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나의 관계는 언제나 고민거리였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은 이후 ‘세상’과 ‘나’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세상을 우선하면 이타주의이고, 나를 우선하면 이기주의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나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 마치 죄를 짓는 듯한 마음이 들어 자기 자신을 버리다시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세상을 위해서 나를 잊고 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를 찾고 싶은 욕구는 강해져만 갔다. 마치 자신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정신없이 살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비로소 시선이 자기로 향하는 현상은 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자아, 그리고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한 정신사를 갖고 있던 나에게 미셸 푸코의 마지막 강의는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주체의 해석학』은 푸코가 그의 말년인 1981~1982년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를 모은 책이다. 푸코는 이전까지 다양한 사회적 기구에 대한 비판, 특히 정신의학, 의학, 감옥의 체계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왔다. 특히 『감시와 처벌』을 비롯한 1970년대의 저술들은 권력의 문제를 지배의 관점에서 다루어왔다. 그러던 푸코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윤리적 주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우리가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점검과 자기 수련을 거쳐 만들어진 ‘윤리적 주체’에 의한 새로운 실천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푸코가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의 강의에서 집중한 것은 주체와 진실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푸코는 먼저 ‘자기 배려’ 개념을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 배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행위”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이 자기 배려와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자신을 망각하지 말고 돌보며 배려해야 한다는 말로 푸코는 해석한다. 그래서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는 소크라테스가 인용했던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과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자기 배려
푸코에 따르면 자기 배려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보편적 태도다. 여기에는 사물을 고려하는 방식, 세상에서 처신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 등이 포함된다. 그러니까 자기 외부에 있는 타인들 혹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의미한다.
둘째, 시선의 이동이다. 자기 자신을 배려한다는 것은 시선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이동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선을 외부와 타인, 세계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 돌리라는 것이다. 나의 시선이 외부로 향해 있으면 많은 것들과 부딪히게 된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 혹은 미움, 경쟁심, 질투와 욕망 같은 것들에 관심이 가게 되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관심이 분산되어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어렵다. 시선을 나의 내부로 이동한다는 것은 시선을 분산시키는 많은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나에게로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기 배려는 나에 대한 집중이다.
셋째, 자신을 향해 행하는 여러 가지 행위를 가리킨다. 이 행동들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변형하고 정화하며 변모시킨다. 젊은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라고 설교한 소크라테스 이래로 그리스ㆍ헬레니즘ㆍ 로마 시대의 철학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자기 배려를 중시했던 긴 역사가 있었다고 푸코는 돌아본다. 개인들은 자기 수련을 위해 다양한 기술을 사용한다. 명상, 독서와 글쓰기, 영적인 서신 교환, 자기의식에 대한 성찰과 점검, 자기 실천 등. 개인은 이런 기술을 통해 자기를 수련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독서는 명상의 계기를 부여한다.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 독서의 목표다. ‘명상’이란 사유의 자기화 훈련을 의미한다. 이를 거쳐 개인은 진실을 사유하는 주체가 되고 다시 적절히 행동하는 주체가 된다. “자신의 사유를 수중에 간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써서 기록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그것을 독서해야 한다”는 에픽테토스의 말을 푸코는 인용한다. 역시 훈련이며 명상의 요소인 글쓰기에 의해서 독서는 연장되고 자신을 재강화하고 재활성화한다.
고대인들이 던졌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나를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가?”였음을 푸코는 강조한다. 그들이 물었던 것은 자기를 단지 인식하는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행동의 문제였다. 고대인들의 그런 질문은 말과 사유가 아니라, 자신을 변형시키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푸코와 맞닿아 있다.
우리 시대의 자기 배려
고대로부터 자기 배려의 역사를 찾았던 푸코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영혼은 돌보지 않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던 소크라테스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자기를 돌봐야 한다고 말한 푸코의 이야기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는 정언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연마하는 일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본이 되는 일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간과한 채 그 시간을 놓치곤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먹고살기 위한 생존과 경쟁에 파묻혀서 시선을 자기 내부로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생존에 급급하여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그러한 환경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달라진다는 보장이 없다. 놓쳐서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을 기회는 영영 없을지 모른다. 지금 나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돌봄이 없는 삶은 내면의 성장을 제약하여 삶의 기초를 부실하게 만든다. 자기 수련의 과정에서는 단지 미래를 위해 유용한 인간이 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약하는 환경과 평생 동안 싸울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삶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다. 진실된 주체로서의 자신을 만나는 것은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일과 같다.
자기 배려의 노력이 없는 삶에서는 진실한 주체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한 주체가 쏟아내는 말은 진실성 없는 수사에 그칠 수밖에 없다. 자기 배려에 대한 강조가 단지 개인의 인격 수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푸코가 충분히 설명해주었다.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고 돌보며 채워나가는 일은, 세상을 향해 진실한 행동을 하기 위한 재출발점이다. 내가 채워져야 세상이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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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유창선 저 | 사우
환자들은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진보적 시사평론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요즘은 인문학 작가이자 강연자로 살고 있다. 쓴 책으로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