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뉴저지 주 패터슨 시의 버스 기사다. 출퇴근을 반복하다 보니 평일은 대체로 일상적이다. 아침 6시가 지나 일어나 콘플레이크를 먹고 곧장 버스 회사로 향한다. 고정 노선을 따라 정해진 시간 동안 운행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와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를 준비한 저녁을 먹는다. 마빈으로 부르는 개의 산책도 잊지 않는다. 그 참에 패터슨은 단골 바에서 맥주 한 잔으로 동네 사람들과 담소도 나눈다. 별거 없어 보이는 삶인 것 같아도 그에게는 나름 특별한 일과가 있다. 버스를 운행하기 전 운전석에서, 잠을 자기 전 집의 지하 서재에서 짬을 내어 일상에서 얻은 시상(詩想)으로 노트에 시를 적는다.
짐 자무시 감독이 ‘시를 쓰는 버스 기사’를 주인공을 한 <패터슨>을 만든다고 했을 때 설정이 너무 근사해 적잖이 흥분했다. 일상의 기호 중 하나인 ‘버스’와 특별한 행위로 간주되는 ‘시’를 엮은 아이디어 자체가 내게는 또 한 편의 시로 다가왔다. 영화를 본다기보다 시를 느낀다는 감각이 우선해서 짐 자무시의 작품은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이다.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짐 자무시는 일상의 풍경을 시(적)으로 승화해 영화를 만드는 데 도가 텄다. 이전 작품들을 소환할 필요 없이 <패터슨>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시와 같은 순간, 혹은 시적인 감흥과 같은 경험은 특별한 것 같아도 조금만 예민하게 오감을 작동하면 우리 주변에 산적해 있다. 패터슨이 쓰는 시(는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현대 시인 론 패짓(Ron Padgett)의 기존의 시를 허가 받아 극 중에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중 영화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는 ‘사랑의 시 Love Poem’은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We have plenty of matches in our house’로 시작한다. 누군가의 집에서는 존재감 없이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성냥(곽)에서 패터슨은 확성기 모양의 로고를 보고 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더 크게 알리려는 성냥의 쓸모를 간파한다.
하루 중 상당한 시간을 버스에서 보내는 패터슨의 표정에는 일상이 지루하게 디자인한 피로감이 묻어나지 않는다. 시선을 달리하여 보는 창 밖의 풍경은 변화가 요동치는 만화경과 같고 정류장마다 들고나는 사람들은 개성을 부여하지 않는 버스 의자와 복도 패턴에 다양한 무늬를 새겨넣는 존재들이다. 패터슨은 버스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사연이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운전석에서의 일상을 놓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에게 일상은 더없이 소중하다. 패터슨이 일상에 시를 부여한 것처럼 시로 넘쳐나는 일상 또한 패터슨을 좀 더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든다. 시적으로 표현하면, 일상을 만드는 건 사람이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 것은 일상이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일상은 미세한 변화를 동반한 반복이 쌓인 결과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면 큰 변화가 없어 보여도 작년과 올해, 10년 전과 지금 등 시차를 두고 돌아보면 달라진 면모가 확연하다. 물론 변화라는 것은 다름의 범위가 꼭 넓어야지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감각을 잘 단련한 이에게는 매일 매일이 다른 하루다. 짐 자무시는 일상의 감각을 쌍둥이의 존재와 연관 짓는다. <패터슨>에는 일란성 쌍둥이들이 눈에 밟히게 등장한다. 첫눈에 이들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말투나 성격이나 신체의 특정 부위나 미세하게 차이가 발생하고 이것이 곧장 개별성과 연결된다. 같아 보여도 같지 않다. 그게 어디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패터슨과 패터슨. 버스 기사 패터슨과 패터슨 시. 패터슨이 버스 회사로 출퇴근할 때마다 지나치는 터널의 벽에는 ‘PATERSO’, 그러니까 ‘N’이 빠진 도시의 이름이 낙서로 적혀 있다. 그 ‘N’을 채워주는 것이 패터슨과 같은 시민들이면서 상호보완적으로 도시에 영혼을 불어넣는 시의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공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보완한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고 공간은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에 맞게 변화한다. 인간과 공간의 관계 또한 쌍둥이와 같다.
짐 자무시의 영화 속 풍경은 그림 엽서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시야가 훤히 뚫리는 대자연이라든지, 휘황찬란한 건축물이라든지 화려한 볼거리는 쏙 빠져 있다. 스크린이 무엇인가로 잔뜩 채워져 있는 게 아니라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다. 짐 자무시의 영화를 글이라고 했을 때 여백 같은 화면은 줄과 줄 사이의 행간이다. 이를 채우는 건 보는 이의 해석이다. 해석은 다양성을 만들고 다양성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며 그럼으로써 공간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이게 바로 시다.
삶의 변수가 끼어들 것 같지 않은 패터슨에게 사건이라고 할 만한 큰일이 터진다. 아내 로라와 함께 외출하고 돌아오니 마빈이 시 노트를 마구 물어뜯어 조각조각을 내놓았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패터슨의 얼굴에서 혼이 싹 빠져나간 듯 망연자실한 표정이 역력하다. 위로하는 아내를 안심시키려 태연한 척하던 패터슨은 로라가 부재한 틈을 타 마빈에게 “난 네가 밉다”고 혼잣말로 타박한다. 평일 근무를 마치고 꿀맛 같은 주말 휴식을 맞이하려던 패터슨은 거대한 세계 하나가 없어진 기분이다. 화를 삭이려 벤치를 찾은 그의 옆에 패터슨 시 출신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흔적을 찾으러 왔다는 어느 일본인(나가세 마사토시)이 동석한다. 일본인은 패터슨에게 새로운 노트를 선물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주말을 끝내고 다시 월요일을 맞이한 패터슨은 어떤 시로 새로 받은 노트를 채워갈까. 확실한 건 지난주에 썼던 시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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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iuiu22
2017.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