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은 제목 때문에 인간 본성에 관한 책일 것으로 생각했다가 막상 읽기 시작하면서 당황하는 사람이 많다. 아렌트는 “인간 조건은 인간 본성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제목에서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인간은 조건 지어진 존재’라는 의미다. 아렌트는 삶- 세계성 - 다원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전제하고 그에 상응하는 인간 활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이 세 가지 조건에 상응하는 인간의 세 가지 활동이 각기 노동(labor) - 작업(work)- 행위(action)다. 그런데 생존과 욕구 충족을 위한 ‘노동’,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위한 ‘작업’만으로는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한다. 여기서 아렌트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꼽는 것이 정치적 활동을 의미하는 ‘행위’다.
그런데 폴리스가 있었던 고대와 달리, 근대에 들어서는 인간 활동에서 노동과 작업만 남게 되었고, 행위는 사라져서 ‘정치적인 것’의 쇠퇴를 낳았다. 아렌트는 이를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인간들이 생존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결과로, 이로써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제는 자유를 말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래서 아렌트는 ‘행위’를 통한 정치적인 것의 부활, 그리고 정치적 사유 능력과 실천 능력의 복원이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호소한다.
정신적 삶과 정치적 삶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관조적 삶이 아닌 활동적 삶을 강조했다. 활동적 삶이란 곧 정치적 삶이다. 아렌트는 말기의 저작들을 통해 그러한 삶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정신적 사유로부터 찾는다. 『정신의 삶: 사유』가 출간되었을 때 많은 사람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저작들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비정치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이전 저작들과의 단절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활동적 삶을 말하던 아렌트가 정신적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한 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성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절멸에 나섰다가 도주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아렌트는 직접 재판을 참관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낸다.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어떤 특별한 인물이 아니었다. 말도 잘 못하고 생각도 없는 그를 보면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발견한다. “아이히만이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 중 한 사람이 된 것은 순전한 무사유(無思惟) 때문”이라는 것이 아렌트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생각할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여기서 아렌트의 관심은 아이히만 개인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정치적 삶을 말했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무사유의 인간이 가져오는 참혹한 결과에 주목했고, 이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유의 세계를 말하게 된다. 아렌트의 마지막 저작 『정신의 삶』은 정치적 삶과 정신적 삶을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하지만 1부 ‘사유’, 2부 ‘의지’, 3부 ‘판단’으로 기획되었던 『정신의 삶』은 아렌트가 도중에 사망하면서 미완성으로 끝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전 저작들로부터 『정신의 삶』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사유의 세계에 대한 아렌트의 관심을 일관되게 읽을 수 있다. 그녀가 말한 정치적 삶은 내면의 정신적 삶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음미해보자.
고독한 사람은 혼자이며 그래서 “자기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고독 속에서 나 자신과 함께 “나 혼자” 있으며, 그러므로 한 사람-안에-두 사람인 반면, 외로움 속에서 나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실제로 혼자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 모든 사유는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며, 나와 나 자신의 대화이다. 그러나 한 사람-안의-두 사람이 전개하는 대화는 같은 인간들과의 접점을 잃지 않는다. 내가 사유의 대화를 함께 이어가는 동료 인간들이 이미 나 자신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사유는 비판이고 행동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한 사람-안의-두 사람’의 사유의 대화는 결국 ‘나’와 ‘자아’ 사이의 대화다. 아렌트의 이 같은 생각은 소크라테스에서 기원한다. 소크라테스는 타인과 함께 사는 일은 자신과 함께 사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주는 교훈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아는 내가 헤어질 수 없고, 내가 떠날 수 없으며, 나와 함께 밀착된 유일한 인격체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기 위해 나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전 세계와 불일치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정치의 약속』)
마지막에 인용된 “하나가 되기 위해 나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전 세계와 불일치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말은 플라톤이 『고르기아스』에서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자기 자신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자기 자신과 모순을 일으키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철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아렌트는 소크라테스가 긴박하고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폴리스의 삶에서 아테네의 시민들을 친구로 만들고자 설득했던 철학자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모두가 생존의 경쟁에 매달리는 오늘날, 타인과의 사랑을 복원시키기 위한 활동적 삶을 말했던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와 닮은꼴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마지막 문장과 『정신의 삶』 첫 문장에서 반복해서 로마 철학자 카토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인간이 혼자 고독 속에서 하는 사유는 결국 활동적인 삶으로 연결된다는 의미다. 아이히만 재판을 통해 무사유의 위험성을 인식한 아렌트는 “사람들은 무사유가 일상화된 곳에서는 고찰을 통해 비판하는 계기를 갖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오직 사유하는 사람만이 기존의 질서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고 기존 질서의 규칙과 다른 새로운 규칙을 제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한나 아렌트의 말: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그러니 사유는 비판이고 행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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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유창선 저 | 사우
환자들은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진보적 시사평론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요즘은 인문학 작가이자 강연자로 살고 있다. 쓴 책으로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