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살의 영혼까지 그러모아 브래지어 후크를 채우듯 온몸의 화를 한껏 명치께로 끌어올려 버럭 소리를 질러본다. 일하기 싫어어어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컴퓨터 앞엔 앉고 싶지 않은 날(물론 정말로 칼이 들어오면 냉큼 앉을 것이다), 집 겸 사무실의 거실에 깔아둔 도톰한 요가 매트 위에 벌렁 누워 좌삼삼 우삼삼 데굴데굴 구른다. 비혼에 자녀가 없으니 내 시간을 모두 나를 위해 쓰고, 내 돈을 모두 나를 위해 지출한다. 물론 할 일 다 하고, 막을 거 다 막은 후 남는 시간과 돈 얘기지만.
그렇게 무급휴가를 실컷 즐기며(그렇다, 프리랜서란 1년에 365일 무급휴가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요가 매트 위를 뒹굴다 문득, 야 이거 사모님 팔자로 보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20년 전 마지막으로 들은 사주풀이가 꽤 용하네 싶기도 하고.
당시 부모님께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자식 셋의 생년월일시를 들고 용하다는 역술인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길 잔뜩 들어오시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딱히 사주라든가 점에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야야, 니가 이렇단다'라는 얘기엔 괜히 귀가 쫑긋거린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뭘 어떻게 알아요, 그치만 궁금은 하네.
나: (무심한 듯) 그래서, 내 팔자가 어떻대?
어머니: 어머 얘! 너 노났단다!
아버지: 야, 아주 그냥 강남 사모님 팔자라는데?
얘기인즉 이 댁 둘째 따님, 그러니까 이 몸께선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 한가하게 미용실도 다니고 백화점도 다니게 될 거란 겁니다. 저, 정말? 고것 참 되게 달달한 얘긴데? 하지만 뭐, 복채 내는 사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지.
그런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헤어롤을 잔뜩 만 채로 미용실 의자에 앉아 언제쯤 끝나려나 하고 있는데 문득 그때의 사주풀이가 떠올랐다. 아, 그렇구나! 지금 나는 남들 일하는 평일 대낮에 파마를 하고 있구나(내 돈으로!) 머리도 새로 했겠다, 집에 그냥 들어가긴 아쉬우니 이따가 이마트에 들러 고등어라도 한 마리 사야겠구나(내 돈으로!)
20년 전 그분의 사주풀이는, 살짝 핀트가 나가긴 했지만 나름 맞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붐비는 주말 대신 평일 낮에 유유히 볼일을 보고, 성수기 휴가철 대신 비수기를 노려 여행을 간다. 프리랜서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강남 사모님 팔자가 아니어도 좋다. 아니, 이제 더는 그 호칭을 원하지 않는다.
사장님과 사모님이라는 두 호칭은 모두 일종의 높임말처럼 사용된다. 비슷한 의미 같지만 실은 서로 무척 다르다. 국어사전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사장(社長)님: 회사의 책임자. 회사 업무의 최고 집행자로서 회사 대표의 권한을 지닌다.
사모(師母)님: 스승 또는 윗사람, 혹은 남의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
즉 사모가 없어도 사장은 혼자서 충분히 사장일 수 있지만, 사장이 없으면 사모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사모는 사장에게 종속된 자로, 사장이 계속 사장이어야 사모도 계속 사모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모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곧바로 이야기한다. '저는 사모가 아니라 사장입니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과 내 주머니에서 나갈 돈은 모두 내가 번 것이다. 이 사실은 나에게 무척 중요하고 의미 있다. 정색하고, 각 잡고 말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작년 봄, 자동차를 사기로 마음먹고 근처의 차량 전시장을 방문했다. 남자친구도 마침 시간이 되어 점찍은 차를 함께 요리조리 살펴보았는데, 우리를 맞아준 영업사원(5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은 오로지 남자친구만 바라보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자동차의 내부와 외부를 모두 구경한 후 견적을 내기 위해 영업사원의 책상 앞에 앉았다. 영업사원은 이때부터 몸을 아예 남자친구 쪽으로 홱 틀어 설명을 이어나갔다. 골반 틀어지면 건강에 좋지 않은데... 아, 이게 아닌가... 그리고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나는 드디어 끼어들었다.
나: 이 차, 제가 탈 건데요. 저한테 설명을 해주셔야죠.
영업사원: 아, 네, 사모님. 그래도 사장님이 잘 아셔야 하니까요.
나: 제가 사장인데요. 할부금 제가 다 내는 건데요.
뭐 어쨌든(땀을 닦으며) 계약을 마치고 일주일쯤 지나 드디어 새 차를 인수하게 되었다. 근처에 사시는 아버지도 차 구경 좀 하자며 놀러 오셔서 영업사원과 인사를 나누셨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영업사원은 오로지 아버지만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사장님, 사이드 브레이크는 여깄고요, 트렁크는 이렇습니다.
그렇게 나는 한순간에 다시 제3자가 되었다. 와, 또 시작이냐! 어서 차량 인수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하기 바라며 입술을 꾹 다물고 턱에 힘을 빡 준 채 참고 있는데, 아버지가 영업사원의 설명을 자르며 끼어드셨다.
아버지: 이 차는 이 친구가 돈 낼 거니까 이쪽 보고 설명을 하시죠.
영업사원: 아 네, 그렇죠. 사모님 차죠. 그래도 사장님이...
나: 사모 아니라 사장입니다, 제가요.
내가 바로 사장이다!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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