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후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만화가 되었고 만화 같은 세상은 다시 그의 시가 될 테지만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래픽 포엠 『구체적 소년』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책을 냈는데요. 시와 만화의 만남은 어땠나요?
결과가 궁금해서 진행했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측이 어려웠어요. 기획하신 편집자분의 노력이 있었고, 노키드 작가님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내용을 나눴어요. 전적으로 제가 작가님에게 맡겼다는 기분이 들지만요. 결과는 아주 흡족하고, 시와 만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책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평소에 만화를 즐겨 보나요? 기억 속의 만화에 대해 들려주세요.
어렸을 땐 동네의 늙어 보이는 형과 함께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만화책을 빌려 보았어요. 미성년자는 빌릴 수 없던 이토 준지의 만화책을 빌리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유독 스포츠 만화를 좋아했는데 그들만의 치열함과 열정, 승부를 띄우는 장면들에서 희열을 느꼈어요. 좋아했던 만화는 『슬램덩크』가 단연 일등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어판을 따로 찾아볼 정도였거든요.
이미지를 바로 들여다보는 만화와 이미지를 상상하게 하는 시는 어떤 면에서 같고도 다를까요?
대사와 장면의 간극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만화 속 명대사들이 시적으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고, 다음 장면을 위해 페이지를 넘길 때 그 순간 상상해보는 이미지의 간극이 시에도 있다는 점이 비슷해요. 마사시 다나카의 『곤』 같은 경우는 대사 없이 장면만 묘사되어 있는데, 적당한 좌표만 주고 상상에 맡기는 쪽의 만화도 좋아해요. 그런데 만화는 가장 만화다울 때 좋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시와 맞닿아 있다고 여기는 만화가 있나요?
어쩌면 모든 만화가 시적이고, 모든 만화가 시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시적인 것을 빌미로 그리게 되는 만화들이라면 모를까요. 권혁주 작가님이 연재했던 『움비처럼』도 그런 만화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작업에 영감을 준 만화가 있다면요? 시니&혀노의 『죽음에 관하여』를 들 수 있겠네요. 시적 세계를 관통하는 영감은 아니었고, 아주 일시적인 영감이었지만 그 여운은 오래갔던 것 같아요. 유머러스하기도 하면서 과하지 않게 우리가 닿아본 적 없는 세계를 매끈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내가 가진 언어로도 그렇게 도약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인으로서 만화를 좋아하는 것이 도움이 되나요?
많은 장르가 약한 연결이 되어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러나 그게 닿아서 더 좋아질 수도 있지만, 각각의 다른 장르가 가지는 개별성을 느낄 때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창작자가 자신만의 기준으로 무엇을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이건 만화라서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건 시라서 가능한 것이라는 구분이 재미의 요소 아닐까요?
만화 외에 좋아하는 것들, 일상에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거대한 자본에 맞춰 흘러가는 결과물도 나쁘진 않지만 사이사이 뚜렷한 세계관을 가지고 태어나는 많은 정체성에 주목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독립 출판물이나 스타트업 브랜드, 새로운 플랫폼이나 소소한 굿즈 같은 것들이죠. 이런 것들을 샅샅이 찾아보고 구경하기를 즐깁니다. 이런 행위의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평소 직접 그린 이미지나 사진들을 넣어서 엽서도 만들고 에코백, 옷도 만들어요.
만화를 좋아하고 만화방을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요. 그들에게 만화는 무엇일까요?
오늘의 우리에게 만화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가 만화를 권장하는 사회였다면 지금의 만화방 풍경은 보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어요. 공부와 별개로 ‘딴짓’으로 분류되던 만화의 즐거움을 다시금 자유로이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일시적으로 ‘해방감’을 부여하는 공간으로서 만화방을 찾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아요. 저는 만화를 ‘읽는 것과 보는 것이 곁들여진’ 고급 읽기의 한 부류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하게 될 작업들에 대해 미리 좀 알려주세요.
첫 시집을 낸 후 책이나 행사를 통해 다양한 작업을 해보았어요. 시인에게 시를 기대하는 것이 좋은 보람이라면, 다른 장르와 협업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는 것은 제가 시가 아닌, 세상에 기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많은 구멍을 통과해 맺히는 단 하나의 물방울은 시가 되면 좋겠어요. 이런 여과를 위해서 다양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독립 출판사 아침달과 함께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고, 글 쓰는 삶에 관한 일기를 주제로 산문집도 준비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가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여정 속에 또 새로운 것들을 만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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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소년 서윤후 글/노키드 그림 | 네오카툰
이 책에는 서윤후 시인의 첫 시집에 수록된 시 10편과 미수록 시 10편을 담았다.
기낙경
프리랜스 에디터. 결혼과 함께 귀농 했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해 빡세게 적응 중이다. 지은 책으로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시골은 좀 다를 것 같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