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0일, 서교동에 위치한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신간 『기호와 기계』 서평회가 열렸다. 이탈리아 출신 철학자인 랏자라또는 1980년 프랑스로 망명해 『부채인간』, 『사건의 정치』 등의 저서를 펴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서평회는 『기호와 기계』 번역을 맡은 심성보 역자의 사회 아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이준형,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 운영자 정한별, 인문학협동조합 총괄이사 오영진 세 사람의 발표로 시작했다. 본격적인 서평에 앞서 역자는 『기호와 기계』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기호와 기계』는 원래 단행본으로 기획된 책이 아니라, 랏자라또가 프랑스 사회의 사건을 관찰하고 연구하며 적은 모음글입니다. 저자가 워낙 다양한 분야, 다양한 사건과 이론을 다루기 때문에 책을 단순화해서 소개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요약해 보자면, 『기호와 기계』는 크게 두 가지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고요. 다른 하나는 비판이론가, 넓게 보면 좌파 이론가에 대한 비판입니다. 지젝, 버틀러, 바디우, 랑시에르와 같은 이론가들이죠. 국내에서는 이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거의 없었기에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심성보 역자는 서평문을 발표해줄 세 사람을 소개했다. 그리고 첫 발표자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의 이준형이 나섰다. 그는 기표적 기호계와 비기표적 기호계를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정리해 나갔다.
이준형 : 기표적 기호계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의 방식을 통한 복종으로 주체화가 이루어집니다. 반면 기계적 배치로 이루어지는 비기표적 기호계의 작동을 저자는 예속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속이란 의식을 거친 명령이 아닌, 기계 일부처럼 배치되어 흐름 속에서 지배하는 기제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저자는 비판이론가들이 상정하고 있는 언어의 근원적인 위치를 비판합니다. 언어 이외에 비기표적 기호계의 예속적 효과 역시 주체성 생산에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말하면서요.
랏자라또는 비판이론이 복종적 주체화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을 전복하고 예속적 과정들, 실존적 과정들을 들추어내고 그에 대한 분석을 요청했습니다. TV와 영화를 예로 들며 TV는 담론적이고 언어적이라면, 영화는 실존적인 매체에 가깝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은 여전히 책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어적인 것, 의식을 거치는 것이 아닌 다른 기호가 있다는 지적을 여전히 책과 언어, 그러니까 기표적 기호계를 통해 표현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지적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과 같은 다른 분야와 조응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발표자는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의 운영자이자 카이스트 대학원 박사과정의 정한별이었다. 그는 주로 과학과 관련해 저자의 서술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정한별 : 랏자라또가 비기표적 기호계 얘기를 하면서 과학을 많이 예시로 듭니다. 저는 이런 예시가 적절치 않은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언어를 비기표적 기호계로 본다는 것은, ‘과학의 모든 이론은 합의다.’라는 가정이 깔려있거든요. 예를 들어, ‘힘’이라는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과학자들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합의를 해서 F=ma라는 공식을 만든 것이다, 라고 보는 것이죠.
하지만 실체가 없는데 과학자들이 자연으로부터 언어, 혹은 개념을 잡아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과학을 비기표적 기호계로서만 바라본다는 것은 과학자의 주체성을 과학으로부터 분리해내는 행위와 다를 게 없어요. 기계와 기술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그 속성을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랏자라또가 차용해온 멈포드의 ‘기계’는 단순히 수사적 개념으로의 기계가 아니라 물리적 실체로서의 존재이기도 하거든요. 저자의 기계와 기술에 대한 사유가 산업시대에서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마지막 서평자는 인문학협동조합 총괄이사인 오영진 평론가였다. 그는 먼저 저자가 사용한 ‘기계’라는 용어에 관해 설명했다.
오영진 : 먼저 환기를 드리고 싶은 것은, 저자가 말하는 ‘기계’는 흔히 말하는 기계적이라는 표현과는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계라는 것은 기계들(machines)입니다. 기계와 기계의 환경, 그리고 환경의 흐름까지도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통상 쓰는 기계적이라는 말과는 오히려 반대죠. 기계의 생명력을 설명하는 단어에 가까워요.
우리는 기계적 환경에 예속되어 전 지구적 에너지와 정보의 흐름을 매개하는 주체성을 획득합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주체성은 전 지구적 대량생산의 산물”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기계와 예속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기호와 기계』는 푸코의 장치론에 대한 랏자라또의 보강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속을 통한 새로운 주체성의 가능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언어는 고유성과 잉여성이 존재하지만, 언어는 잔여물을 남기지 않는다.
오영진 : 콜 센터 통화를 생각해 보세요. 직원은 로봇처럼 매뉴얼화된 친절한 인격을 연기할 뿐이죠. 언어의 맛을 느낄 수 없는 비인간적인 대화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비인간성은 저주이면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잉여성이 없기 때문에 나는 더 매끄러운 존재가 될 수 있어요. 매끄러운 주체성을 가진 나는 뜬금없는 것들과도 접속할 수 있거든요. 저자가 말하는 비기표적인 행위의 가능성은 무수한 많은 접속의 가능성과 그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탈구해내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0분의 휴식을 가진 뒤, 서평 발표자들과 청중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소규모 서평회였기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다.
랏자라또가 모순된 두 생각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철학에는 구성주의적 관점, 실재론적 관점이 있다고 보면 랏자라또는 과학의 관념, 이론이 합의에 따라 도출되었다는 점에서 주로 구성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에서 활용하는 다이어그램, 수식 등을 비기표적인 기호계로 본다는 점에서는 실재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즉, 과학 자체에 대해서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가지면서도 가따리의 기호계 논의로 들어오면서 과학의 도구를 비기표적 기호로 대응시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합니다. 둘 중 하나의 관점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방식을 취하는 것이 실제 과학에 가까운지 정한별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정한별: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과학과 기계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가 하는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오영진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매끄러운 인간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약간 이해가 돼요. 숫자라는 것이 가장 매끄러운 것 중 하나잖아요. 그런 걸 강조하는 서술을 하려다 보니 그런 모순이 발생한 것 같아요.
저로서도 한쪽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나쁘게 말하면 취사선택이지만, 양쪽이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디까지 실재론적 입장이고 구성주의적 입장인지 선을 그어줬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성보: 제가 약간 보충을 하자면, 질문자께서는 구성론은 기표적인 것, 실재론은 비기표적인 것으로 생각하신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저자의 의도와 약간 다른 것 같아요. 분석적으로는 구분이 되지만 현실에서는 기표적 기호, 비기표적 기호계가 혼합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거든요.
저자가 사용한 복종, 예속이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가 오갔다.
오영진: 최근에 박경근이라는 분의 1.6초라는 설치미술 작품을 보았습니다. 기계 공정을 1.6초 단축했을 때 기계의 모습을 담은 영상 작품인데요. 회사가 이런 결정을 하니, 공장 노동자들은 난리가 났죠. 그만큼 노동자들이 힘들어지는 것이니까요. 마치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처럼요. 이 예술가가 현장에 가서 그 모습을 보았는데, 오히려 기계는 너무 경쾌하고 신났다는 느낌을 받은 거예요. 현장에서는 너무 비인간적이고 복종의 문제가 생겼지만 말입니다.
공장주와 직원의 관계는 복종이에요. 복종하느냐, 마느냐 혹은 어떤 식으로 복종하느냐의 문제죠. 그런데 우리가 이 사이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기계 자체의 경쾌함입니다. 회사가 1.6초를 왜 단축했을까요? 우리의 수많은 욕망 때문이죠. 사람들의 무의식적이고 네트워크화된 욕망이 그 공정을 당기게 만든 거죠. 그런데 이 이미지를 예술가가 찍어서 재배치하니 부정적인 속성이 사라지고 생기가 가득해졌거든요. 예속, 비인간적인 것의 가능성이 이런 거로 생각해요.
이준형: 복종은 의식적이고, 주체에 작용하고 이데올로기적인 거라고 얘기한다면 예속은 기계적 배치를 통한 자연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오영진: 다른 예가 하나 떠오르는데, 박정희 시기에 학생들이 체벌을 당해가면서 교양 교육을 받았잖아요? 이 교육이 시간이 지난 뒤에 80년대 수많은 운동권 문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결국, 그 토대는 억압당하면서 교양 교육을 받은 효과에서 나온 거거든요. 때려가면서 복종시켰는데 스스로 예속화할 줄은 몰랐던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복종과 예속의 관계를 끊임없이 경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준형 선생님께서 새로운 매체를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배치할 수 있다면 운동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자본이 만들어 놓은 틀을 극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스럽습니다.
이준형: 음악을 예로 들자면, 음악은 단순히 회사나 가수의 소유가 아니죠. 팬들이 다른 식으로 충분히 전유할 수 있어요. 패러디, 팬픽과 같은 방법으로요. 이런 것은 산업이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죠. 산업에만 기대기보다는 대중의 능동적 활용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 자본에 의해 점유가 덜 된 분야들, AR 혹은 VR과 같은 새로운 분야에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영진: 아티스트에게만 그런 걸 기대해서는 안 되죠. 이화여대 학생들이 경찰 앞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른 것과 같은 일이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심성보: 이화여대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른 것은 기존의 운동권에는 낯설죠. 전혀 다른 감응이니까요. 그런 식으로 매체가 운동을 이끌어나가고 창조할 수 있어요. 그리고 랏자라또는 자본이 모든 것을 장악했다고 생각하지는 말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모든 것을 포섭할 수는 없고,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아래쪽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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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기계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저 / 신병현, 심성보 공역 | 갈무리
“자본은 기호로 움직인다.”는 가따리의 주장에 근거하여 “오늘날 비판이론은 언어와 재현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고 있는가?”, “오늘날 기호들이 정치, 경제, 주체성의 생산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묻고 이로부터 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새로운 이론과 비재현적 주체 이론을 전개한다.
박재형(예스24 대학생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