, 노라노, 최재천, 이순재, 강상중, 정경화, 하라 켄야, 유홍준, 송승환, 김형석 등 모두 16명을 인터뷰하였는데, 오랜 기간 패션지에서 에디터로 인터뷰 기사를 쓴 덕분인지 신문사의 인터뷰 기사와 결이 달랐다.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주거나, 한 사람의 인생을 축약해서 부각하기보다는, 글을 읽다 보면 마치 그 사람이 옷의 질감 같은 촉각과 시각적 감각으로 느껴졌다.
이 책에 실린 몇 명의 인터뷰에서 나는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배우 윤여정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tvN <윤식당>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는 비결을 묻자, “젊은 애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 막 신통하고 장하고 그래요. 난 내가 너무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걸 너무 잘 알아. 그래도 노력은 해요. 애들처럼 똑같이 욕심 안내고, 밥값은 내가 내고.뭐 대단한 어른은 못 돼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매일매일이 새롭다면서 처음으로 72살을 살고 있다면서 매일이 처음이라 실수하고 성질을 낸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며 그러면서 성숙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90세의 현역 디자이너 노라노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한다. 여전히 디자인 작업을 하러 작업실에 나오는 그녀는 일을 해야 행복하다면서 무용지물로 살면 자기 가치를 잃어버린다고 경고한다. 인생은 잃는 것과 얻는 것이 공평하다는 걸 100년 가까이 살면서 깨닫게 되었다며 딱 자기 생긴 것만큼 사니, 자기가 가진 것 이상을 하려 들면 스트레스만 받지 더 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스트레스 받는 젊은이들에게 10%정도 여유를 두고 일을 하라고 당부한다. 100%넘게 하려고 애쓰면 그러다가 넘어지거나 타버린다고.
연기 인생만 62년인 배우 이순재는 좀 손해를 보면서 살아야 큰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 더 먹겠다고 달려들면 갈등이 커지고 적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건 여러 욕심이 있지만 조그만 손해는 감수하고 좀 모자란 듯 사는게 좋다는 것이 그가 깨달은 인생의 룰이었다.
평생을 팽팽한 활과 같이 완벽주의적으로 살아온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젊을 때에는 지독한 연습 덕에 테크닉적으로 완벽한 결백하고 순수한 괴물이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고 한다. 더 이상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런 것이 도리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윷놀이를 하면서 윷을 던지는 정경화를 묘사하며 인생은 도박이며 동시에 축복이라는 그녀의 말을 전한다. 어떤 패가 나올지 모르지만 자신의 운을 믿는 것이 이상적이지는 않을지 모르나 최적의 삶의 선택이 된다는 것이다. 완벽을 내려놓은 그녀의 연주는 도리어 감동적일 수 있는 것은 운을 믿고, 연주를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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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공부도 선행학습이 필요한 과목
이들의 말은 야마다 레이지의 『어른의 의무』 의 세 가지 조건에도 잘 부합한다. 거기에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완벽을 지향하고 죽도록 노력하는 것,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는 것, 물론 인생의 한 시기에 해봐야할 일이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꾸준히 이름 석자를 들고 살아가면서 70년 넘어 일을 해나가려면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한다. 완벽, 최선, 열심의 경지를 넘어서서 이제는 힘을 빼고 어느 수준 이상의 아웃풋을 꾸준히 낼 수 있는 신뢰도 있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우선하는 덕목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상적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적당히 작은 손해는 감수하고 바보 같아 보여도 속상해 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죽을 힘을 다해 120% 쓰기보다 10% 정도는 남겨둘 여유를 가지려 반대 방향으로 애를 쓴다. 자신을 완성형으로 인식하고 자기가 만든 작은 성을 지켜 나가기만 하려 하기보다 나이가 든 다음에도 새로운 환경을 맞아 불안이 아닌 흥미를 갖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조언한다.
물론 우리는 이 책에서 70년 넘게 현역에서 살아가면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 삶의 정수로 내놓은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또 다른 욕심일 뿐이다. 그저 마음에 드는 것 한 두가지를 가슴에 간직한 채 어떤 삶의 선택의 고비가 왔을 때 꺼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욕심내지 않고 작은 손해는 내가 안고, 완벽을 추구하기보다 실수를 받아들이고, 10% 정도 에너지를 남겨 놓을 수 있는 여유 공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한결 괜찮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꼭 중년이나 노년뿐 아니다. 열심히 살다가 다 타버려 번 아웃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할 태도이다. 어쩌면 인생 공부도 선행학습이 필요한 과목이라고 할만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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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인생의 철학자들김지수 저 | 어떤책
더 나아갈 수도 있지만 약간의 포기와 함께 그 정도에서 선을 긋는 것이 중요하다고. 세계가 인정하는 동물행동학자 최재천은 유구한 역사 속에 진화를 거듭해 온 동물들을 30년 이상 관찰한 결과를 들려준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