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해와 다르게 명확한 변화의 흐름이 감지되던 한해였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라면 바로 서치모스의 히트. 시티 팝과 블랙뮤직을 뒤섞고 힙스터 감성을 가미해 내놓은 이들의 콘텐츠는 갈라파고스라고 일컬어지는 열도에도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언제까지고 소년소녀들의 디스토션이 지배할 것 같았던 일본 록 신에 큰 균열을 낸 사건 중의 사건이었죠.
더불어 올해 최고의 히트싱글인 다오코(DAOKO)의 '打上花火(불꽃놀이)'를 프로듀싱하고, 기세를 몰아 선보인 앨범 < Bootleg >까지 평단과 대중의 호의를 동시에 획득해 낸 요네즈 켄시의 급부상도 인상적. 보컬로이드 프로듀서로서 커리어를 시작해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솔로 가수로 군림하고 있는 그를 보면, 일본 내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희미해짐과 동시에 그것들이 활발히 섞여 새로운 결과물들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아쉬운 소식도 있었는데요. 바로 아무로 나미에의 은퇴발표입니다. 내년 9월 16일을 끝으로 가수 커리어를 종결하는 그는 마지막 스퍼트를 내며 공연과 앨범 발매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입니다. 아시아 투어도 발표되었건만 한국은 안타깝게도 제외되었네요. 멀리서나마 오랫동안 대중을 위해 한몸 불살라 온 그의 행보를 끝까지 응원하려 합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올해 인상적으로 들은 앨범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매년 말씀드리지만, 이 리스트는 IZM 전체가 아닌 황선업 필자 홀로 선정하는 것으로, 개인의 취향이 다소 들어가 있다는 점 미리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한해 트렌드를 어느 정도 고려하였기 때문에, 아래 앨범들을 들으시면 최근 경향의 윤곽이 대략으로나마 잡히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7번째를 맞는 올해의 제이팝 앨범! 과연 여러분이 들은 앨범은 얼마나 포함되어 있으며 놓친 앨범은 얼마나 될지. 한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서치모스(Suchmos) - < THE KIDS >
네버 영 비치(never young beach) - < A GOOD TIME >
요기 뉴 웨이브스(Yogee New Waves) - < WAVES >
이 세 장은 묶어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올 한 해를 관통했던 '시티팝 리바이벌' 붐은 아무래도 이 삼각편대가 중심이니까요. 올해 페스티벌에 가 세 팀의 라이브를 보고 왔는데, 실제로는 같은 카테고리로 묶이는 게 신기할 정도로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먼저 서치모스. 여기 이렇게 다수의 음반을 늘어놓았지만, 대중성과 파급력을 종합해 딱 한 장만 꼽는다면 이 작품을 꼽을 것이고, 이 작품이어야 하며, 이 작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티팝 리바이벌을 트렌드로 정착시킴과 동시에 본인들을 록스타로 부상시킨 무적의 앨범. 여전히 시티팝과 블랙뮤직의 사이를 지향하면서도, 전보다 뚜렷한 선율 및 록적인 테이스트를 가미해 접근성을 대폭 높였습니다.
펑크(Funk)와 록, 알앤비와 시티팝을 한데 섞고 흔들어 근사한 결과물을 도출해 낸 'stay tune'은 이들의 감각이 절정에 달해있음을 알려주는 파티튠이죠. '기타를 든 소년소녀'의 열정이나 패기와는 달리, 여유를 동반한 도회적인 느낌은 열도의 신에서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새로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제이팝의 미래를 제시한 레트로 명반이랄까요.
그에 반해 네버 영 비치는 좀 더 시티팝의 원안에 가까운 스케치로 자신들의 갈 곳을 그려갑니다. 과거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로우파이 포크를 중심으로 한 전작 < fam fam >으로부터 일신, 해변가를 달리는 듯한 서프 뮤직 스타일의 드라이브감이 발군입니다. 사운드의 공백을 최대한 활용하는 연주를 통해선 기분 좋은 헐거움이 온몸의 긴장을 풀어주며, 공간계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선배 록밴드들로부터 물려받은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의 부유감을 선사하기도 하죠. 온몸으로 부딪혀 삶을 살아내기보다는 어차피 아무것도 없을 세상 되는 대로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다는 이 시대의 청춘상을 담아낸 작품. 그렇기에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good time'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봅니다.
마지막으로 요기 뉴 웨이브스. 1960년대 '일본어 록'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핫피엔도(はっぴえんど)의 음악적 외관을 쏙 빼닮은 이들의 주무기는 바로 로큰롤. 좀 더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소리들이 현재를 메워냅니다. 위 두 팀이 기존의 소재를 비틀고 꼬았다면, 이들은 기본형을 합쳐 다듬어 냈다고 할까요. 신을 변화시킨 트렌드세터 이건만 의외로 정직하고 우직한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입니다. 고독한 도시에서의 삶이지만, 그래도 적극적으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모험기까지. 올 한 해 동안 일본 힙스터들의 독점에 가까운 지지를 받은 이 세 앨범. 놓치지 말아야 할 필수 항목이니 체크!
원 오크 록(ONE OK ROCK) - < Ambitions >
얼마 전 이 앨범을 다시 돌려봤을 때, 사실 좀 놀랐습니다. 연초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의 위화감은 이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사실 전작 < 35xxxv > 때부터 여러모로 말이 많긴 했었습니다. 전보다 차분해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요. 특히 '完全感覺ドリㅡマㅡ(완전감각 Dreamer)'의 광기를 사랑했던 이들은 특히 참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우직하게 밀고 나가 레이블 < Fueled By Ramen >과 계약을 맺고 원하는 바를 보란 듯 펼쳐나갔습니다. 그 결과로서 자리매김하는 본 작품은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일종의 성명서입니다. 모험의 땅에서 소구하던 안정적인 무게감을 획득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체성 또한 확고하게 굳혀나간 원 오크 록 ver 2.0의 완성형. 지금 다시 한 번 들어보신다면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야망을 구현하려 하는 그들의 욕망이 얼마나 거대하고 또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 말입니다.
글림 스팽키(GLIM SPANKY) ㅡ < BIZARRE CARNIAL >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나" ㅡ ビㅡトニクス(Beatniks 중)
일본의 젊은 뮤지션들이 자국의 반세기 전을 반추하며 시티팝에 빠져있을 때, 이들은 자신들만의 가치를 찾아 영미 사이키델릭 사조와 히피들을 쫓아왔습니다. 그들의 세 번째 작품은 그러한 노력과 집념이 완성시킨 일종의 'Flower movement'입니다. 블루스, 사이키델릭, 하드록들을 흡수한 음악 스타일과 일본 쇼와 시대의 정서를 담은 선율.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요소의 동거가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죠.
하지만 이 앨범의 핵심은 결국 메시지. 남들이 하는 것에 휩쓸려 자아를 잃어가는 현세대의 청년들에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가자'라 일갈하며 내면의 여행을 독려하는 이들. 우리의 지상과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와 동시에 아티스트가 자신들의 철학을 견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앨범입니다.
스미카(sumika) - < Familia >
사랑을 통한 공존의 의미와 가치를 담아낸 밀도 높은 팝 록 앨범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록 편성이나 현악 및 건반이 큰 비중을 차지, 남녀노소 모두에게 부담 없을 대중적인 소리들을 들려주고 있네요. 조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타이트한 전개, 단숨에 귀를 붙드는 흡입력 있는 선율엔 '2017년의 팝 음악'이라는 호칭이 부여해야 할 정도입니다. 마치 디즈니 음악을 듣는 듯한 덩치 큰 편곡을 무난히 소화해 내는 것을 보면 더 이상의 역량 검증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유즈(ゆず)나 이키모노가카리(いきものがかり)의 뒤에 붙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보편성. 가만히 듣다보면 기분 좋아지는 것이, 일상에서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고 할까요. 직관적인 작품임에도 귀가 피로하기는커녕 좋은 기운으로 몸을 씻어내는 듯한 삼림욕 같은 작품. 웃지 않는 사람도 웃게 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춤추게 만드는 그들은 진정한 뮤지션!
다다레이(DADARAY) - < DADASTATION >
카와타니 에논의 최근 2년간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와 같았죠.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터진 불륜과 예상보다 이른 복귀. 비난 여론을 잠재울 방법은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게스노키와미오토메(ゲスの極み乙女)와 인디고라엔드(indigo la end), 제니하이(ジェニㅡハイ)라는 세 밴드에서 동시에 프론트맨으로 활약했지만, 하이라이트는 악곡 제작을 총괄한 다다레이에서의 그였습니다.
이들은 퀄리티 있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지향을 목표로 게스노키와미오토메의 큐지츠카쵸(休日課長), 니키(Nikkie)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레이스(REIS), 게스노키와미오토메 및 인디고라엔드의 레코딩/라이브 지원을 도맡고 있는 에츠코가 뭉친 3인조 밴드입니다. 기본적인 음악적 베이스는 게스노키와미오토메와 닮아있으나, 다층적 구성 및 호소력 있는 가창을 통해 보다 농후한 '어른의 팝'을 구현해내고 있습니다. 특히 레이스의 가창은 올해의 발견이라 해도 손색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네요.
인트로와 아우트로가 완벽히 다른 구성을 취함으로써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少しでもいいから毆らせて(조금이라도 좋으니 때리게해줘)', 신스와 미디만으로 시작해 서서히 덩치를 불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대곡으로 탈바꿈되는 '僕のマイノリティ(나의 마이너리티)' 등 곡과 합주, 가창의 삼박자가 콘셉트와 정확히 들어맞는 결과물들로 가득합니다. 이 정도면, 카와타니 에논을 '악마의 재능'의 보유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험프 백(Hump Back) - < hanamuke >
"네가 울었던 밤에, 로큰롤이 죽어버렸어"라는 프레이즈는, 한 해 동안 저에게 가장 큰 울림을 가져다준 한 줄이었습니다. 우연히 클릭해 본 '星丘公園(호시가오카공원)'의 뮤직비디오 한 편으로 저는 밴드의 행적을 쫓기 시작했고, 결국 일본여행 때 이 앨범을 손에 들고 귀국하고야 말았죠. 어른이 되며 잃어가는 것들에 대해 굳이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그래도 로큰롤이 멈추지 않게 계속 노래하겠다는 그 의지. 쓰리피스의 단출한 구성으로, 일견 '파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남김없이 열화하는 능동성. 독자적인 감성과 자유로운 에너지를 겸비한 밴드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꾸준히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신예의 두 번째 미니앨범입니다.
'우리에게 닥쳐올 것은 절망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희망할 수밖에 없다'라는 테마를 전제로 한 울부짖음. 개인적으로는 리걸 리리(リガㅡルリリㅡ)와 함께 올해 가장 주목할만한 유망주였으며, 내년 해산을 발표한 챠토몬치(チャットモンチㅡ)의 뒤를 잇는 여성 밴드의 대표주자 중 한 팀으로 성장하리라 확신합니다.
코레사와(コレサワ) - < コレカラㅡ >
인디신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여성 싱어송라이터 코레사와의 메이저 데뷔작. 트랙들에 담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존재감이 남달라 정말 재미있게 또 인상 깊게 들었던 앨범입니다. "모든 전 남친들에게 바칩니다!"라는 한마디로 포문을 여는 첫 곡 'SSW'엔 좋은 기억이던 나쁜 기억이던 모두 자신의 노래로 만들어가고 싶다는 의지가 한가득. 물론 그 메시지가 콕콕 박히는 것은 그 노랫말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시키는 편곡 솜씨와 좋은 멜로디 덕분이겠죠.
"내가 좋아하는 밴드는 왠지 조금도 팔리지 않아 / 네가 좋아하는 밴드는 전부 엄청 잘 팔려" 라며 서로간의 취향차이를 통해 남녀관계를 풀어내는 '君のバンド(너의 밴드)', 이별 후 연인이 집에 두고 간 담배를 보며 자신을 자책하는 'たばこ(담배)' 등 트랙들의 가사들이 왠지 한 번씩은 느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라 더욱 마음이 갑니다. 뮤직비디오엔 서브컬처 적인 색채를 도입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굳혀나가고 있는 그. 과연 다음에 어떤 감정의 무지개를 흩뿌려놓을지, 이 이야기꾼의 2018년 행보를 일찌감치 기다려봅니다.
폭스 캡처 플랜(fox capture plan) - < UNTITLED >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의 접점을 마련했던 연초 발매작 < Fragile >과는 달리 리얼세션에 집중함으로써 기존 장점을 극대화시킨, 재즈 록 트리오의 최근 작품입니다. 인스트루멘탈이라고 하면 왠지 비대중적인 카테고리로 분류하기 쉬우나, 특유의 응집력으로 생성된 소우주에선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죠. 그 소우주엔 듣는 이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존재하는 게 확실합니다.
사실 이들이 낸 앨범들은 일정한 퀄리티로 하여금 작품마다의 구분점이 명확한 편은 아니나, 이 < Untitled > 만큼은 달라요. 딱 필요한 만큼의 외부요소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원점에 집중하고 있으며, 자유를 매개로 각기 다른 구성을 보여주는 트랙들은 하나의 접점을 위한 구성요소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덕이죠. 몸집을 줄이고 밀도를 높인 결과물로 하여금 이들의 입문작으로 가장 알맞지 않나 싶네요. 현대화된 재즈 록의 세련미를 느껴보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강력하게 추천드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프렌즈(フレンズ) - < ベビㅡ誕生(Baby 탄생) >
시부야의 북적북적함을 떠나 좀 더 편안한 음악을 하자는 의미로 시부야 구에 있는 지명인 신센(神泉)을 따 신센계 밴드라 자신들을 지칭하는 프렌즈의 첫 정규작. 더러브닌겐(THラブ人間) 출신의 보컬 오카모토 에미를 필두로 모두 다른 밴드 활동을 한 적이 있거나 하고 있는 멤버들로 구성, 시티팝과 90's 제이팝을 한데 섞은 퀄리티 높은 음악을 통해 유망주 아닌 유망주로 한해를 장식했습니다.
어떤 장르에도 주눅 들지 않는 오카모토 에미의 보컬을 중심으로, 딱히 범위를 정해놓지 않은 넓은 스펙트럼의 음악들이 펼쳐집니다. 업템포의 시티팝, 현악 중심의 발라드, 트렌드를 머금은 댄스 록, 코러스를 동원한 랩송까지. 이 다양한 스타일이 팀의 이름으로 수렴된다는 사실, 참으로 대단하네요.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음악에서 느껴지는 실연자들의 즐거움이 듣는 이에게도 확실히 전해져 온다는 겁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산전수전 겪어온 멤버들이기에, 그리고 더욱 서로를 배려해 만든 음악들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요. 추운 날씨, 여러분들의 체온을 따뜻하게 덥혀줄 앨범이라 확신합니다.
폴카닷 스팅레이(ポルカドットスティングレイ) - < 全知全能(전지전능) >
'テレキャスタㅡストライプ(Telecaster Stripe)'를 처음 들었을 때가 기억나네요. 예리한 기타커팅에 이은 냉소적인 음색. 그야말로 단숨에 빠져들었죠. 탄탄한 연주력 기반의 감각적인 음악과 모바일 게임의 디렉터로도 활동 중인 프론트우먼 시즈쿠(雩)가 주도하는 콘셉트력의 결합. 이 새로운 밴드의 탄생 공식이죠. 사실 첫인상이 강렬할수록 앨범의 완성도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걱정했는데, 이들은 그러한 우려를 비웃는 잠재력 증명의 수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시이나 링고의 영향이 느껴지는 시즈쿠의 보컬 운용을 필두로, 개인적으로는 주디 앤 마리(JUDY AND MARY)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리프 보단 솔로잉을 적극 활용하는 기타 편곡이라던지, 캐릭터와 세계관을 리드해가는 프론트우먼의 존재감이 확실히 닮아있네요. 그렇다고 음악 스타일까지 유사하지는 않습니다. 가사나 연주 스타일에 있어 자신들의 작법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덕분이죠. 짧다면 짧은 시기에 메이저 데뷔까지 완수, 좋은 뮤지션은 모두가 알아보는 법인가 봅니다.
나카무라에미(NakamuraEmi) - < NIPPONO ONNAWO UTAU(일본의 여자를 노래한다) Vol.4 >
그의 음악을 들으면 정신이 맑게 씻겨 나가는 기분입니다. 어쿠스틱 사운드를 중심으로 진솔히 써내려간 가사엔 과한 양념이나 MSG가 들어가지 않은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나는 덕분이죠. 앨범 제목을 보시면 짐작이 가시겠지만, 일본을 넘어 같은 여성이라면 공감할만한 이야기들이 러닝타임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보컬과 랩을 가리지 않고, 업템포든 슬로우템포든 상관없이, 가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악과 감정을 보여주는 이 싱어송라이터의 재능이 비로소 정확히 제 갈 길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어쿠스틱 기타의 스트로크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와중에 '어른이 정답은 아니지만 무조건 부정하지 말고 그것을 스스로 판단하라'라는'大人の言うことを聞け(어른이 하는 말을 들어)', 혼자만의 자유에 익숙해져 점점 사랑의 설렘을 잃어가는 자신에 대한 회한을 그린 미디엄 넘버 'ボブディラン(Bob Dylan)' 등 면면을 살펴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바닥에 흘린지도 몰랐던 소중한 감정들을 친절히 주워 돌려주는 듯한, '리얼리티 그 자체'라고 칭할만한 삶의 생생한 파편같은 작품입니다.
러브 사이키델리코(LOVE PSYCHEDELICO) - < LOVE YOUR LOVE >
1960년대 포크 록과 사이키델릭을 통해 구축한 오리지널리티로 20년간 사랑받아온 그들. 새시작을 알리고 싶었던 것인지, 이번 작품은 어둠이 걷힌 싱그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어느 때보다도 쟁글쟁글거리는 기타와 밝다 못해 눈부신 선율로 하여금 이국적인 외양은 그대로 남겨 둔 채 여느 때보다도 친숙한 표정을 하고 있네요.
라틴 팝의 기운을 머금은 흐린 날씨의 'Might fall in love'만 지나면, 이윽고 먹구름을 지우는 생기 넘치는 현악 세션의 'Feel my desire', 진한 블루스를 한잔 걸치고 여유를 뽐내는 'Birdie', 중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자유로운 음색의 'Good times, bad times' 등 생명력 넘치는 구간으로 가득합니다. 원숙미보다는 풋풋함이 느껴지는 장수밴드의 경이로운 작품. 과거의 유산이 러브 사이키델리코라는 열매로 여물어가는,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임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펀피(PUNPEE) - < MODERN TIMES >
바야흐로 2057년, 한 노인이 등장해 말합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그 작품이 나왔을 때의 이야기였지" 1950년대의 틴 팬 앨리 스타일의 배경음악이 흐르는 의뭉스러운 미래에서 이 작품은 시작되죠. 그리고 시간을 가로질러, 2017년 봄 술에 취해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래퍼로 시점이 전환됩니다. 펌피(PUMPEE), 2002년 디제이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15년이란 시간을 거쳐 드디어 그가 완성해 낸 첫 솔로작은, 이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로지르는 한편의 '시공 힙합 판타지'로서 일본 힙합사에 한 획을 긋습니다.
무성영화를 연상케 하는 샘플링을 통해 앨범 속에서는 2017년이 '과거'임을 명확히 개념 짓는 자기소개서 'Lovely man'으로 시작. 래퍼의 각성과 신에 혁명을 일으킨 그 장면들이 장대하게 펼쳐집니다. 그리고 다시 이 앨범을 듣는 노인의 시점으로 돌아와, 결정되어 있는 미래라고 한들 그곳으로 나아가야만 하며 괴로운 과거라도 훗날 조금만 시점을 바꿔보면 결국 그건 멋진 'Oldies'로 우리들 곁에 남아있으리라는 확신을 던져주죠. 마치 이 작품이 미래에 받을 평가처럼 말입니다. 우상이라 언급한 노츠(Nottz)를 상기하게 하는 우직한 비트, 시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샘플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영화에 가까운 서사. 이 정도 퀄리티의 음반이 나왔다는 건, 일본 힙합이 메인스트림에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암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장르적으로도 콘셉트 앨범의 측면으로도 흠집을 찾기 힘든 마스터피스!
챠이(CHAI) - < PINK >
이들의 캐치프라이즈는 바로 NEO(New Excite Ona(女) Band). 거적 데기 같은 분홍색 의상과 한껏 과장된 색조 화장으로 장식된 네 멤버의 외견은 생경함과 기대감의 중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콘셉트로 음악적 단점을 덮으려는 얕은수는 아닐지 걱정스러운 마음과 함께 음반을 재생하는 순간, 그야말로 알록달록한 '네오 카와이 월드'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모든 악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언어를 16비트의 속도로 치고받는 핑퐁게임 'NEO'를 듣는 순간 정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이건 이전까지 체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새로운 무언가'였거든요.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가'를 정립하는 것이 밴드의 제1목표라면, 이들은 이미 이를 초과 달성했다 싶었어요.
단어가 주는 어감에 집중해 생동감을 부여했고(이 지점에선 장기하와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외모지상주의를 일침하며 '우리 모두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자'라는 테마도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실로 절묘한 균형감이네요. 마침 다음 달에 한국을 찾는다고 하니 공연장을 방문해 볼 생각입니다. 음악을 듣고 맘에 드신 분들이라면, 저와 함께 하시죠.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