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이한열의 타이거 운동화 – 가리워진 길

영화 <1987>에서 타이거 운동화는 로맨스의 매개물로 그려진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열사와 관련한 모든 것을 신화화 하려는 엄숙주의 앞에서, 나는 다시 이한열기념관에서 느꼈던 기묘한 서글픔을 마주했다. (2018. 01. 08.)

1.jpg

        복원되기 전, 이한열 열사의 타이거 운동화. ⓒ (사)이한열기념사업회
 

 

* 영화 <1987>(2017)의 내용이 언급됩니다.
 
홍대입구 근처에 살던 시절, 산책을 할 때면 나는 경의선 옛 철길 부근으로 걷곤 했다. 걷다 보면 이희호 여사가 아직도 지내고 계신 김대중 대통령 가옥도 나오고 김대중기념도서관도 있고 이한열기념관도 있었다. 산책의 어느 날 무심코 끌리듯 들어간 그 기념관은 작고 소박했다. 그 시절의 20대 초반 청년이 흔히 입고 쓰고 보았을 법한 일상적인 물건들 속에 둘러싸여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대부분의 위인이 쓰던 유품이 그렇듯, 지극히 일상적인 소품들은 그 주인의 숭고한 죽음을 통해 영원의 가치를 얻는다. 그가 열사의 칭호 대신 나처럼 적당히 타협도 하며 30대에 진입하는 삶을 얻었더라면, 물건의 수명이 다 하는 대로 진작에 폐기되고 다른 물건으로 교체되었을 법한 물건들. 나는 열사가 신었던 타이거 운동화 앞에서 잠시 서성였다. 그 유명한 타이거 운동화는, 아직 복원되기 전이었던 터라 쥐면 바스라질 것처럼 훼손된 상태로 전시 중이었다.
 
영화 <1987>에서 타이거 운동화는 로맨스의 매개물로 그려진다. 강동원이 연기한 이한열 열사는 명동 미도파 앞 시위에 휘말려 백골단에게 끌려가던 연희(김태리)를 도와 도망가다가 신발 한 짝을 잃는다. (그가 이한열을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고 극장을 찾은 이들은 이미 그 장면에서 한 차례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는다. 그러나 미도파는 연세대 정문이 아니고, 우리는 다가올 비극을 알면서도 그 장면을 아린 마음으로 견뎌낸다.) “에이, 안 돼. 이대로 나갔다간 바로 걸려.” 두 사람을 숨겨준 신발가게 주인(황정민)의 말에, 초면의 연희가 냉큼 제 지갑을 열어 사준 신발이 바로 문제의 타이거 운동화였다. 적잖은 사람들이 이 설정에 분노했다. 연희를 ‘고작 로맨스 때문에 운동에 결합하는 존재’로 묘사한 게 아니냐는 지적은 그럴 수 있다 싶었는데, 이한열 열사의 상징이 되어버린 유품을 그렇게 가벼운 내용의 도구로 활용하는 게 부적절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많았다.
 
열사와 관련한 모든 것을 신화화 하려는 엄숙주의 앞에서, 나는 다시 이한열기념관에서 느꼈던 기묘한 서글픔을 마주했다. 그 시절, 스러져 간 많은 청춘들이 죽거나 다치는 걸 각오하고도 싸움에 나선 건 역설적으로 제대로 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한열 열사가, 박종철 열사가, 김경숙 열사가, 전태일 열사가, 이석규 열사가, 노수석 열사가 채 건너오지 못했던 20대를 건널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한다. 살아서 승리하고, 나이 먹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서툴게 첫 데이트도 하며, 한참 유행하던 운동화를 선물로 주고 받는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너무 낡고 헤져서 더 이상 신을 수 없게 되면, 보존하여 전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흔히 그러듯 아쉬운 마음으로 버리고 새 운동화를 사는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어쩌면 로맨스의 매개가 된 타이거 운동화는, 열사들이 채 살지 못했던 삶, 미처 가보지 못해 가리워진 길들에 영화가 보낸 위로가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오늘의 책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전작에서 질병의 사회적 측면을 다룬 김승섭 교수가 이번에는 의학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찰했다. 의학도 다양한 이해 관계가 경합하면서 만들어진다. 이 책은 몸을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담론을 소개하는 한편,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올바른 인식의 가능성을 고민했다.

'영혼의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신작 소설!

진정한 내면 탐구를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히피 여행'을 떠난 파울로는 우연히 카를라를 만나 함께 네팔 카트만두행 ‘매직 버스’에 탑승하며 두번째 히피 순례를 시작한다. 버스 안에서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길동무를 만나고, 마법 같은 인생의 진리를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평범한 다정 아저씨의 특별한 한 가지

키도, 얼굴도, 옷차림도 평범한 다정 아저씨에게 조금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길다는 거죠. 다정 아저씨는 왜 머리카락을 기를까요?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특별함을 지키는 용기와 따뜻한 나눔의 마음이 담긴 그림책입니다.

2019년, 투자의 기회는 다시 올 것인가?

대한민국 3대 이코노미스트와 인기 팟캐스트 <신과함께>가 함께한 경제 전망 프로젝트. 세계 경제의 흐름부터 부동산 및 주식시장, 금리와 환율 등 자산시장의 변화를 분석 전망하고, 다가올 거대한 변화 속 투자의 기회와 대응 전략을 제시한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KALIOP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