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문장(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그러나 나는 어쨌든 살아야 했다. 우박이 쏟아지든 산사태가 일어나든 밥 짓고 빨래하고 살아갈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삶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닌 나의 하루를 모셔야 했다. 나에게 닥친 우연에 저항하지 말고 운명을 회피하지 말고 삶의 요청을 수용하기로 했다. (중략)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이 뜨겁게 자각되었다. 삶을 옹호하는 본능일까. 주위에 더 눈길을 돌리고 더 아우르며 마음 다해 살 수 있었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126 쪽
1.
심보선 시인이 낳은 말처럼,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었다. 진행 중인 늙음을 알아차리면서 무감한 여유로움으로 그 변화를 수용하고 싶었다. 서른과 마흔을 치열하게 달려왔으니 그럴만한 자격도 있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쉰을 넘고 한 두 해가 흘렀을 때, 젊은 시절의 내 노동은 현물로 치환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은 잡히지 않는 추상이었고 통장의 마이나스 수치는 눈에 보이는 구체성이었다. 10년 이상을 운영하던 회사는 작게 비가 새더니 그 구멍이 점점 커져서 난파선처럼 위태로웠다. 한때 회사를 확장하겠다고 무리한 대출을 일으킨 것이 화근이었다. 이자와 원금을 내기 위해 또 다시 대출을 일으키는 악순환. 특별히 잘 못한 것도 없는데, 흥청망청 낭비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맞이하고 있는지 억울했지만 억울한 사이에도 갚아야 할 하루의 빚은 늘어갔다.
심보선 시인이 같은 시에서 말한 대로,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를 밥처럼 읽고 위로 받으며 꾸역꾸역 살아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올해 초에 극심했다.
이 사람처럼
몇 번의 이자를 연체하고, 카드가 정지되고, 줘야 할 돈을 주지 못해 전화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다가 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자는 생각이 유혹처럼 들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으니 빌려줄 거야, 누구에게 먼저 부탁을 할까. 인간의 뇌는 확정한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 결정된 것의 알리바이와 구실을 먼저 만들도록 세팅돼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뇌세포가 그 매뉴얼에 반란을 일으켰다.
에라이! 그럴 바에는 그들에게 영업을 하자!
돈을 빌려달라는 구차함보다는 내 물건을 사달라는 협박이 백배 당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훅하고 들었다. 그래도 누군가의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고 오십을 살아왔다는 자신감으로 며칠 밤을 새워 3시간의 치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리고 메일로 알리고 전화로 알리고 찾아가서 알렸다.
그 과정에서 나는 지인들에게 거의 은혜라고 불러도 좋을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자기 회사에서 몰래 내 프로그램의 제안서를 만들어 준 후배 J, 프로그램의 로고를 만들어준 S, 도입부의 음성 녹음을 자처해준 H, 자신이 운영하는 팟캐스트를 통해 선배의 프로그램을 발벗고 홍보해 준 W, 그 내용이 무엇이건 나라는 이유로 첫번째 클라이언트가 되겠다며 선급금을 보내온 J형, 술자리에서 조용히 불러내 박카스 값이라며 오만원 짜리 한장을 쥐어주던 D형, 밥 거르지 말고 재기하라며 피자를 보내준 L 누님, 힘든 아빠에게 소주와 순댓국을 사준 나의 딸…. 일일이 호명할 수가 없을 정도로 온정의 손길이, 과장한다면, 사랑의 리퀘스트 수준이었다.
그 동력으로 재기의 시동을 제대로 걸 수 있었다. 반년이 지난 지금 내가 만든 프로그램은 내 회사의 대표 상품이 되었고, 쓰러지는 회사를 두 손으로 일으켜세우는 골리앗의 역할을 하고 있다.
3시간의 적정치유, 곁
은혜의 쓰나미를 맞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냉담했던 나의 신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출근 전 집 앞의 기도소에 들려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절대 잊지 않게 해달라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위기가 지나더라도 그들에게 받은 고마움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빌었다.
그렇게 일주일, 열흘, 그리고 보름이 될 무렵, 지금의 이 힘든 시기에 나에게 특별한 도움을 준 사람들만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가 누군가의 도움 속에서 지어진 것이라는 자각이 스르륵 스며들었다. 내가 잊고 있거나, 무심했거나 아예 생각도 못했거나 더러는 기억하고 있거나 그런 모든 존재들의 손길 속에서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라는 내면의 소리를 나는 아침마다 듣기 시작했다.
겸손해야지, 감사해야지, 그리고 초 단위로 조용히 늙을 것이 아니라 초 단위로 더 열심히 노동해야지, 그리고 누구에게든 나의 것을 되돌려줘야지, 빚 갚아야지, 그것이 내 인생의 숙제인 것이지, 라는 말을 기도소에서 나오면서 늘 중얼거렸다.
2.
점쟁이에게 줄초상을 치를 것이라는 점괘를 받고 육백만 원짜리 굿을 하라는 처방을 받은 여자가 있다. 그러나 특별히 고민할 것도 없는 것이, 당장 그녀에게는 그만큼의 돈이 없었다. 점쟁이를 소개해 준 선배는 미안한 마음에 여자를 위로한다. 예전에는 굿을 하면 굿판의 떡과 과일로 70가구, 280명을 먹여살렸대, 그냥 보시해서 업보를 풀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굿 대신 내가 간절히 기도해줄게.
“선배의 말에 위로를 받으며 여자는 오히려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동안 280명에게 따뜻한 밥 한끼 나눠주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의 삶도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다는 자각,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장.” 그 여자, 은유의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중에서 ‘오래 고통 받은 사람은 알 것이다’ 의 내용이다.
나는 이 에세이를 읽으며 나의 고통,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얻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내 인생 전체의 빚짐을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 외에도 이 책은,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던져주고 멈추게 하고 돌아보게 하고 한숨 쉬게 하고 부끄럽게 한다.
작가는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를 서른 다섯부터 마흔 다섯을 경유하는 한 여자의 투쟁 기록이라고 정의했지만 그 기록의 사유는 너무나 깊고 그 연원은 꾸미지 않고 생생하며 특히 기록의 문장은 매혹을 넘어 치명적으로 황홀하다. 자기가 좋아서 무언가를 했던 사람의 나무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달디단 과실이 열린다. 좋아서 했던 절실한 자기 학습과 풍성한 독서 속에서 뽑아낸 인용과 시(詩)를 골재로 하여 , 여자의 본분과 인간의 존재와 사랑이라는 의미와 일이라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의 언어는 진정하고 활자에서는 사람의 향기로 온통 분분하다.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는 김제동의 말 속에서 가부장제 언어를 잡아내는 섬세한 문제의식, 한쪽의 수고로 한쪽의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라고 생각하는 합리적 철학, 사랑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라는 자유로운 낭만, 이런 마중물이 작가의 우물에서 이 좋은 글들을 뽑아내는 힘일 것이다.
그 어떤 페미니스트 책보다, 연륜과 경험을 갖춘 유명한 작가의 에세이보다, 학식과 명성을 두루 갖춘 시인, 소설가, 철학가의 글보다 나는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읽은 것이 감동적이고 고맙다. 오랜 만에 정말 제대로 된 진짜를 만난 것 같은 흥분감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떨리는 지문으로 남아있다.
무엇보다, 초 단위로 확인하는 우아한 늙음보다 초 단위의 노동을 선택한 동지를 만난 듯해 나는 기쁜 것이다.
역시 또 많은 이들에게 빚을 졌다. 좋은 기회를 준 예스24의 웹진 <채널예스>와 이 코너를 사랑해준 독자, 특히 단 한번도 답글을 달지 않았지만 항상 댓글을 통해 후감을 남겨주신 Ldj1999, 봄봄봄, lyj314, bluek0919, kh7419, yogo999, 동글, 책사랑, 껌정드레스, iuiu22, kenziner, jijiopop, 민재씨,carri, rosemaryd, jijiopop, 언강이숨트는새벽, a50044, 꿈의대화, 감귤님에게 감사드린다. 자자손손 번창하시고 가가호호 만세 부르시길. 끝.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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