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전에도 한반도의 분할시도는 세 번이나 있었다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되어 있는 나라다. 내가 독일 유학을 떠났던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독일 또한 분단국이었다.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통일되었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그보다 약 1년 전인 1989년 11월 9일이었다. 이제 한반도만 유일하게 분단국으로 남아 있다. 왜 이렇게 통일이 힘든 걸까?
한반도의 분단은 주변 강대국들의 아주 오래된 기획이었기 때문이었다(이완범, 『한반도 분할의 역사』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년). 역사상의 자료로 남아 있는 한반도 분할의 첫 번째 시도는 임진왜란 때다. 1592년 9월, 명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대동강 근처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는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 ?~1597)과 협상을 시도했다. 고니시는 대동강 동쪽의 땅은 일본이 갖고, 서쪽은 조선의 땅으로 인정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미 일본 군대가 대동강 인근까지 점령하고 있었기에 현재의 그 자리에서 전쟁을 끝내자는 제안이었다. 아울러 당시 조선은 명나라와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조선과 명나라를 동일시하여 대동강 서쪽 땅을 점유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심유경은 고니시의 주장을 받아들여 평양의 서북쪽은 조선(명나라) 지역으로, 남동쪽은 일본 지역으로 분할하기로 밀약을 맺는다. 하지만 이 같은 명나라와 일본의 한반도 분할계획은 그저 계획으로 끝난다. 심유경과 조선의 지연 작전의 일환이라는 설도 있다. 그 후에도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몇 번에 걸쳐 한반도의 분할을 요구했다.
1910년 당시 아시아 지도. 한반도 분할시도의 역사는 아주 깊다. 1945년 분할 이전에도 세 번의 시도가 있었다. 오늘날 한반도의 통일이 이토록 힘들고 어려운 것은 한반도 주변 열강들에 의한 한반도 분할시도가 아주 오래된 음모였기 때문이다. 모든 분할시도에는 일본이 관계되어 있다. 나쁜 이웃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한반도 분할시도는 1894년 청일전쟁 직전에 시도되었다. 아시아의 지배권을 넓혀나가던 영국과 미국은 일본과 청나라의 격돌을 피하고 싶어 했다. 자신들의 의도대로 진행되던 국제정치 질서가 일본의 급격한 세력 확장으로 인해 요동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일본과 청나라의 군사적 충돌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넓히려고 한반도 쪽으로 남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질 것이 분명했다.
서양 언론에 그려진 20세기 초의 한반도 상황. 일본과 청나라가 마주 앉아 물고기로 희화화된 조선을 낚으려는 모습을 러시아가 지켜보고 있다.
1876년 한일수호 조약(일명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한반도에는 일본의 영향이 크게 확대되었다. 일본식 개혁모델을 따라 만들어진 신식 군대에 비해 형편없는 처우를 받던 구식 군대가 폭동을 일으킨 1882년의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한반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은 다시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않아 상황은 다시 반전되었다. 1884년 청나라가 베트남에서 일어난 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에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 병사들의 절반을 철수하자, 그동안 위축되어 있던 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식 개혁모델을 흉내 내고자 했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난다. 갑신정변이 허무하게 끝난 이듬해,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 1823~1901)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는다. 톈진조약의 핵심 내용은 한반도에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의 동시 철수였다. 그러나 ‘앞으로 한반도에 각 나라가 출병할 경우, 상호 통지하자’고 한 톈진조약의 마지막 조항은 10년 후 청일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상호 통지하자’는 단서는 한 나라가 파병할 경우,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파병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톈진조약 이후에도 한반도는 계속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열강의 경제적 침탈에, 다른 한편으로는 탐관오리의 수탈에 고통당하던 농민들은 ‘동학(東學)’의 기치 아래 뭉쳐 저항하기 시작했다. 동학은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며 농민 세력을 규합해나갔다. 1894년에 이르러 ‘동학농민운동’이 본격 발발하고 한반도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같은 해 6월,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청나라가 출병하자 일본 또한 톈진조약에 따라 한반도에 군대를 급파한다.
일본 군대와 청나라 군대 사이의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 1894년 7월 18일, 영국은 청나라와 일본의 한반도 분할 점령을 제안한다. 서울을 기준으로 남쪽의 4개 도(경상, 전라, 충청, 강원)는 일본이 점령하고, 북쪽의 3개 도(평안, 함경, 황해)는 청나라가 점령하도록 하자는 계획이었다. 조선의 국왕은 일본과 청나라의 감시 하에 단지 경기도만을 다스리도록 하자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청나라는 영국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7월 25일과 29일에 청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한다. 이어진 청나라와의 본격 전투에서 일본은 연전연승하게 된다. 청나라와 일본의 한반도 분할 지배에 관한 논의는 아예 없던 것이 되고 만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는 아예 노골적인 주변 강대국들의 땅 나눠먹기의 대상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 번째 한반도 분할시도가 이뤄졌다. 이번에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논의되었는데, 일본이 먼저 러시아에 제안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유럽의 강대국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기에 일본은 아직 많이 약했다. 일단 남하하는 러시아를 저지해야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 친일파가 다시 내각을 장악했다. 공포를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은 그 이듬해인 1896년 2월의 일이다. 일본은 드러내놓고 한반도에 욕심을 내는 러시아 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한다. 아이디어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머리에서 나왔다. 1896년 5월 24일,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의 특명전권대사로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 때 그는 한반도의 분할 지배를 러시아에 제안한다.
싸우지 말고 나눠 먹자는 이야기다. 이때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제안한 분할의 기준선이 대동강인지 한강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한반도의 분할선으로 북위 38도선, 혹은 39도선이 이때부터 논의되기 시작되었다. 물론 남쪽은 일본이 지배하고, 북쪽은 러시아의 관할로 하자는 제안이다. 야마가타의 제안에는 러시아와 일본의 점령 지역 중간에 ‘비무장지대’를 두자는 안도 포함되었다. 이 제안은 당시 일본을 우습게 여기던 러시아에 의해 거절됐다.
러일전쟁을 바로 앞둔 1903년, 이번에는 러시아가 일본에 다시 한반도 분할 지배를 제안한다. 지난 수년간 일본의 한반도 점령이 아주 노골적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분할의 기준선은 몇 년 전 일본의 제안보다 위로 올라가, 대동강이나 압록강 부근이 거론되었다. 일본을 의식한 러시아는 극동정책을 만주 지역에서 멈추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의 지원을 믿고 러시아의 제안을 거절한다. 당시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고 했던 영국은 1902년 영일동맹을 맺는다. 한반도를 단독 지배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일본과 러시아는 결국 1904년 전쟁을 하게 된다. 러일전쟁이다. 그 또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아시아에서 일본의 무모하고도 잔인한 영토 확장은 이후 수십 년 동안 계속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네 번째 한반도 분할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뤄졌고,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이해관계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해결은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된 한반도의 분할 음모인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분할시도에 일본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은 언제부터 이렇게 ‘특수’했던 걸까?
자라면서 한반도의 분단과 관련해 ‘지정학적 특수성’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들었다. 지리학적 특수성이 아니라 지정학적 특수성이다. ‘반도’라는 지리학적 특수성이라면 바로 이해되지만, 지정학적 특수성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다들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지정학(地政學)이란 도대체 무슨 학문일까?
‘지정학’은 독어로 ‘Geopolitk’이다. ‘지리’와 ‘정치’를 섞은 단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영역의 이 두 단어가 단순히 그냥 섞이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국가’ 혹은 ‘사회’를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파악하려는 ‘사회진화론’이 숨겨져 있다. 지정학이란 용어를 학문적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스웨덴의 정치학자 루돌프 셀렌(Rudolf Kjellen, 1864~1922)이다. 그는 1899년 「스웨덴 인류학,지리학회지(誌)(Zeitschrift der Schwedischen Gesellschaft fur Anthropologie und Geographie)」에 ‘지정학이란 지리적 유기체 혹은 공간적 현상으로서의 국가에 관한 학문(Geopolitik ist die Lehre uber den Staat als geographischen Organismus oder als Erscheinung im Raum)’이라고 정의했다. 한마디로 국가를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파악하자는 주장이다.
셀렌의 지정학은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 1844~1904)의 영향이 컸다. 라첼은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공간)’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생활(Leben)’과 ‘공간(Raum)’을 합쳐 만든 레벤스라움은 국가도 유기체처럼 숨 쉴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지속적으로 진화, 발전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문화가 ‘뒤떨어진’ 나라는 생존할 수 없고, 자신의 공간을 강력하게 확장하는 ‘고등문화’의 국가에 내줘야 한다는 라첼의 레벤스라움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확대를 위한 아주 기특한 이데올로기였다.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계몽하는 나치 시대의 포스터. 프랑스, 영국에 비해 인구가 두 배 반이나 많은 독일은 그에 상응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국가도 유기체처럼 크기에 비례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레벤스라움 개념은 나치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아주 기특한 이데올로기였다.
라첼의 학문적 출발은 동물학, 지리학이었으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일하게 된 1886년 이후에는 민족학, 지정학으로 연구 분야를 넓혔다. 당시 라이프치히 대학에는 국민경제학의 대가 빌헬름 로셔(Wilhelm Roscher, 1817~1894)나 현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빌헬름 분트(Wilhelm Wundt, 1832~1920)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사회진화론의 다양한 학문적 적용이 시도되고 있었다. 진화하는 유기체처럼 사회나 국가도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전제하에 국가의 경제나 민족의 발전 경로를 서술하려는 시도가 당시 독일 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라첼의 레벤스라움과 셀렌의 지정학은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 1869~1946)를 통해 독일 나치즘의 사상적 기초가 된다. 1908년, 독일제국 참모본부의 장교로 일하던 39세의 하우스호퍼는 부인과 함께 ‘참관 장교’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해 약 1년을 일본에 머물게 된다. 1년에 불과한 하우스호퍼의 일본 방문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독일은 물론, 일본과 한반도, 더 나아가 전 세계의 운명을 뒤흔드는 사건이 된다.
짧은 기간이지만 일본에서부터 한반도, 중국까지 돌아보고 독일로 귀국한 하우스호퍼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한다. 1913년 뮌헨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대(大) 일본의 군사력, 세계에서의 위치, 미래(Grob-Japans Wehrkraft, Weltstellung und Zukunft)」이다. 이 논문은 같은 해 『대(大) 일본(Dai Nihon)』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 후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일본에 관한 책을 수차례 발간한다. 1941년 발간된 『일본, 제국을 건설하다(Japan baut sein Reich)』는 일본 제국주의의 성립 과정에 관한 매우 자세한 종합 보고서다. 그의 책들에는 당시 한반도의 상황에 관한 내용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천황제와 아시아의 후발 제국주의의 성립 과정에 관한 하우스호퍼의 책은 나치독일의 일본에 대한 지식과 외교 관계에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박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하우스호퍼는 장교로 참전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장군으로 승진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 그는 뮌헨대학에서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1921년부터는 뮌헨대학의 교수로 일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라첼의 레벤스라움 개념에 기초한 지정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다. 1923년부터는 독일의 보수적 지리학자들과 함께 「지정학지(誌)(Zeitschrift fur Geopolitk)」를 발간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을 비판하고 독일제국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하우스호퍼가 라첼의 레벤스라움을 자신의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던 것은 개인적 관계도 한몫했다. 라첼은 하우스호퍼 아버지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레벤스라움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집을 방문한 라첼과 아버지의 대화를 통해 들었던 아주 익숙한 개념이었다. 그가 정교화한 지정학적 개념으로서의 레벤스라움이 히틀러의 나치 이데올로기가 되는 과정 또한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한때 2인자 자리까지 올랐던 루돌프 헤스(Rudolf Hess, 1894~1987)는 하우스호퍼가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하우스호퍼의 조교였던 헤스는 히틀러가 1923년 뮌헨 맥주홀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히틀러와 함께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헤스는 히틀러가 구술하는 『나의 투쟁(Mein Kampf)』 을 받아 적었다. 이후 히틀러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히틀러가 집권하자 총통 후계자로까지 승진한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 개념은 헤스를 통해 히틀러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칼 하우스호퍼(왼쪽)와 루돌프 헤스(오른쪽). 하우스호퍼의 제자였던 헤스는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 개념을 히틀러에게 전달했다. 이후 레벤스라움은 나치의 아주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영토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다. 히틀러는 급격히 산업화되고 있는 독일의 생존공간, 즉 레벤스라움이 독일 인구에 비해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미개한 슬라브인들의 땅을 빼앗아야 했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그래도 된다고 했다. 아니,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히틀러를 부추겼다.
하우스호퍼의 일본 체류 경험은 레벤스라움의 히틀러식 실천에도 아주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우스호퍼는 한마디로 일본의 ‘광팬’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일본을 이상적 국가의 모델로 생각했다. 그의 눈에 일본이라는 국가는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고, 국민들은 언제든 전쟁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우스호퍼는 독일의 지식인, 관료들의 전쟁에 대한 시니컬한 태도를 비판하며, 언제나 전시(戰時)와 다름없는 일본의 일상을 부러워하며 소개했다.
항상 전쟁을 치러왔던 일본과 셀 수 없이 많은 공국들 사이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독일이 20세기 초반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군국주의의 나라가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일상의 병영화가 일어나는 군국주의는 아주 구체적인 장치들로 기능한다. 앞서 설명한 행진곡과 제식훈련 같은 것들이다. 일본은 프로이센 군대의 행진곡과 제식훈련을 배워갔다.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행진곡과 제식훈련을 가르쳤다. 하우스호퍼는 독일보다 더 독일스럽게 군국주의화되어 가는 일본이 몹시 부러웠다. 그 흔적은 그가 저술한 일본 관련 책들에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1905년 10월, 러일전쟁에 승리한 후 귀환하는 병사들을 환영하는 도쿄 신바시 역의 인파. 일본의 ‘깃발’에 하우스호퍼는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다.
행진곡과 제식훈련을 일본이 프로이센으로부터 배워갔다면, ‘깃발’의 프로파간다는 독일이 일본으로부터 배워갔다. 하우스호퍼는 일본의 깃발에 특별하게 감동(?)했다. 일본 군대에게 있어 깃발은 전국시대부터 아주 특별한 상징이었다. 신호 체계이기도 했고, 각 다이묘(大名)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했다. 전쟁을 앞둔 다이묘의 출정식에는 온갖 요란한 깃발들이 휘날렸다. 프로이센식 근대 군대의 도입 이후에도 일본인의 깃발 사랑은 여전했다. 독일식 행진곡과 제식훈련에 깃발을 덧붙였다. 일본인의 깃발에 감동한 하우스호퍼는 히틀러의 나치에 일본식 깃발 사용을 적극 추천한다.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는 물론 히틀러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켄크로이츠로 장식된 깃발들이 사방에 나부끼는 나치 특유의 ‘깃발숭배(Fahnenkult)’는 하우스호퍼의 영향이다. 나치당의 깃발숭배가 가장 고조된 곳은 뉘른베르크 나치당대회에서였다. 이 나치당대회에 역사적인 악명을 안겨준 집단 심리학적 선동 방법은 하우스호퍼의 제자인 헤스의 작품이었다. 깃발과 행진이 동원되는 다양한 사이비 종교의식을 통해 히틀러는 일본의 천황과 같은 ‘신’이 되었던 것이다.
1937년 뉘른베르크 나치당대회 모습. 독일나치의 ‘깃발숭배(Fahnenkult)’는 일본 흉내 내기였다.
일본의 방법론을 받아들여 더욱 정교화된 하우스호퍼와 히틀러의 레벤스라움은 일본 군국주의에도 또 다시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구상이다. ‘서양에 맞서 아시아가 하나로 뭉쳐야 하고, 그 중심에는 일본이 있어야 한다’는 구상은 서구제국주의가 아시아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연대론’은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의 침략 야욕을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일본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 대동아공영권이 공식 천명된 것은 194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다양한 독일의 지정학적 개념들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공간운명(Raumschicksal)’, ‘공간편재(Raumordnung)’, ‘공동체(Gemeinschaft)’, ‘광역경제(Grossraumwirtschaft)’, ‘자급자족(Autarkie)’과 같은 독일식 지정학 용어들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침략주의를 정당화하는 아주 긴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일본은 독일을 아주 제대로 배웠고, 배운 것을 발전시켜 다시 독일에 전해줬고, 독일은 더욱 정교화하여 일본에 전해주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