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자주 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연기를 비롯해 다방면에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배우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그간 주목받지 못했으나 탄탄히 무대 경험을 쌓아왔거나 또는 색다른 경력을 지닌 배우들이 많죠. 오늘의 주인공은 확실히 후자가 아닐까 합니다. 10년이라는 활동 기간, 참여했던 작품의 명성에 비해서는 무대 위 모습이 조금 낯설 수 있지만 국내는 물론 세계를 누비며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다져왔는데요. 요즘 관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한 뮤지컬 <인터뷰>를 통해 그간의 응집된 경험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배우 조상웅 씨인데요. 일요일 낮 공연이 끝나고 인근 카페에서 조상웅 씨를 직접 만났습니다. (이 기사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순간에 집중하고 극이 끝나면 잊어버리려고 노력하지만 공연이 끝난 직후에는 좀 정신이 없어요. 저는 지금 누구일까요? 이제 저는 조상웅입니다(웃음).”
무슨 말이냐고요?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모두 3명이지만 2인극에 가까운 창작뮤지컬 <인터뷰>. 하지만 이 작품에는 의외의 수많은 인물, 아니 인격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조상웅 씨는 싱클레어라는 이름의 배역으로 모두를 소화해야 하는지라 체력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에너지 소비가 크죠.
“맷, 지미, 두디, 앤, 노네임까지 지금은 5개의 인격이 나오지만 더 있을 수도 있죠. 맷 시니어라는 인물 안에서 표현되지만 각기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각각의 배역을 맡았을 때처럼 찾아가고 있고요. 저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잖아요. 가정 폭력, 학대... 누군가 한 명이라도 도와줬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작품이 주는 메시지도, 역할도 쉽지 않아서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뮤지컬 <인터뷰>의 가장 핵심 장치인 다중인격. 결국 조상웅 씨는 1인5역을 맡은 셈이네요. 지난 5월 언더스테이지 때부터 참여하셨으니 뮤지컬 <인터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창작 초연작의 경우 대게 배우 또한 제작에 깊게 참여하게 되잖아요.
“맞아요, 사실 이 작품을 만나기 전에 개인적으로 ‘배우를 계속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대본을 보는 순간 정말 해보고 싶더라고요.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려웠지만 제 스스로, 또 동료들과 새로운 걸 만들어보는 과정이 좋았어요. 재미가 더 붙었고요. 감사하죠. 이런 인물을 또 맡을 수 있을까... 제가 이 작품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뷰>를 봤다면 이 배역을 정말 해보고 싶었을 거예요.”
2인극에 가까운데 상대배우에 따라 호흡이 많이 다르겠죠? 그런데 페어가 꽤 많네요.
“많이 다르죠. 극의 목적은 같지만 페어마다 같을 수가 없어요. 배우 고유의 특성도 있고, 음성에서 오는 차이도 있고요. 페어가 많아서 저도 걱정을 좀 하긴 했는데 다들 너무 잘 하는 선후배들이라 관객들은 도대체 몇 번을 보셔야 할까요(웃음)?”
미성에 방긋 웃으며 말씀하시는 모습이 소년 같아서 조금 전 무대 위 모습이 더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 안에도 괴물이 있나요(웃음)?
“보통은 이런 모습인데,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닐 수 있죠(웃음). 집에 가면 짜증내는 저도 있을 수 있고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요. 극중 유진킴도 말하잖아요. 맷이 극대화된 케이스일 뿐이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는다고. 그래서 관객들도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모습이 다 다를 것 같아요.”
주로 대극장 공연을 해와서인지 성량이 굉장히 좋더라고요. 대학로, 특히 소극장 공연은 많이 낯설 텐데 어떤가요?
“제 목소리가 너무 크죠(웃음)? 감정에 따라가다 보면 격해지더라고요. 대극장 공연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했던 작품들이 그렇더군요. 대극장이나 소극장이나 연기, 노래 등 본질적인 것은 같은데 표현하는 게 좀 다를 수 있겠다 싶어요. 소극장 공연은 아무래도 내면을 더 섬세하고 깊게 표현하는 부분이 있고, 관객들과 더 가깝기 때문에 친밀감 같은 것도 다른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접근하고 있어요.”
사실 국내에서는 2012년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로 혜성처럼 나타난 배우로 알고 있는데, 2006년 <라이온 킹>으로 데뷔했고 그 뒤 바로 극단 사계에서 활동하셨잖아요.
“네, 사계에서 6년이나 활동했어요. 그때 <라이온 킹>을 사계에서 올렸는데, 객원 단원으로 뽑혀서 1년 동안 심바로 공연했어요. 이후 단원 오디션이 있었는데, 새로운 걸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계에 입단했고요. 극단 사계가 쉽지 않은 곳이라 힘들었지만, 감사하고 고마운 시간들이었죠. 특히 누구에게나 똑같은 오디션 기회가 주어지고 계속 공연이 있으니까 저도 좋은 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었고 6년 동안 쉬지 않고 공연했어요.”
그런데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온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사실 들어올 생각을 못했어요. 매회 공연하기도 바빴으니까요.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몇 년째 하는 공연들이 많아서 극단 사계 역시 공연이 계속 이어지거든요. 그런데 2006년에 오디션을 봤던 <레미제라블> 프로덕션 측에서 다시 연락이 온 거예요. 공연 조건을 물었더니 1년 동안 원 캐스팅이라고 하더라고요. 단기간 공연이고 더블 캐스팅이었으면 오디션을 보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롱런하는 작품이 좋거든요. 그 안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고 배울 수 있으니까요. <라이온 킹>을 7년간 했는데, 그래도 정답이 없고 계속 찾아지는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1년간 <레미제라블>을 했죠.”
지난해에는 또 런던에서 뮤지컬 <미스사이공>의 투이로 1년간 공연하셨잖아요. 보통의 배우들과는 참 다른 경험이네요. 덕분에 활동기간에 비해 참여한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요.
“그렇죠, 감사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영국에서 활동할 때는 일본에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타지 생활이라는 것도 그렇고, 언어는 둘 다 모르지만 일본에서 다른 나라 언어로 공연을 해봤잖아요. 그때 언어에 대한 강박관념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는데, 사실 우리말도 완벽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완벽보다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준비하고, 공연이 올라가면 순간의 감정에 더 집중하고, 끝나고 나면 부족한 것들을 채우려고 노력했어요.”
해외 경험 때문에 오히려 국내에서 활동할 때 부딪힌 적은 없나요? 시스템이 많이 다르잖아요.
“처음에는 많았죠. 극단 사계만의 연기법이 있고 시스템이 있으니까 그게 몸에 배였을 것 아니에요. 그래서 상처도 받았고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계속 찾아가고 만들어갔죠. 그런 시기가 없었으면 성장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요. 사실 저에게는 매 공연이 전쟁이에요. 지금껏 어느 공연 하나 쉬운 게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과정을 즐기려고 노력해요.
어찌 보면 다른 배우들보다 모험심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또 도전하고 싶은 게 있을까요? 그리고 10년 후에는 어떤 배우로 걸어가고 싶으세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새로운 창작물들을 많이 만들어보고 싶어요.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게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까 즐겁고 행복한, 아주 귀한 작업이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10년 후에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서른 살이 넘으면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연기나 노래도 다 알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계속 배워가고 경험해가잖아요. 그래서 10년 후에도 똑같을 것 같아요. 계속 발전하고, 진화하고, 그렇게 관객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배우이고 싶어요.”
그리고 10년 후에는 싱클레어가 아니라 유진킴으로 <인터뷰>에 참여할 수도 있겠네요. 그때까지 조상웅 씨는 배우로서 또 얼마나 많은 도전과 경험을 하게 될지 궁금하네요. 창작뮤지컬 <인터뷰>는 지난 5월 국내 초연돼 단 2주간 무대에 올랐으나, 9월 교토 공연에 이어 내년에는 도쿄와 오프브로드웨이 진출까지 확정됐습니다. 일요일 낮 공연에 객석이 가득 차고, 소극장에서는 보기 힘든 기립박수가 터져 나온다면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을까요? 특히 조상웅 씨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쉬웠던 관객이라면 뮤지컬 <인터뷰>를 통해 한 번에 확인하시죠. 한 인물만 1년 넘게 파왔던 지난 10년의 색다른 경험이 이번 무대에서 더욱 돋보일 테니까요.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