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이용해 3박4일로 도쿄에 다녀왔다. 좋아하는 동네만 대충 둘러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라 적잖이 고민되었다. 최소 일주일은 잡던 여행 일정을 짧게 자주 가는 방식으로 바꾸면 어떨지 시도해보려는 심산이었다.
여행 첫날 저녁에는 진보초에 위치한 책거리라는 서점에서 토크를 하기로 예정되었다. 아침 9시 비행기로 출발해 아오야마에서 도착 기념 쇼핑을 하고 아이스 카페오레를 마셨다. 작년에 알게 된 쇼조커피의 아이스 카페오레는 차가운 커피를 마시지 않는데도 일부러 찾아갈 정도로 내 입맛에 맞다. 특이한 점은 주문 직후 만들지 않고 미리 제조해 냉장 보관한 통에서 국자로 떠 준다는 사실이다. 갓 만들어야 맛있다는 통념은 누군가의 시도와 결실로 엎어지기 마련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The Scrap』 에서 1985년 어느 주의 <뉴욕 타임스> 일요판에 “(도쿄의) 커피숍에서 제공되는 커피의 수준은 ‘정말 맛있다’에서 ‘완벽하게 맛있다’의 범위 안에 있다”는 내용으로 기사가 실렸다고 썼는데 그 흐름이 꾸준히 이어진 모양이다. 카페 운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상적 커피 소비자일 뿐인 나는 ‘기분 좋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라는 단순한 조건 하나만 충족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런 공간이 드물다.
일본은 커피를 대하는 관점이 다층적인 것 같고 그 관점이 공간에 투영되어 다양한 카페가 존재하는 듯하다. 일 년에 한두 번 스치듯 왔다갔다 하는 여행자의 눈에 비친 풍경이라 왜곡된 시선일지 모르지만 여행자가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도 왜곡되지 않은 관점을 가지기란 불가능한 일 아닐까.
토크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국어를 말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알아듣는 모양인지 내 말이 통역되기 전에 먼저 반응했다. 책에 사인을 받으려는 이들 대개 한글로 이름을 적어주었다. 유유에서 번역본을 낸 『일본 1인출판사가 일하는 방식』 의 저자 니시야마 마사코 씨가 참석해 한국어판 표지 콘셉트가 무척 좋았다며 소회를 나누었다.
다음 날엔 도쿄도정원미술관에 갔다. 일년에 한 번 본관을 대중에 개방하는 시기다. 지금은 미술관의 본관이 된 아사카노미야 저택에 살던 아사카 왕자는 아르누보에 심취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특히 서재가 돋보였다. 돔을 덮은 원형 방에 책상과 의자를 한가운데 배치했다. 중심부가 반원형으로 튀어나온 책상은 회전하도록 설계되었다. 나무의 색과 무늬, 반질반질한 표면 처리가 매혹적이었다. 얼마전 인상 깊게 읽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에 묘사된 건축사무소의 풍경이 겹쳐 뭉글했다.
포스트에서 책을 두 권 샀다. 일본어를 전혀 못 하니 두 권 다 제목도 모른다. 공 들여 만든 수제본이다. 한 권은 사진집으로, 펼치기도 힘들 만큼 얇은 트레이싱지에 사진을 접착했다. 얇다는 점을 이용해 뒷면에 인쇄한 글자가 비치도록 했는데 맨 앞 두 장은 금박을 추가해 글자의 중첩 효과를 더했다. 다른 한 권 역시 글 사이사이에 얇은 종이에 인쇄한 사진을 끼워 넣어 스테이플로 철했다. 포스트는 소비의 마지막 단계인 영수증까지 기획해 계산기로 출력한 영수증 대신 손으로 적은 영수증을 준다.
늦은 점심으로 소바와 계란말이를 먹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밥이었다. 가게 이름은 비밀.
난 우연에 의지하는 게으른 여행자지만 짧은 일정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 갈 곳을 꽤 구체적으로 안배했고 식당도 여러 군데 예약했다. 효율을 위해 주로 택시로 이동했다. 문은 자동이지, 별다른 피곤한 과정 없이 목적지 앞에 데려다주니 천국이 따로 없다. 한국에 돌아온 날은 택시 때문에 여행의 여운을 망쳐버렸다. 큰 가방을 보고도 실어주기는커녕 차 트렁크 문만 열고 내다보지도 않았다. 몇 초쯤 가만히 서서 기다렸지만 택시 기사가 내릴 기색이 없어 내가 실었는데 그러면서 트렁크 문에 긁혀 손등이 훌렁 까졌다. 기사를 저주했다.
셋째 날엔 늦게 일어나 푸글렌에서 오전을 보내고 예약해 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 먹은 후 넋 놓고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내 이름이 들렸다. ‘그럴 리가……’ 서촌 사무실을 같이 쓰던 지연 씨였다. 반가웠지만 서로의 일정을 고려해 몇 마디 나누고는 헤어졌다. 그날은 주로 아오야마에서 보낼 작정이었는데 어쩌다 시부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번 여행의 발견은 시부야였다. 시부야는 내 관심을 끄는 요소가 없는 동네로 치부해 몇 년째 가지 않았다. 우연히 발견한 편집숍 두 군데가 괜찮았다. 나는 기능성 소재를 좋아하지만 등산복을 일상적으로 입는 행위는 금기다. 기능성 소재를 사용한 옷은 보통 아웃도어 느낌이 물씬 나는데 일본의 몇몇 브랜드가 흥미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기후 때문인지 라이프스타일 때문인지 아웃도어와 일상생활 사이의 어디쯤 위치하는 옷을 내놓는다. 게다가 내 체형에 맞는 옷이 많다. 이번에 실물을 확인하고 싶은 옷이 몇 가지 있었다. 어떤 건 방향성은 마음에 들지만 회색, 검정 등 명도와 채도가 낮은 색뿐이라 나한테 어울리지 않았고 어떤 건 아웃도어 쪽으로 많이 기울어서 아쉬웠고 어떤 건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가 있어 쉬이 결정하지 못했다.
옷을 사는 일은 상당히 복잡하다. 생활 방식에 합당하면서 보기 좋아야 한다. 한때 재킷을 여러 벌 맞추었지만 지금은 거의 입지 않는다. 구두도 마찬가지. 신발장에 어느새 운동화가 꽤 늘었다. 하지만 매일 운동화만 신고 싶지 않다. 운동화가 아니면서 편한 신발은…… 몇 년째 찾고 있다. 셔츠를 좋아하지만 소매 끝에 채운 단추 때문에 손목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실루엣이 싫다. 단추를 푼 채 다니기는 더 싫다. 단추 없이 일자로 마무리된 셔츠를 입고 싶다. 이번에 그런 셔츠가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나는 어째서 예전이 아닌 지금 그런 디자인을 찾을까? 그런 옷을 출시한 브랜드는 어째서 예전이 아닌 지금 그 옷을 만들었을까? 저마다의 이유로, 그러나 결과적으로 공통되게 셔츠 소매에서 단추를 빼기에 이르는 흐름은 어떤 작용으로 생기는 걸까?
마음에 드는 백팩은 이번에도 찾지 못했다. 12인치 노트북, 책, 얇은 카디건 정도가 딱 알맞게 들어가는 경쾌한 가방은 어째서 보기 힘들까? 대신 방수 처리가 된 선명한 빨강색 숄더백을 골랐다.
마지막 날 오전에는 긴자에서 커피 원두를 샀다. 야나카커피는 원두를 고르면 그 자리에서 로스팅 해준다. 마지막 점심은 스시. 여섯 좌석밖에 없는 곳으로 일주일 전에 취소해도 밥값을 전액 지불해야 하는 엄격한 식당이다. 생선살이며 밥알이며 모든 식재료가 이 없이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웠다. 스시 식당을 예약하느라 검색하며 보니 셰프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밀고 있었다. 위생 때문이겠지? 식당 손님 중에 머리를 민 사람이 수셰프와 끊임없이 얘기를 주고받다가 나중에는 명함까지 교환하던데, 그 사람도 스시 만드는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공항 면세점에서 히비키를 한 병 사고 싶었는데 그리 비쌀 줄 몰랐다. 포기하기 쉬웠다. 시간차 없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세상이지만 사용하는 언어나 매체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다르다. 문화권에 따라 생활에서 추구하는 지점이 다르기도 하다. 미약하나마 그 차이를 직접 느껴보는 재미가 여행의 맛이다. 짧게라도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면 감각이 약간 달라진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살짝 달라진 감각이 익숙한 현실과 뒤섞이면서 이전과 약간 다른 방식으로 자리잡는다. 자아는 그렇게 다져지는 것 같다. 모든 인간은 뭔가를 만든다. 물건이 아니라도 자기 자신을 다듬어 나간다. 평생 프로젝트다.
이기준(그래픽 디자이너)
에세이 『저, 죄송한데요』를 썼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