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해는 뜨고 해는 지고」가 2003년 『까마귀』로, 마침내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기까지, 한수산 작가의 시계는 아주 느리게 흘렀다. 작가가 홀린 듯 일제강점기 문제에 눈을 뜨고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도 무려 27년이라는 세월을 한 작품에 쏟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했던 일이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난 9월 23일,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한수산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다. 작가는 ‘군함도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강제징용의 비극, 피폭자들의 처참한 삶, 일본의 군함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 등 현재 우리의 위치를 깊이 살피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변화를 요구했다.
원폭, 피폭자들
『군함도』를 완성하기까지 작가가 수집한 자료의 방대한 양만 보아도 그가 이 작품에 어떤 사명감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탄광 노동에 관한 문화재급 그림책과 총독부 기밀자료, 징용공의 일기까지 사료로써의 가치 또한 높은 귀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작가는 자료의 일부를 화면에 띄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가가 먼저 보여준 것은 원폭을 둘러싼 아픈 사연들이었다.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황량한 사진들이 이어졌다. 끔찍한 원폭의 증거들. 히로시마는 특히 구릉지로 되어 있는 지형 탓에 피해가 더 컸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의 위력이 더 셌음에도 바람과 지형의 차이로 히로시마의 피해가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원폭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상, 하늘에 떨어집니다. 나가사키 원폭은 지상 약 500미터 상공에 떨어져서 폭발했어요. 그러면서 세 가지를 일으킵니다. 하나는 20,000도의 열, 또 하나는 무시무시한 폭풍, 나머지는 방사능입니다. 이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후유증을 남기면서 지금에 이른 겁니다.”
당시 상황을 그린 일반인들의 그림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물에 몸을 숙인 채 죽은 시체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20,000도의 열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상상할 수는 없지만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피폭자들이 그렇게 물을 찾았다는 기록이 나”왔다는 작가의 말이 이어졌다.
소설 『군함도』
원폭 투하 이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구분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뒤늦게 구조가 이루어졌다. 들것에 사람을 나르는 식이었는데 구조를 하던 일본인들은 부상자들 가운데 조선말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버렸다. ‘사람 살려’라고 소리치는 조선인들은 들것에 싣고 가다가도 버렸다. 한수산 작가는 “이 사실을 안 다음과 알기 전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진실을 그리기 위해 27년 간 매달린 작가, 그에게 이 소설은 단지 써야 하는 소설이 아니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소설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징용 한국인은 무엇을 했나?’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고 말했다. 그러다 발견한 놀라운 자료 『원폭전후』를 만난다.
“<아사히신문사>에서 펴낸 『원폭전후』는 피폭자들이 증언한 당시 상황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어렵게 구했는데요. 여기서 놀라운 걸 발견합니다. 미쓰비시 조선소의 간부가 징용 조선인들이 피폭 후에 어떤 일을 했는지 말한 대목이 나와요. 다름 아닌 징용 조선인들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해서 죽은 사람은 싸놓고, 산 사람 중에 병원에 보낼 사람과 집으로 보낼 사람을 또 구분하고, 그랬던 거예요. 이 증언자가 끝에 ‘구조대의 주체가 되어 활동해준 젊은 조선인 징용자들을 이제 와서 결코 잊을 수는 없으리라’고 감사의 이야기를 했어요. 놀라운 얘기예요.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 말이죠. 이게 제가 소설을 쓰면서 가장 힘이 된 증언이었어요. 일본인은 조선인을 버렸어요. 그런데 조선인은 마지막까지 인간의 길을 걸었구나, 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강제징용과 나가사키의 피폭이 뒤엉킨 비극을 그리기 위해 취재를 하던 한수산 작가는 그러나 조선인 피폭자의 실태 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던 중 오카 마사하루(岡政治) 목사와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소설의 작중 인물 ‘성식’의 실제 인물인 피해자 서정우 씨를 알게 된다. 작가는 서정우 씨와 취재를 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군함도의 참혹함을 체험한다.
“이분은 피폭자이면서 군함도에 열다섯 살에 끌려가서 광부 생활을 하던 분입니다. 이분이 정말 현실적인 경험을 전해주셨어요. 현장을 같이 걸었던 분이시고요. 이분은 할머니, 동생과 셋이 살다 먹을 게 없어서 남의 고구마 밭에 남은 고구마를 캐먹으러 갔다 바로 그곳에서 징용 트럭에 실려 광산까지 끌려갑니다. 현장을 함께 걸으며 ‘여기서 매를 맡고 쓰러졌다’, ‘저기서 너무 배가 고파 울었다’, ‘저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했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를 제일 슬프게 했던 것은 배가 고파서 울었다는 말이었어요.”
혈기왕성한 청년이 배가 고파서 울 수밖에 없던 상황을 상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는 작가의 말. 그것은 다른 어떤 고통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고통이었다. 그렇게 서정우 씨와의 취재가 끝나고, 한수산 작가는 그의 집을 찾아간다. 부인은 가출했고, 쌍둥이 아들은 폭주족이 되어 혼자 쓸쓸히 살아가는 서정우 씨, “이분과의 마지막 작별 장면이 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작업실에 들어갈 때마다 ‘서정우 씨를 잊지 말자’고 되뇌었습니다”라며 작가는 그를 추억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했더니 앉으라고 해요. 봤는데요. 지금은 우리도 밥을 물에 말아 먹진 않죠. 옛날에는 그렇게 잘 먹었어요. 그런데 이분이 물을 말아먹는 거예요. 이게 우리 식사에는 거의 사라진 거거든요. 이분은 그걸 갖고 계시더라고요. 그걸 바라보고 있으니까 가슴이 먹먹해져요. 뭐가 자꾸 치밀어 올라요. 저 사람이 열다섯 살에 끌려왔다고 하는데,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이인데 그 소년이 그곳까지 끌려가서 그 고생을 하다가 원폭까지 맞고. 저 사람을 누가 저렇게 만들었느냐,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부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한수산 작가는 그때 결심한다. 서정우 씨를 위해서, 서정우 씨처럼 살아야 했던 강제 징용자, 피폭자, 역사 속에서 부서져간 사람들을 위해서 이 이야기를 복원하겠다고 말이다.
군함도, 그리고 오늘
지난 해 일본은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강제 노역’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교묘하게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군함도를 등재시켜 역사적 비극을 외면했다. 한수산 작가는 이 현실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징용 현장, 세계문화유산 되고도 남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것만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게 아니에요. 넬슨 만델라가 오래 투옥되었던 감옥, 다 세계문화유산이에요. 인류가 치욕을 겪은 곳,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서 보존, 유지해서 후손에 알려줘야 합니다. 그러니 ‘군함도, 징용 현장이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이 되느냐’는 말이 안 디는 이야기예요. 우리는 그게 아니라 이곳의 자격 상실을 이야기했어야 하는 거예요.”
작가는 관련 뉴스 보도를 하나씩 보여주며 조목조목 틀린 부분을 지적했다. 언론의 역사 인식과 잘못된 사실 전달이 중요한 논점을 흐리는 결과가 된 사실을 개탄했다. 작가는 “이것 또한 역사 왜곡”이라고 말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소설 『군함도』는 오늘을 일깨우는 소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자동차 광고를 거절한)송혜교로 살 것인가, (근로정신대 피해자가 손해배상 소송을 건 미쓰비시 사건에서 미쓰비시 측 변호를 맡은)김앤장으로 살 것인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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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한수산 저 | 창비
『군함도』는 전작을 대폭 수정하고 원고를 새로 추가해 3500매 분량으로 완성된 결정판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출신과 배경 등이 새롭게 설정되었고 군함도에서의 고난이 인물들이 자아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으로 서사적 흐름이 자리잡으며 소설적 구성미와 완성도를 높였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
봄봄봄
201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