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인은 예금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단 다 쓰고 보는 문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은행에 예금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차례 전쟁을 치러왔기에 전쟁이 일어나면 자국 화폐의 가치는 언제든 휴지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폐는 정부가 그 가치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거래되는 것인데, 그 정부가 전쟁에서 질 수도 있으니까요. 또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쓰고 빚이 많아지면 정부를 믿을 수 없게 되니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통 전쟁이 일어나거나 사회에 혼란이 있을 때는 믿을 수 있는 다른 나라의 화폐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금이나 보석을 선호합니다.
또한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로 통일되자, 공산당에서는 개인이 보유하고 있던 예금을 모두 압수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부와 금융기관, 국민 사이에서도 신뢰가 가장 중요한데요. 한번 틀어진 금융에 대한 신뢰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한 것이지요.
게다가 그동안 베트남 경제가 좋지 못했기에 베트남 화폐인 ‘동(Dong)’의 가치는 계속해서 떨어져 왔습니다. 1993년에 1달러에 1만 동이었는데, 20년 동안 단 한 번도 강해지지 못하고 꾸준히 약해져서 2016년 현재 1달러에 2.2만 동이 되었습니다. 동화를 은행에 맡겨놓고 이자를 받는 것보다 동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폭이 더 크기 때문에 동화를 달러화로 환전해서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외에 있는 투자자뿐만 아니라 국민조차 언제 가치가 폭락할지 모를 동화보다 달러화를 선호하기에 동화의 가치가 꾸준히 떨어진 것이었죠.
베트남에서는 상점에서 달러를 받는 것이 공식적으로 불법이기에 상점에 표기된 가격은 베트남 동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택시를 타든 물건을 사든 달러를 받았고, 때때로 동으로 받기보다 달러를 요구하는 예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금융기관과 국민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어 있어 대부분 은행 거래를 하고, 좀처럼 집에 금고를 들이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게 있어 금고는 정말 엄청난 부자가 쓰거나 무언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획득하고 이를 숨기고자 할 때 사용한다는 이미지가 있는데요. 베트남에서는 개인 금고가 잘 팔려서 집마다 한 개씩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특히 한국의 ‘건가드’라는 회사의 금고가 인기였습니다.)
저는 금고를 쓸 일이 없었기에 어떤 금고가 좋은 것인지, 열기 힘들게 만든 것이 좋은 금고인지 궁금했는데요. 베트남 지인께서는 열기 어려운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도둑이 들고 도망가기 어려울 만큼 금고가 아주 무거워야 한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보통 두 명이 들어도 못 들 정도로 무겁다고 하네요.
한편 어떤 나라의 물가 수준을 살펴보려면 맥도날드에서 빅맥의 가격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빅맥 지수’가 있는데요. 저는 비슷하게 그 나라가 세계 경제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는지 보고 싶으시면 은행에 가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곳 은행의 인테리어 상태나 직원의 친절함도 물론 중요하지만, 주의 깊게 보셔야 할 부분은 은행에서 주는 달러 정기예금 금리입니다
여담입니다만, 보통 금융기관은 하나같이 교통이 좋은 위치에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화려한 빌딩 1층에 입주해 있는데요. 이는 금융기관이 많은 돈을 벌어서가 아닙니다.
비싼 임대료와 인테리어 비용을 지급해서라도 눈에 잘 띄고 좋은 건물에 입주하려는 이유는 금융상품이라는 것이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도 좋게 보이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예금이나 펀드와 같은 금융상품은 은행마다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알록달록 예쁘게 디자인된 통장이나 카드 외에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비싼 비용을 지급해서라도 ‘우리는 이 정도의 비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다.’라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우기 위한 부분이 큽니다.
다시 돌아와서, 예금 가운데서도 ‘달러’ 예금 금리를 보면 그 나라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요. 달러 예금 금리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달러 빌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은행은 국내와 국외에서 달러를 빌릴 수 있습니다. 먼저 국내에서 빌리는 방법은 개인 혹은 회사로부터 달러 예금을 받아서 달러를 조달하는 것이고, 국외에서 빌리는 방법은 해외 은행에서 직접 달러를 빌려오거나 해외 투자자들에게 ‘달러 채권’을 판매하는 것입니다.
채권이란 ‘돈을 일정 기한까지 빌리고 약속한 이자와 원금을 주겠다’는 일종의 ‘차용증’입니다.
즉 ‘달러 채권’이라 함은 차용증을 쓰고 일정 기한까지 이자와 원금을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달러를 빌려오는 것이죠. 그래서 만일 A국 은행의 달러 예금 금리가 높다면 이것은 보유한 달러가 부족하기에 높은 이자를 주고서라도 달러 예금을 유치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달러가 부족한 이유를 국내 사정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A국 기업의 수출이 부진해서 벌어들인 달러가 없을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국민이 A국 정부와 은행을 믿지 못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예금을 맡기지 않고 집에 보관하거나 해외로 빼돌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해외 사정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국제 금융시장에서 A국의 채권, 즉 A국이 쓴 차용증을 잘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A국은 신용이 불량하기에 달러를 빌려주는 쪽에서는 위험을 지는 셈이니 높은 금리로 빌려 가라는 것이죠. 반대로 달러 예금 금리가 낮다면 그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 충분하다거나 그만큼 신용이 좋고 갚을 능력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글로벌 금융 탐방기육민혁 저/오석태 감수 | 에이지21
이 책은 새로운 투자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전 세계를 다닌 지은이가 각 나라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와 각각의 금융 현상을 이자율(금리)로 알기 쉽게 설명한다. 옆집에 사는 고교생이, 음악을 전공하는 대학생 사촌이, 금융에 문외한인 친구나 형, 누나가 물었을 때처럼 말이다.
육민혁
호기심이 많아 연구하고 직접 찾아보는 것을 좋아하며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아직 지식이 얕고 경험도 일천하기에 좌충우돌하고 있지만 실행력으로 이를 보완해 나가고 있습니다. 옆집 형이나 오빠처럼 편안하고 부담없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넓은 세계에 대해 함께 나누고, 더 나아가 평소에 경제와 금융에 관심이 있지만 왠지 무언가 어려운 것 같다고 느끼셨던 분들께 금융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한국은 여전히 희망과 가능성이 많은 나라라고 믿고 있으며,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후 Societe Generale 증권과 HMC 투자증권을 거쳐 지금은 메리츠 종금증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