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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안녕하세요. 31살 직장인입니다. 나이를 먹으니 신중해진 건지 겁이 많아진 건지,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시작한다는 게 어려워요. 어렸을 때 아무 생각도 안하고 그냥 들이대던 패기는 어디로 간 건지. 그렇게까지 열심이기도 힘들고요. 나이가 들수록 자꾸 현실을 따져보게 되고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 사람과 사귀게 되면 이런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잘 해서 결혼까지 갈 수 있을까. 중간에 관계가 어려워지면 힘들어지고 서로 상처도 주게 될 텐데…. 이런 생각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더라도 다가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머뭇머뭇하다가 그냥 멀어지기도 하구요. 그러고 나면, ‘그래, 어차피 맞지 않을 사람이었어’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솝우화의 <신 포도 이야기>에 나오는 여우처럼요. 제게 꼭 맞는 사람을 만난다면 이런 망설임 없이 연애를 할 수 있을까요.
- 상일동에서. 고민에 빠진 여우
A. 김현철의 <연애>란 노래가 생각나네요. 연애와 사랑만큼 멋진 일이 어디 있을까요. 물론 관계에 있어선 필연적으로 어려움이 따를 수 있지만 그게 걱정되어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에요. 어쭙잖은 책임감은 내던지세요. 관계는 어느 한 사람이 책임지는 게 아니고 함께 만드는 겁니다. 여우 님은 미래에 생길 부작용이 걱정되어 꼭 필요한 치료를 미루는 환자 같네요. 부작용을 걱정하지 말고 시작해보세요.
김은영 씨는 잡지를 덮었다. 흔해 빠진 연애 상담에 흔해 빠진 충고였다. 창의력이 부족하군. 이런 고민과 이런 답변이 다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적도 있었는데, 그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유치했던 과거를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라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섯 평쯤 되어 보이는 대기실엔 김은영 씨를 포함해 3명의 환자가 있었다. 저녁에 진료를 하는 병원에 환자가 얼마나 있을까 싶었는데 괜한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구석에 놓인 자동 혈압계에 오른팔을 넣어보았다. 혈압계가 ‘우웅’ 하고 몸을 떨며 팔을 조이는 동안 김은영 씨는 침을 꿀꺽 삼켰다.
150/95. 조금 전 수치와 변화가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혼 후 체중이 늘었지만 평소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일 년 전 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에서 고혈압 주의 판정이 나왔고 재검에서도 혈압이 높다고 했다. 고혈압은 노인들에게나 생기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는 우선 식이요법과 운동을 권했다. 식이요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의사는 싱겁게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김은영 씨는 자신의 입맛이 싱거운 편이라 생각했기에 왜 고혈압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규칙적인 운동 시간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침에 남편과 초등학생 아들 둘이 집을 나가면 후다닥 설거지를 끝내고 출근해야 했다. 그녀의 일터는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의 공인중개사 사무소로, 근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다. 아이들의 교육비가 늘어나면서 집안일을 하면서도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던 김은영 씨에 맞춤한 곳이었다. 전화를 받거나 중개사가 물건을 보러 나간 사이 방문한 고객들을 접대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오래지 않아 동네 전월세 물건의 시세와 조건을 파악할 수 있었고 두어 달이 지나자 고객을 모시고 직접 안내를 하기도 했다.
그곳은 원래 공단 지역이었고 다세대 주택 단지가 이웃해 있었다. 폐업이나 이전을 하는 공장이 늘어나면서 빈 건물에 예술가들의 공방이 들어온 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리모델링한 건물에 식당이나 카페, 술집들이 들어서면서 군데군데 남아 있는 공장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요즘은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모이는 동네가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동산 시세가 오르는 것을 보며 김은영 씨는 누구보다도 이곳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실감했다. 더 많은 변화가 생기기 전에 조그만 상가라도 마련해둔다면 높은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출을 좀 더 받는다면 내년쯤엔 가능하지 않을까. 그녀는 통장 잔고를 셈하며 생각하곤 했다.
반딧불 의원도 중개 사무실 업무로 이 근방을 돌아다니면서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여간해선 병원에 들를 시간을 내기 힘든 그녀도 저녁 시간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눈여겨 보아둔 터였다. 아이들에게 급히 진료가 필요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오래된 상가 건물 3층에 위치한 이 병원의 임대료가 얼마나 될까를 계산하고 있을 때 그녀의 이름이 호명됐다.
막 진료실에서 나온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에게서 풍기는 역한 담배 냄새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김은영 씨는 어리둥절했는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두 팔을 허공에 휘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편인 그는 인상으로 짐작되는 나이와 달리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김은영 씨와 눈이 마주친 의사는 팔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냄새에 좀 민감해서요.”
김은영 씨는 책상 위를 보고서 이내 그의 말뜻을 알아챘다. 책상 위에는 주황색 오렌지가 그려진 스프레이 방향제가 놓여 있었다. 진료실 안 공기에서 조금 전 맡았던 담배 냄새와 함께 달큼한 오렌지 향이 느껴졌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며칠 전에 두통이 심해서 타이레놀을 먹었는데, 평소와 달리 약을 먹어도 금방 가라앉지 않더라구요. 혹시나 해 혈압을 재봤더니 160이 넘어서…”
“두통은 나아지셨나요?”
“네, 그날 자고 일어나니 괜찮았어요.”
“혈압은 평소 정상이셨어요?”
“혈압이 높다고 한 건 1년쯤 되었는데, 특별히 불편한 증상은 없었어요. 운동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네요.”
왜 병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죄를 고백하는 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까. 그녀의 고백에 의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진료 전에 혈압을 재 보셨나요?”
“네, 150에 95였어요. 평소랑 비슷해요. 가끔 혈압을 재보긴 하거든요. 140에서 150 정도? 지난번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혈압이 계속 높으면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꼭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혈압약은 한 번 먹기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한다잖아요. 이제 겨우 40대인데 혈압약을 먹기 시작하면 너무 오래 먹게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혈압약을 오래 먹으면 부작용이 생긴다고 하던데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손가락으로 자판을 치듯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던 그가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떤 약이든 부작용이 없는 약은 없어요. 혈압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들은 아니고 어지럼증, 변비, 얼굴이 붉어진다거나 손발이 붓는다거나 하는 문제들이지요. 심각하다면 발기부전 정도가 되겠네요. (이 대목에서 의사는 정말 심각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김은영 씨는 킥 하고 웃고 말았다) 부작용은 약을 바꾸면 없어집니다. 대부분의 혈압약은 평생 먹어도 되는 안전한 약이에요.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더 큰 문제는 고혈압을 그대로 두었을 때 생길 수 있어요. 중풍이나 심장병이 생길 위험이 두세 배 올라가는데 그건 한 번 생기면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혈압약을 먹는 건 중풍을 예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작용부터 걱정해 피하는 것은 뭐랄까, 맘에 드는 상대를 만났는데도 서로 싸우고 다칠 것이 두려워 연애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거죠.”
“혈압약은 내성이 있어서 먹다 보면 개수도 점점 늘어나게 된다던데요.”
“아뇨.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내성은 없어요. 약 용량이 늘어나는 것은 나이가 들면서 혈압도 더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럼 역시 약은 평생 먹어야 하는 거네요.”
“아뇨. 그것도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약을 끊을 수도 있어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네?”
의외라는 듯한 말투에 의사는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약은 고혈압 치료의 전부가 아니라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체중을 줄이고 싱겁게 먹는 것, 운동도 방법이 됩니다. 대신 효과가 느리게 나타나지요. 최소한 3개월은 걸려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꾸준히 하면 각각 5밀리 정도씩 혈압을 낮출 수 있어요. 한꺼번에 지키면 효과도 커집니다. 약을 끊으려면 이런 방법으로 약의 효과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조건입니다.”
차근차근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그간의 불안감이 조금은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혈압약을 끊을 수도 있다니 약에 대한 부담감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지난 1년간 혈압 관리가 안되었던 걸 생각하면 우선 약을 드시고 혈압을 낮추는 게 좋겠네요. 최소한 140/90 미만으로는 유지가 되어야 해요. 김은영 씨에게 맞는 약을 처방해 드릴께요. 하루 한 번씩 드시고 두 주 뒤에 봅시다. 다음에 뵐 때는 약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고 약을 먹으면서 불편한 게 있었는지 확인할 거에요. 혹시 불편한 게 생기면 더 일찍 오셔도 됩니다.”
일어서려는 그녀에게 의사는 재차 당부했다.
“약을 먹고 혈압이 내려간다고 해도 그건 약의 효과로 된 거라 자의로 끊으시면 안 돼요. 시작은 쉽지만 헤어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방법에 대해선 차차 상의해봅시다.”
병원을 나서면서 김은영 씨는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지 내에 있는 헬스장이라면 저녁 시간에 가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 이곳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에 대해 남편과 상의를 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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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압은 뇌혈관, 심혈관 질환의 주된 원인 중 하나다. 수축기 혈압 140mmHg 또는 이완기 혈압 90mmHg 중 어느 하나라도 기준을 넘었을 때 고혈압 진단을 내린다.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전까지는 혈압이 높아도 대부분 증상이 없기 때문에 ‘침묵의 살인자’라 불린다. 김은영 씨는 두통이 동반되어 병원을 찾았지만, 실제로 혈압 때문에 두통이 생기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성인 4명 중 1명이 고혈압 환자이며, 이 수치는 최근 10여 년간 큰 변화가 없다. 고혈압은 절반의 법칙(rule of halves)이 적용되어온 대표적 질병이다. 환자의 절반 가량은 자신에게 고혈압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알더라도 절반은 치료를 받지 않는다. 치료한다 해도 절반은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한다. 종합하면 고혈압 환자의 극히 일부만이 성공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십여 년 전만 해도 국내 고혈압 환자의 인지율(조사에서 스스로 고혈압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50% 정도에 불과했다. 문제점에 대한 관심과 홍보, 국가건강검진 등의 영향으로 나아졌지만 아직도 인지율은 65% 정도에 머물러 있다 (2014년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
과거에 비해 치료를 받는 비율도 높아졌지만, 지금도 고혈압을 진단받은 열 명 중 한 명 정도는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 약의 내성과 부작용 등에 대한 잘못된 통념은 고혈압 치료율을 낮추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특히 30,40대 환자의 치료율이 전체 환자의 치료율의 절반이 채 안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혈압약은 내성이 없으며 매우 안전한 약이다. 약을 끊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약 복용의 시작 자체를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김은영 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체중 감량, 생활 습관 관리가 잘 되는 경우 추후 복용 중단을 시도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전에 주치의와 충분히 상의해야 하며, 우선 약 감량을 거쳐 서서히 시도하는 것이 좋다. 또한 복용 중단 이후에도 혈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오승원(서울대병원 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만성 질환 예방과 건강 증진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환자를 만나고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에세이 <반딧불 의원>을 썼습니다.
iuiu22
2017.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