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책장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 든 생각은, 나는 평생의 시간을 쓸 법한 책들을 가졌다는 것이다. 우주적 돌발 상황이 발생해 작은 방 그대로 큐브 모양의 비행선이 되고 그 속에 갇혀 지적 생명체를 만날 때까지 시공간을 따라 헤매야 한대도 딱히 심심하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다. 평생을 바쳐도 채 이해하지 못할 책이 수백 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책을 고르는 것은… 다 사은품 때문이다.
‘사은품을 사니 책이 따라왔어요.’라는 농담처럼 요즘 책을 사면 주는 사은품은 실로 마음을 뺏길 만큼 잘 만들어졌다. 초창기 책 사은품은 그것이 책에 소용되는 물건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책갈피가 사은품의 주종목이었던 점이 그렇다. 가끔 책 커버도 등장하곤 했지만 판형의 다양성 때문일까 인기 있는 사은품이 되지 못했다. 당시는 홀대 받던 책 커버가 요즘 전자책 디바이스 케이스로 다시 태어나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사은품이 된 것은 참 재미있다. 사은품은 책에 소용되는 물건에서 책 읽는데 관련 있는 것들로 그 범주가 점점 커졌다. 책을 담을 수 있는 에코백, 독서 쿠션, 독서하며 켜두는 향, 무릎에 덮을 담요까지.
책의 다른 쓸모를 재치 있게 활용한 굿즈들이 사은품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책이 때로는 냄비 받침이나 목침대용으로 쓰인다는 데서 착안한 사은품들이 화제가 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사은품을 구상해보면 문이 닫히지 않도록 받쳐두는 도어 스토퍼나 모니터 높이를 조정하기 위한 받침대를 책 모양으로 만들 수 있겠다. 책 속에다 비상금을 숨겨놓는 사람이 많은 만큼 책장에 꽂아두는 책 모양 개인금고도 가능할 법하다.
책과 관계 있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운 사은품도 가끔 나타났었다. 책 제목에서 따와 양은냄비를 끼워 준 경우나 문어에 대한 논픽션에 문어과자가 따라온 적도 있었는데, 실없는 농담으로 여겨지거나 책 사은품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기만 했다. 여전히 책과 관련이 있는 편이 독자나 서점이나 출판사나 마음 편한 것 같다.
어떤 책은 마치 나만이 다녀온 비밀의 여행지와 같아서, 떠올리면 계절을 움직여 순식간에 공간과 공기를 뒤흔든다. 여행지의 길 잃은 골목에서 문득 만난 작은 가게 같은 구절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이와 손짓으로 나눈 공감이 담겨있다. 서너 번이나 돌아보다 못해 뒷걸음질로 걸으며 게이트를 지난다. 돌아올 적에는 냉장고에 붙일 작은 마그넷이나 머그컵이라도 꼭 하나 사오고 싶어지는 그런 여행 같은 책이 있다.
책과 관련한 좋은 사은품이라면 이런 마음에 닿은 것일 거다. 실용성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굿즈는 쓰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기 위해 사는 것이니까.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그곳’이 되어 있는 책을 찾아내 담아낸 것이라면 충분하다. 설령 고통스러웠던 순간이라도 삶의 한 순간이 된 책을 반영한 것이라면 누구라도 갖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맨큐의 경제학 표지를 담은 에코백이라거나 곽윤직의 민법총칙 표지를 딴 전자책 케이스는 어떨까?
그러나 다른 어떤 사은품보다 책에 대해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시간이다. 책 한 권을 사면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두 시간 남짓의 시간을 받는다면 참 좋겠다. 갑자기 책 표지로 랩핑된 버스 한 대가 눈앞에 나타나는 거다. 방금 산 그 책을 읽을 시간을 준다며 맨인블랙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반강제로 안락의자를 내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면 요원들이 대신 빈 상품을 채우고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는다. 만화가라면 러프에서 선도 따준다.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오고 소고기무국도 끓여 놓는다.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짧게나마 온전히 책 읽기에 몰두할 수 있도록 조급하고 바쁜 하루를 강제로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간을 두 시간이나 끼워준다면, 도서정가제 위반이겠군요.
고여주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라는 변명 아래 책과 전자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작년부터 알코올 알러지를 앓고 있는데 개가 똥 알러지 같은 소리라는 핀잔만 듣고 있습니다. 고양이 4마리, 개 1마리와 살며 책에 관한 온갖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