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마누라가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나 여권 두고 왔나 봐!”
마누라는 부리나케 여권을 챙겨 왔고, 나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뭐 또 빠진 거 없나 잘 살펴봐.”
“걱정 마. 내가 그동안 출국 준비를 얼마나 꼼꼼히 했는데.”
마누라와 애는 지난 일요일에 미국 사는 처형 집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마누라의 고모님도 같이 가기로 했다. 나는 이들을 차에 태우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빗속에도 비행기는 이륙을 할 수 있을까, 이 정도 비는 끄떡없다, 대충 그 정도 시시한 얘기들이 오갔다. 애는 넌센스 퀴즈 따위를 내느라 바빴다. 이를테면 이런 퀴즈 말이다. “‘서울이 춥다’를 다른 말로 하면?” 퀴즈의 정답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공개할 예정이니 핵노잼이라도 이왕이면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아무튼 공항에는 곧 한국을 떠날 사람들로 북적였고, 사람들은 대개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탑승 수속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행선지가 다른 나라였으면 그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을 텐데, 왠지 미국이라서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1시간을 넘게 기다려서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고, 드디어 정말 떠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마누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항공사 직원은 마누라의 여권에 문제가 있고, 마누라의 출국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같은 여권으로 작년에는 라오스도 다녀왔고, 여권 만료일까지 아직 1년도 넘게 남았는데요?”
“미국은 정식 비자가 없거나 ESTA*를 발급받아도 전자여권이 아니면 입국 자체가 안돼요, 고객님.”(*Electronic System for Travel Authorization / 전자여행허가)
“그럼 여권에 문제가 있는데 항공권은 왜 발급해 준 거예요? ESTA 발급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ESTA는 여권 번호로 일반여권과 전자여권을 식별하지 못해요. 항공권은 고객님이 인터넷으로 결제를 하셨기 때문에 저희가 도와드릴 방법이 없고요.”
“아니,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네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자여권과 ESTA의 존재도 몰랐던 고모님과 애는 출국을 했고, 그동안 출국 준비를 꼼꼼히 했다던 마누라는 출국을 하지 못했다. 고모님의 여권은 일반여권이었지만 미국 대사관을 통해 정식 비자를 발급받으셨고, 애의 여권은 최근에 발급받았는데 알고 보니 전자여권이었다. 전자여권과 ESTA에 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던 마누라의 불찰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ESTA는 미국의 비자면제프로그램**의 일환인데, ESTA를 발급받으려는 해외여행객으로부터 건당 14불씩 받아 챙긴다. ESTA는 전자여권에만 적용되며 항공사 직원의 말처럼 해외여행객이 소지한 여권의 종류는 식별하지 않는다. 그로 인한 개인의 손해는 결코 미국 탓이 아니다. 미국말로 하자면 ‘It's not my business’인 셈이다.
그런데 다른 나라들도 미국처럼 문턱이 높을까? 대부분의 나라들은 서로 비자면제협정을 체결해 해외여행객이 무비자로 자국에 90일간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반면 미국은 해외여행객들에게 자신들만의 규정을 따로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고, 그 규정을 통과한 해외여행객들만 무비자로 자국에 90일간 머무를 수 있다. 말하자면 얼마 전에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전자여권을 소지하지 않았거나 정식 비자를 취득하지 않았다면 입국이 거부당했을 것이다.
문득 11년 전 일이 떠올랐다. 모종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갈 일이 있었다. 나는 내 여권이 만료 직전인 줄 몰랐고, 만료 직전의 여권은 출국이 제한된다는 사실도 몰랐다. 항공사 직원은 나의 출국을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고, 나는 꼭 가야만 한다고 사정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했더니 항공사 직원은 나의 출국을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입국수속을 담당했던 공항 직원은 다음부터 주의하라는 당부와 함께 내 여권에 입국 도장을 있는 힘껏 찍어 줬다. 별일 아니네 싶었다. 당시 행선지가 미국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마누라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신이 겪은 일과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누라는 말했다.
“아이고, 신혼여행 못 간 사람들도 있네.”
마누라는 계속 말했다.
“이런, 미국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도 있네.”
마누라는 계속 계속 말했다.
“일진한테 된통 당한 기분이네.”
덕분에 새삼 국력의 차이를 실감했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뉴스에서는 때마침 일진 형님의 최근 동향을 전했다. 일진 형님이 북한의 ICBM(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는 명백한 도발이라며 엄중히 경고했다는데, 나는 정말이지 북한이 우리 일진 형님 심기 좀 그만 건드렸으면 좋겠다. 우리 일진 형님은 마음만 먹으면 북한뿐만 아니라 지구를 통째로 날려버릴 대량살상무기를 잔뜩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나는 일진 형님이 고모님과 애를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꼬투리를 잡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다행히 고모님과 애는 일진 형님의 까다로운 입국 절차를 무사히 통과했고, 마누라와 나는 그제야 공항에서의 소동을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다.
마누라는 다음주에 다시 미국행을 도전할 예정이다. 물론 마누라의 도전은 또 실패할 수 있다. 만약 마누라의 도전이 용케 성공한다면, 마누라는 애꿎은 승무원들을 상대로 땅콩 갑질을 할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안 그런 사람인데 꽤 원통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일진 형님한테 대들 수는 없고, 약자는 또 다른 약자를 분풀이 삼는 법이니까. 그 점 부디 너그럽게 양해해주길 바라며 참, 출국 전에 애가 냈던 넌센스 퀴즈의 정답은 ‘서울시립대’다.
**외교부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2008년 11월에 미국의 비자면제프로그램(VWP: Visa Waiver Program)에 가입하면서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든지(?) 무비자로 간편한(?) 미국 여행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요컨대 우리는 일진 형님의 따사로운 품속에 있다는 얘기다. 다만 그 따사로운 품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다음은 외교부의 VWP에 관한 설명 중 일부다.
“한 번 VWP 가입국이 되었다고 해서 그 지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아니며, 미 정부에서 2년마다 우리나라의 대테러대책, 출입국관리 및 여권관리 현황, 불법체류?입국거부자 숫자 등을 감안하며 가입국 지위 연장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일진 형님의 따사로운 품속에 계속 머물고 싶다면, 일진 형님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다. 마누라는 그것도 모르고 큰 실수를 한 셈이다. 그런데 외교부에 의하면, ESTA를 발급받고 미국으로 출국했다고 해서 입국이 당연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더 자세한 사항은 아래의 외교부 홈페이지를 참고하길 바란다.
- http://www.0404.go.kr/consulate/esta.jsp
권용득(만화가)
영화 <분노>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자기 생각을 일단 글로 쓰는 놈이야.” 영화 속 형사들이 발견한 살인범의 결정적 단서였는데, 제 얘긴 줄 알았지 뭡니까. 생각을 멈추지 못해 거의 중독 수준으로 글쓰기에 열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술을 먹습니다. 틈틈이 애랑 놀고 집안일도 합니다. 마누라와 사소한 일로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가끔 만화도 만들고요.
lyj314
2017.07.19
조영주
2017.07.13
동글
201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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