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커포티 ⓒ Constantin Joffe/Conde Nast
소설만큼이나 소설가의 일대기가 몇 번이나 영화화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트루먼 커포티의 경우라면 그랬다. 2005년 베넷 밀러 감독이 발표한 <카포티>에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커포티 역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토비 존스가 커포티를 연기한 <악명 높은>이라는 영화가 선을 보였다. 두 작품 모두 『인 콜드 블러드』 를 집필하던 시기의 커포티에 집중했는데, 165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트루먼 커포티를 떠올린다면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커포티에 다소 의외라는 시선이 쏟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호프먼의 키가 177센티미터 정도였으니 크기도 크거니와 몸집도 더 컸기 때문이다. 캐스팅 당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호프먼은 이 영화로 생애 유일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언제나 사람들 한복판에서 상황을 컨트롤하고자 한, 혹은 가십이라면 끝도 없이 떠들 수 있는 유명한 소설가였던 트루먼 커포티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려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보다 커 보였고, 실제를 더 커 보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논픽션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
“얼굴 사진을 아름답게 찍는 요령이 뭔가요?”
“그건 간단해요. 당신의 머릿속을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채우면 돼요.”
커포티는 1924년 9월 30일, 트루먼 스트렉퍼스 퍼슨스라는 이름으로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 대신 어린 트루먼을 키운 사람은 앨라배마에 있는 어머니의 친척들이었다. 특히 먼 친척인 숙이라는 아줌마와는 함께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친구처럼 지냈다. 그 당시의 추억은 커포티의 자전적 소설인 <크리스마스의 추억>(소설집 『차가운 벽』 에 수록)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후일 『인 콜드 블러드』 를 함께 취재했고 『앵무새 죽이기』 를 쓴 넬 하퍼 리와 친분을 맺은 것도 이때 일이다. 커포티라는 성은 그의 어머니가 재혼한 1933년 이후에야 갖게 된 것이다.
1942년이 되어 대학 입학 대신 작가로서의 삶을 위해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커포티는 『뉴요커』 에 사환으로 일을 얻었다. 『뉴요커』 를 통한 데뷔를 원했기 때문이었으나 실패하고, 1945년 단편 <미리엄>을 『마드무아젤』에, <밤의 나무>를 『하퍼스 바자』 에 실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단편소설들은 평단의 주목을 받았는데, 1947년 <마지막 문을 닫아라>로 뛰어난 단편에 주어지는 ‘오 헨리 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에 그와 친해진 이는 바로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였다. 커포티는 뉴욕 사라토가 스프링스에 위치한 소설가들을 위한 창작 공간이었던 ‘야도’에서 만난 그녀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했고, 하이스미스의 데뷔작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하이스미스의 야심이 미국판 『죄와 벌』 을 쓰는 것이었다고 존 코널리가 엮은 『죽이는 책』 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야심은 이후 커포티의 삶을 바꾼 베스트셀러인 『인 콜드 블러드』 역시 공유하고 있다. 1948년에는 첫 장편 『다른 목소리, 다른 방』 을 출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스물네 살의 젊은 커포티를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후일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 『무라카미 라디오』 에서 『다른 목소리, 다른 방』 의 뒤표지 사진에 대해 이렇게 적기도 했다. “트루먼 커포티가 작가로 데뷔했을 때 책 뒤표지에 썼던 얼굴 사진은 굉장히 (병적일 만큼) 아름다워서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누군가가 ‘얼굴 사진을 아름답게 찍는 요령이 뭔가요?’라고 질문하자 그가 대답했다. ‘그건 간단해요. 당신의 머릿속을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채우면 돼요.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누구라도 아름다운 얼굴이 찍힐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시도해보았지만 전혀 잘되지 않았다.” 이 시기, 그는 동료 작가이자 평생의 파트너가 된 잭 던피와 만나게 된다.
“커포티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엮어서 리듬감 있는
가장 뛰어난 문장을 쓴다. 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두 단어도 바꾸지 못하겠다.”
커포티는 사교계 사람들과 금세 친분을 쌓았다. 자신의 두 번째 장편인 『풀잎 하프』 를 연극으로 각색했고 존 허스튼 감독의 영화 <비트 더 데블> 각본 작업을 했고, <꽃들의 집>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개작했으며, 소설 『티파니에서 아침을』 을 발표하는 등 분주한 50년대가 흘러갔는데, 『티파니에서 아침을』 은 1961년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며 그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후일 『밤의 군대들』 (1968)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논픽션 소설’이라는 장르로는 커포티와 관심을 공유했던 작가 노먼 메일러는 “트루먼 커포티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엮어서 리듬감 있는 가장 뛰어난 문장을 쓴다. 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두 단어도 바꾸지 못하겠다”로 커포티의 소설을 칭송하기도 했다. 단편 <크리스마스의 추억>, 경장편 『풀잎 하프』 등 앨라배마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향수를 소설로 옮겨내곤 했던 커포티의 삶이 타인의 삶에 실제 발생한 사건을 소설로 옮겨내는 식으로 바뀐 것은 1959년 11월 아침 『뉴욕 타임스』 에 실린 짧은 기사였다.
1959년,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일가족 네 명이 엽총으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이 기사를 읽고 커포티는 저널리즘의 취재 방식과 소설적 글쓰기를 혼합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어려서부터의 친구였던 넬 하퍼 리와 함께 캔자스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마을의 모든 사람을 만났다. 담당 형사나 피해자의 이웃뿐 아니라, 그 마을의 공기 자체를 소설에 담을 생각이었다. 피해자들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라 해도 취재 대상이 되었다. 담당 형사가 “경찰보다 커포티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지만, 특이하게도 두 사람은 인터뷰를 할 때 녹음도 노트 필기도 하지 않았다. 대화의 94퍼센트를 기억한다고 자부한 커포티는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하퍼 리와 함께 그날 취재 내용을 정리해나갔다고 밝혔다.
사실인가 소설인가
소설의 지형도를 바꾼 ‘논픽션 소설’의 탄생
그렇게 완성된 『인 콜드 블러드』 의 ‘감사의 말’에는 “이 책에 사용한 모든 자료에서 내가 직접 관찰하지 않은 내용은 공식 기록에서 따오거나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던 사람들을 상당 기간 동안 여러 번 인터뷰해서 얻었다”고 되어 있으며, 책의 첫 문장은 아주 멀리서부터 사건의 무대가 될 홀컴 마을을 비추는 것이다. “홀컴 마을은 캔자스 서부, 밀을 경작하는 높은 평원 지대에 있다. 캔자스의 다른 지역 사람은 ‘저기 서쪽’이라고 부르는 외딴 지역이다. 콜로라도 주 경계에서 동쪽으로 110킬로미터 떨어진 시골인데, 단단한 푸른 하늘과 사막같이 맑은 공기 때문에 중서부라기보다는 극서부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극적인 살인 현장에서 시작하지 않고, 마치 풍토병을 살피는 의사와 같은 시선으로 공기의 냄새를 맡고 보이지 않는 지형까지를 파악해 머릿속에 넣어두려는 듯하다. 서정적인 묘사 이후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날의 사건’이다. 피해자들이 생존했던 시기가 책 속에 묘사되기도 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논픽션 소설’에서 ‘소설’의 비중이 적지 않음은 쉽게 헤아릴 수 있겠으나, 커포티 자신은 ‘논픽션’에 방점을 찍었다. 이전의 저널리즘이 간명하게 사실을 보도하는 데 그치기를 추구했다면, 커포티 이후 주목받은 ‘신 저널리즘’은 거기에 이야기를 더한다. 사실과 소설을 섞는다면 그것은 사실인가 소설인가. ‘논픽션 소설’이라는 기묘한 명명은 그렇게 탄생했다. 확실한 것은 신 저널리즘 쪽이 점점 더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
트루먼 커포티
『인 콜드 블러드』 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생겼던 것은 그래서다. 과연 ‘정확한’ 혹은 ‘속임수 없이 기록’하는 녹음장치 등의 도움이 없는 기록이 얼마나 진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범인 중 하나였던 페리 스미스에게 그가 느꼈음이 분명한 모호한 친밀함(커포티는 스미스와 자신이 무척 닮은꼴이라고 생각했는데, 또한 그에게 매혹된 듯도 보였다)은 신뢰도를 깎아먹는 데 일조했다. 담당 형사에게 뇌물을 주었다든가, 당시 수사 자료와 책의 내용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든가 하는 말은 커포티가 불안정한,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에 시달리며 인간관계까지 어려움을 겪던 말년에 내내 제기되던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 콜드 블러드』 의 전설적인 성공 이후의 일이었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된 『인 콜드 블러드』 비평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화 판권까지 팔고 난 커포티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였고 셀레브리티였으며 부자였다. 커포티는 『워싱턴 포스트』 와 『뉴스위크』 등을 소유한 언론 재벌이었던 남편의 죽음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캐서린 그레이엄을 주빈으로(이 무도회 이후 그녀의 언론 사주로서의 활약상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연출, 메릴 스트립 주연의 <더 포스트>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흑백무도회를 열었다. 앤디 워홀, 미아 패로, 프랭크 시내트라 등 유명하다는 사람이 모두 참석했고, 『뉴욕 타임스』 는 파티 참석자 명단을 전부 신문에 게재했다. 그리고 그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커포티의 적이 되었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트루먼 커포티의 삶에서는 특히 그랬다.
‘기억’은 ‘기록’보다 완전하다
그가 기억한 아름답고 쓸쓸한 삶의 기록들
커포티의 다음 관심은 사교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인 콜드 블러드』 로 옮기지 않았다면 그 이름도 금방 잊혔을 캔자스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아니라, 유명하고 부유한 상류층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응답받은 기도’라는 미완의 프로젝트의 시작은 그랬다. 논픽션 소설의 기법으로, 자신이 익히 들어온 상류층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첫 몇 꼭지의 글이 발표되었고, 커포티는 바로 사교계에서 추방당했다. 70년대 후반부터 198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이 그 이유였다고 알려졌다) 그는 다시 『인 콜드 블러드』 의 명성, 혹은 그가 신인 작가이던 시절 유지했던 친분 관계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그 이후에 남은 것은 술, 마약, 음주 운전, TV 토크쇼의 횡설수설이었다.
트루먼 커포티는 자전적 소설을 쓰며 커리어를 쌓고 논픽션 소설을 써서 스타가 되었다. 그에게 삶 혹은 진실은 약간의 상상력 혹은 문학적 손길이 필요한 재료였고, 충분히 아름답게 완성되었다면 진실 여부를 묻지 않아도 되는 완성품이었다. 그것이 타인의 삶을 다루는 순간, 혹은 타인의 자신의 삶을 그렇게 재해석하는 순간, 어떤 위험성이 있을지에 대해 커포티는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니, 장점과 단점 모두가 그의 작품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커포티의 소설을 읽으며 매번 놀라는 것은, 그가 사람들을 ‘기억’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쓸쓸하게, 다시 오지 않을 것들을 애틋하게 품어내는지다. 그는 ‘기억’이야말로 ‘기록’보다 더 완전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 대상만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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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잊으면트루먼 카포티 저/박현주 역 | 시공사
소외된 주변인들을 향한 연민, 이를 표현해내는 아름답고 명징한 문장과 독자를 매혹하는 정교한 상상력 등 훗날 화려하게 꽃피는 커포티 문학의 모든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다혜(북칼럼니스트,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