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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수에 가겠다고 결심한 건 ‘보영’ 때문이었다

이과수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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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폭포라 하더라도 ‘누구의 관리하에 있느냐’에 따라 이과수 폭포가 여행자에게 건네주는 감각은 이렇게나 다르다. 같은 사랑이라 하더라도 아휘의 방식과, 보영의 태도가 달랐던 것처럼.

사진 찍기 좋은 이과수 폭포

 

남녀, 여행사정 24-01@이과수폭포.JPG
 아르헨티나건 브라질이건 이과수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비를 입어야 한다.


이과수 폭포를 구경하려면 아르헨티나 쪽도 한 번, 브라질 쪽도 한 번 가봐야 한다. 두 곳 모두 가 본 입장에서 어느 나라에서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폭포로 향하는 방법이 협궤 열차에서 이층 버스가 되기도 하고, 폭포를 올려다보느냐 내려다보느냐 까지 달라지니 어느 한 쪽으로 끝낼 수 없는 노릇이다. 도대체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게 왜 이 폭포를 빼앗겨서 여행자의 동선마저도 복잡하게 만드는가!

 

먼저 아르헨티나 지역은 구불구불 정글을 탐험하는 기분이 든다. 협궤 열차가 주요 지점 몇 곳을 연결해주고 그다음부터는 숲길도 지나고 다리 아래 악어 떼도 지나야 한다. 아마존 탐험가를 흉내 내면서 폭포로 다가가면 그 유명한 ‘악마의 목구멍’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에 다다른다.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면 목구멍 속에서 너울 치는 깊은 어두움도 볼 수 있다. 악마의 목구멍으로 나도 따라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반면 브라질 구역은 아주 상쾌하다. 이층 버스에 올라타 햇빛이 부서져 내리는 숲길에 푸르른 옷을 입은 싱싱한 나무와 풀이 마중 나오고, 덥고 습하다면 1층으로 내려와 에어컨 바람을 쐴 수도 있다. 포장된 산책로를 따라 걸을 수도 있으니 밀림보다는 아기자기한 자연휴양림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폭포를 마주하면 분위기는 거칠어진다. 산책로를 물줄기 바로 옆까지 연결한 브라질 쪽은 폭포수가 만들어 낸 엄청난 양의 수증기로 인해 시야가 가로막힌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따끔따끔 얼굴을 때리고 한여름의 폭우를 맞은 듯 우의를 입고 있어도 흠뻑 젖고 만다.

 

폭포 앞에서 맞는 물의 양도 브라질이냐, 아르헨티나냐 따라 다르다. 브라질 쪽은 폭우 수준이고 아르헨티나는 가랑비 수준인데 브라질 구역 이과수 폭포를 구경하면서 고가의 장비를 꺼내 사진 찍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때마침 방수 카메라를 들고 있다고 해도 물방울이 렌즈를 뒤덮어서 흐릿한 사진만 담긴다. 반면 아르헨티나 구역은 산책로 주변을 뒤덮고 있는 수증기의 양이 옆 나라에 비해 적어 카메라 렌즈에 묻은 물기를 스윽 닦고 찍으면 꽤 괜찮은 풍경을 담아 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SNS에 올라온 멋진 이과수 폭포 사진은 대부분 아르헨티나 쪽이다.

 

여행을 사진으로 추억하고 그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을 찾아 사람이 몰리는 세상이다. 유독 이과수 폭포를 찾는 한국 관광객이 브라질 쪽보다 아르헨티나 쪽으로 몰리는 것도 그런 이유 아닐까. 나만 해도 여기에 올리는 원고에서 글보다 사진에 목맬 때가 있으니까. 같은 폭포라 하더라도 ‘누구의 관리하에 있느냐’에 따라 이과수 폭포가 여행자에게 건네주는 감각은 이렇게나 다르다. 같은 사랑이라 하더라도 아휘의 방식과, 보영의 태도가 달랐던 것처럼.

 

사색 하기 좋은 이과수 폭포

 

 남녀, 여행사정 24-02@이과수폭포.JPG
그 남자와 함께여서 다행이다.

 

이과수에 가겠다고 결심한 건 ‘보영’ 때문이었다. 영화 <해피 투게더>(1997년)에서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은 이과수 폭포를 보기 위해 홍콩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다. 두 사람은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다가 결국 헤어지고 아휘만이 폭포 앞에 서며 애잔함이 담긴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한국에는 등급 문제 등의 이유로 뒤늦게 개봉했는데 당시 나는 시네마떼끄에서 이 영화를 본 걸로 기억한다. 어두컴컴하고 불편한 의자, 다닥다닥 앉아 있던 터라 스크린 일부분은 앞사람의 머리로 가려진 기억. 후진 관람 환경만큼이나 영화도 음울했다.

 

남녀가 남남으로만 바뀌었을 뿐, 사랑 앞에 책임을 다하려는 이와 그 사랑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 이의 오만함이 뒤엉켜 ‘에잇, 저럴 거면 사랑 따윈 안 하고 고양이랑 사는 게 낫겠어’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얄미울 정도로 보영을 실감 나게 연기했던 장국영은 사랑 앞에 투정부리고 이용만 하는 밉상이고 자신의 사랑을 퍼 주기만 하는 아휘가 한심했다. 열일 곱 살에 본 영화의 관람평 치고 나쁘지 않았지만 사랑이 무언지 모르는 아이의 그것이었다.

 

이과수로 떠나기 며칠 전, 그 남자와 이 영화를 다시 봤다. 여기 보영 역을 맡은 내가 있고, 아휘 역을 충실히 따르는 그 남자가 있었다. 평등하지 못한 일방적인 사랑의 관계. 길을 못 찾는 아휘를 향해 톡 쏘아 붙이는 보영 ‘지도 잘 본다며? 길 잃어버렸잖아’, 사랑에 지친 아휘의 ‘우린 잠시 동안 함께 했고, 자주 헤어지기를 반복했다’의 자조적인 독백이 위태로운 우리의 관계를 대신했다. 열일곱의 난 사랑을 몰랐지만 서른넷의 난 사랑이 서툰 사람이었다.

 

여행 중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던 우리는 서로를 놓아버리고 싶었던 위기의 순간을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 이렇게 싸우는데 왜 여행을 지속시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지르고 가방을 집어 던지기도 하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했다. 떠나기와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보영처럼 우리 두 사람도 사랑과 증오를 수없이 오갔다. 지독한 개인주의자에 무뚝뚝한 나의 성격은 여행할 때도 고스란히 등장했다. ‘사랑해’라는 말이 너무 무거워 그 남자에게 인색하게 굴었다.

 

사랑이 성숙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 남자가 나와의 여행이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누구보다도 그의 행복을 바란다. 그가 나로 인해 화가 난다면 나는 더 이상의 어리석은 짓은 멈추고 그가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끔 행동할 준비가 되었다. 이 괴롭고 우울한 싸움이 알고 보면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아휘의 대사가 내 것이 아니라 다행이다.

“이과수 폭포에 도착하니 보영 생각이 났다.
슬펐다.
폭포 아래 둘이 있는 장면만 상상해 왔기 때문이다.” 
- 영화 <해피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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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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