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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너무 무분별하지 않냐?

<이기준의 두루뭉술> 첫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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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만들까? ‘이기준의 두루뭉술’ 연재를 시작합니다. (매월 4일) (2017.07.04)

이기준 7월호 .jpg

 

‘절친’인 노바는 그래픽 디자이너다. 재즈를 좋아하지만 음악을 배운 적은 없어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알지 못했다. 학습하려는 의욕 자체가 없어 아무리 연주를 들어도 지식이라는 형태로 쌓이지 않았다. 그나마 10대에는 관심 가는 밴드나 가수의 스토리를 궁금해했고 보유한 음반의 곡명 정도는 파악했는데 지금은 아무런 단편적인 정보도 없이 오직 들을 뿐이었다. 열심히 들었다. 십수 년에 걸친 재즈 청취로 얻은 건 좋아하는 연주자 몇 명, 앨범 몇 장 찾아낸 정도였다. 내가 보기에 노바는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충분했다. 좋아하는 음반 몇 장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들여 추출해 낸 정수다.

 

언젠가 노바가 단골 음반 가게에서 <Study in Brown>을 들고 계산대로 가자 주인이 “지난 주에 스티브 라이히 사 가지 않으셨어요?” 하며 콧김을 내뿜고 웃었다. 노바가 스티브 라이히의 음반을 산 이유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커버 때문이었다. 사진 속 브루클린브릿지에 매달린 노동자들의 배열이 음악적이었고 다리를 지탱하는 케이블 방향을 따라 배열된 ‘Bang on a Can’, ‘New York Counterpoint’, ‘Eight Lines’, ‘Four Organs’라는 단어의 조합이 흥미로웠다. 게다가 당시 노바가 멋있다고 생각한 폰트인 벨고딕이 음반에 사용된, 노바가 목격한 최초 사례였다. <Study in Brown>은 우연히 접한 어떤 글을 보고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노바의 음반 구매 내역은 아무 체계 없이 닥치는대로 이루어진 무분별의 역사였다.

 

나는 지난 가을에 버지니아 울프, 어니스트 헤밍웨이, 너새니얼 호손 등을 잇따라 읽었다. 민음사에서 론칭한 문고 시리즈의 표지 작업을 위해서였다. 『자기만의 방』을 읽고 한동안 멍했다.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에 접근하는 흥미로운 방식에 놀랐고, 예민한 심리 묘사로 가득 찬 우울한 글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대비되는 명료하고 경쾌한 분위기에 놀랐다. 내 기억에 『자기만의 방』 표지는 창백한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이나 창가에 홀로 앉은 여성의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색조 역시 가라앉아서 읽으면 우울의 늪에 가라앉을 것 같았다.

 

노바가 음반을 고를 때 보이는 무분별이 내 경우에는 책에서 드러났다. 나침반이나 별자리에 대한 지식 한 조각 없이 책이라는 망망대해에 나서곤 했다. ‘으음…… 저쪽으로 가 보자. 내가 틀린다면 저쪽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해 질 테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야.’ 선장 노릇을 하면 선원들을 죽도록 고생시킬 터, 어딜 가려거든 혼자 떠나야 세상에 이로울 타입이었다. ‘무모하게 잘도 살아 왔구나’라고 생각하자 어쩌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행운아일지도 모른다는 벅찬 기쁨이 온몸에 스몄다. 행복에 젖은 나는 몇 분간 의식이 흐려졌다. 아무튼 늘 뭔가 읽어 왔지만 작품이 문학사에서 어떤 지점에 놓이는지, 작가는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했다. 배경지식 없이 오직 나만의 독후 감상으로 속을 채워 왔다. 그런 탓에 내 머릿속은 마흔 해 이상 쓴 것치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백지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 즈음 노바는 음악평론가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읽고 있었다.

 

“야, 재즈가 무슨 뜻인지 아냐?”

“모르지.”
“아무도 모른대.”

 

‘재즈’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재즈에 열광하는 노바지만 재즈가 무엇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노바는 언제나 재즈를 틀어 놓고 작업했다. 보유한 음반 중 반 이상이 재즈였다. 하지만 재즈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이 궁했다. 이름의 의미가 불분명하다고 하니 노바는 재즈가 더 좋아졌다.

 

“잼팩토리 기억나? ”
“방콕?”
“어. 폐업한 잼 공장인 줄 알았잖아.”
“그런데?”
“아니래. 아무 상관 없대. 그냥 ‘잼’이라는 단어가 재미있어서 붙인 이름이래.”

 

다다(Dada)는 철 지난 사조가 아니었다. 공기에 스며 앞으로도 영원히 인류와 함께할 친구임이 분명했다. 물질이 아니라 물질이 만드는 빈 공간이 그릇의 본질이라는『도덕경』의 구절처럼, 의미 없는 이름은 그 무의미 덕분에 여러 의미를 가지게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노바의 손에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의 표지를 들추었다. 강헌? 대학 다닐 때 ‘대중음악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강사와 이름이 같았다. 수업 첫 시간이 떠올랐다. 강헌이 수강생들에게 물었다. “대중음악이 뭘까?” 누군가 대답했다. “많은 사람이 듣는 음악이요.” “그렇다면 대중음악가 아무개의 6집 음반은 총 아홉 장 팔렸는데 그 사람이 하는 음악을 대중음악이라고 할 수 있나? 모차르트 모르는 사람 없지? 전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소비되는 음악인데, 그럼 모차르트도 대중음악인가?”

 

“같은 인물 맞네. 책의 논법이랑 똑같아. 재즈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도 백인이 만들었고 역사에 기록된 첫 재즈 음반도 백인이 만들었는데 어째서 재즈는 흑인 음악인가. 노예사냥꾼한테 붙잡혀 낯선 땅에 끌려가 매맞으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조차 금지된 처지에서 가능했던 유일한 표현이 허공에 울부짖기였다. ‘필드홀러(field-holler)’. 악기며 작법이며 전부 백인의 손에서 나왔다 해도 그 속에 필드홀러를 담아낸 건 흑인이기에 재즈는 흑인의 음악이라고.”

 

“싱커페이션이 어떻고, 임프로비제이션이 어떻고, 오프비트의 4박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다 필요 없다. 그런 이론적인 것은 재즈가 아니다.” 그러면서 강헌은 레너드 번스타인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음악을 사실 클래식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내가 볼 때 클래식은 그냥 ‘엄격한’ 음악이다.” 작곡가가 악보에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라고 적었다면 바이올린으로 연주해야 하는 것이 클래식이라는 얘기다. “재즈는 규칙으로부터 자유롭다. 과연 자유로워서만 그런 걸까? 사실은 전날 연주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악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어느 새 나는 내 작업 방식을 반추하고 있었다. 나와 재즈의 접점을 찾고 있었다. 백지 상태로 (울부짖지는 못하고 고작) 읊조리는 나. 하지만 자유롭지는 못한 나. 선 하나 그으면서도 왜 선이 들어가야 하는지 근거를 찾는 고지식한 나. 그렇다고 ‘엄격한’ 작업이었느냐 하면 그도 아니었다. ‘경직된’ 작업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한 셈이었다.

 

“우리, 너무 무분별하지 않냐?”
“무분별이라……. 무분별이 뭐라고 생각해?”

 

사전에서 검색하면 “분별이 없음”이라고 나온다. 사전도 다다가 지배하는 모양이었다. 혼자 소리 죽여 웃자 노바는 계속했다.

 

“분별은 허리띠의 구멍 같은 거야. 딱 맞는 구멍이 없어. 얼추 맞는 데다 꽂을 뿐이야. 나는 오히려 언제까지고 무분별하고 싶어. 호주를 봐.”
“호주? 오스트레일리아?”
“어, 호주. 일찌감치 독립해 다른 대륙과 교류하지 않은 덕분에 호주만의 생태계를 갖추게 되었다잖냐. 내 롤모델은 호주야. 어딜 가나 별반 다르지 않은 미덕을 갖춘 대륙보다 모쪼록 방해 받지 않은 섬으로 남고 싶어. 서로 무한히 연결된 세계에서 조금만 수고를 들이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유용함은 너나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이미, 그리고 앞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냐. 우리의 무분별은 세상의 보루야.”

 

무분별에서는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만 뻔뻔함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기꺼이 응원하고 싶고 공감이 가는 뻔뻔함이었다. 재즈에는 스캣이 있다. 누가 작정하고 만든 창법이 아니라 가사를 까먹은 루이 암스트롱이 아무 소리나 지껄이면서 탄생했다고 한다. 울부짖음이든 읊조림이든 나불거림이든 자신의 몸이 내는 소리에 좀 더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내다 보면 어느새 나라는 섬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되어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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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기준(그래픽 디자이너)

에세이 『저, 죄송한데요』를 썼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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