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색안경
우리는 한 목소리를 낼 만큼 위안부 문제에 관해 충분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계가 공유하고 있는 정보를 “일반 시민들”은 대체 어디까지 공유하고 있는 걸까?
글ㆍ사진 권용득(만화가)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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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서울고등법원 2심 재판부와 그 유죄 판결을 환영하는 사람들이다. 다음은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 2심 판결 중 일부다.

 

“피고인은 이 사건 표현(사실 적시에 해당하는 표현)들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서술하지 않거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은 마치 대부분 또는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였고,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군에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1)

 

한마디로 독자들의 생각이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오염될 수 있다는 얘기다. 책에 관한 평가와 해석의 차이를 떠나, 그와 같은 판단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일단 사람들이 책 내용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관계자에 의하면) 책은 정작 만 부도 채 팔리지 않았고, 세간에는 논란이 되고 있는 책 내용의 일부 또는 몇몇 문장만 공유되고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2심 재판부는 우리나라의 독서율과 독서량이 상당히 높다고 착각한 것 같다.

 

『제국의 위안부』를 향한 여론은 대개 비난 일색이지만, 책을 읽은 독자들 사이에서는 호평과 혹평이 엇갈린다. 말하자면 2심 판결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좀 더 섬세하게 이해하게 됐다는 독자들의 평가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2심 판결은 1심 판결도 대부분 부정하고 있다. 다음은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1심 판결 중 일부다.

 

“피고인이 이 사건 책을 저술한 주요한 동기가 ‘한일 양국의 상호 신뢰 구축을 통한 화해’라고 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그 의도가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 학계에서는 이미 알려진 기존의 사료와 선행 연구결과를 토대로 우리 사회의 주류적 시각과 다른 입장에서 주로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피고인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있는 학술적 성격의 대중서이다. (...) 새로운 사료를 날조하거나 기존 사료의 내용 자체를 왜곡하는 등의 방법으로 허위의 역사적 사실을 작출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2)

 

눈에 띄는 점은 『제국의 위안부』가 “학계에는 이미 알려진 기존의 사료와 연구결과를 토대로” 집필됐다고 판단한 대목이다. <황해문화> 91호를 통해 『제국의 위안부』를 맹렬히 비판했던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강성현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이 책의 프레임 중 하나인 민족주의 비판이 이 문제에 대해 더 민족주의로 대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구도로 인해 학술장에서 애써 틔운 다양한 논의의 싹들이 운동과 여론의 기반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말라버릴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 없다..”3)

 

책에 관한 평가와 해석의 차이를 떠나, 학계 또는 학술장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 꽤 다양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일반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보와 학계가 공유하고 있는 정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얘기고, 박유하 씨는 그 사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박유하 씨의 그 시도는 2014년 6월부터 법의 심판대에 올랐고, 사실 『제국의 위안부』와 박유하 씨를 둘러싼 갈등은 책 출간 전부터 예고된 일이다.

 

가령 재일조선인 학자 서경식 씨는 오래 전부터 박유하 씨와 일본 리버럴 세력을 꾸준히 비판해왔다.4) 박유하 씨의 의견과 주장은 일본 리버럴 세력의 “숨겨진 욕구”에 충실히 복무하며, 일본 극우파와 국내 친일파에게 “정치적 이용 가치가 높다”고 한다. 또한 서경식 씨는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사죄 담화 이후 일본 사회를 “반동기”라고 보고 있으며, 그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아시아의 총공세가 일본인을 모독한다는 식의 선전이 전국적으로 이뤄졌다”고 한다.5) 동의하기 어렵지만, 나는 서경식 씨의 그와 같은 주장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씨에게 일본의 우경화는 피부를 파고드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다만 박유하 씨는 정말 일본 리버럴 세력의 “숨겨진 욕구”를 대변하는 걸까? 또 일본의 우경화는 서경식 씨 말대로 일본 리버럴 세력이 우익 세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탓일까? 일본이 서경식 씨가 말한 “반동기”에 접어들 무렵, 마침 일본 정부를 향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한 목소리를 냈던 세력들도 양분되기 시작했다.6)  갈등의 원인은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다. 부조리한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위해 모처럼 힘을 합쳤던 세력들은 아시아여성기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으로 나뉘어졌고, 분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기 바빴다. 그 이후 박유하 씨(비교적 긍정파)는 서경식 씨(비교적 부정파)와 뜻을 같이 하는 식자들에게 반동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됐다. 다시 말해 <제국의 위안부>와 박유하 씨를 둘러싼 갈등의 이면에는 진영 논리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 진영이 어느 쪽이든 일본의 우경화는 여전히 한 목소리로 반대하고 있다.

 

“이제 일본은 ‘하나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내부에서의 대립은 건강한 대립으로 이어가더라도, 때로 외부를 향해 ‘일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 ‘하나의 목소리’를 아직 보상받지 못한 ‘위안부’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일, 그것만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제국의 위안부』의 한 대목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내용과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우익 세력을 향해 비판을 아끼지 않은 부분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책 표지나 띠지에 궁서체로 “저는 친일파가 아닙니다”라고 명시하지 않은 불찰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모두 저마다 다른 색안경을 끼고 상대방을 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의도에서 “숨겨진 욕구”부터 찾으며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일본의 우경화가 아니라 저마다 다른 색안경이 갈등을 힘껏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일본의 우경화는 누구의 탓도 아닐 수 있다. 오랜 경기 침체와 경제 성장이 한계에 부딪힌 이른바 선진국들은 빠짐없이 우경화됐고, 일본도 예외일 수 없다. 지금이 “반동기”의 연장선이라면, 한일관계의 걷잡을 수 없는 퇴행을 일본의 우경화와 리버럴의 역학 관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다.

 

“1997년부터 ‘위안부’를 기술한 교과서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우익 세력이 꾸준히 압력을 가한 결과 지금은 한 종류밖에 남지 않았다.”5)

 

서경식 씨의 말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 결과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위안부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며,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고노 담화(1993년)와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며 이것을 후세들에게 바로 전달하겠다”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의 사죄 편지(1997년)7)에도 반하는 얘기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피해회복과 보상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일본을 향해 이 약속부터 이행하라고 한 목소리로 요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한일 양국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목소리를 낼 만큼 위안부 문제에 관해 충분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계가 공유하고 있는 정보를 “일반 시민들”은 대체 어디까지 공유하고 있는 걸까? 학계와 “일반 시민들” 사이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려고 했던 <제국의 위안부>와 박유하 씨는 왜 혹자들에게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을까? 또 그 혹자들의 우려처럼 책 한 권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책에 관한 평가와 해석의 차이를 떠나, 한 권의 책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같은 책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aka 색안경)만 바뀔 뿐이다.

 

“‘성노예’란 성적인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말이다. 그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런 측면에만 주목하고 ‘피해자’의 틀에서 벗어나는 기억을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全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위안부들이 자신의 기억의 주인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기억에 의해서만 존재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우리 또한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주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중 한 대목이다.(117쪽) 용케 “이 사건 표현”에 해당되지 않은 무고한 대목이기도 하다. 내가 읽은 『제국의 위안부』는 진영 논리와 국적을 벗어나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살피려는 시도였고, 피해자 중심주의에 가까운 책이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완벽한 피해자상에 가두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제국의 위안부』가 유죄라면,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으로만 이용했던 한국 정부도 유죄다. 위안부 문제를 그저 분풀이 도구로 삼는 사람들도 모두 유죄다. 무엇보다 서로 자신의 색안경만 옳다고 고집한다면, 반일과 혐한의 극단적인 악순환은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다.


 

1)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 2심 판결 전문은 박유하 씨를 통해 열람하였습니다.


2)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 1심 판결 전문

- http://parkyuha.org/archives/5769


3) <제국의 위안부>의 비판적 독해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제언
-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6682144


4) 타협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10106.html


4)에 대한 박유하 씨의 반박이자 어쩌면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의 발단, ‘우경화’ 원인 먼저 생각해봐야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2769


5) 서경식, “일본 우경화에 리버럴 세력도 책임 있다”
-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0149


6) 주변 서사는 없다
- http://ch.yes24.com/Article/View/34137/


7) 1996년,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에게 전달된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의 사죄 편지와 보상금은 일본 내 진보 세력과 우익 세력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의 권위지 아사히(朝日)신문은 ‘사과와 반성이라기보다 국가의 책임을 피하려는 것’이라고 일본 정부를 비난한 반면 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산케이(産經)신문은 ‘일본 역사에 대한 모독’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 관련 기사 원문: http://news.joins.com/article/3313218

 

 

※ <제국의 위안부> 요약본과 삭제판 전문은 현재 아래 주소를 통해 누구든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 http://parkyuha.org/download-book

 

 


 


 

 

제국의 위안부박유하 저 | 뿌리와이파리
식민지 체험과 그 체험이 만든 갈등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던 책은 뜻밖에도 우리가 여전히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살고 있음을 보여준, 지극히 아이러니한 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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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색안경 #위안부 #반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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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만화가)

영화 <분노>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자기 생각을 일단 글로 쓰는 놈이야.” 영화 속 형사들이 발견한 살인범의 결정적 단서였는데, 제 얘긴 줄 알았지 뭡니까. 생각을 멈추지 못해 거의 중독 수준으로 글쓰기에 열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술을 먹습니다. 틈틈이 애랑 놀고 집안일도 합니다. 마누라와 사소한 일로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가끔 만화도 만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