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박천휴·윌 애런슨, 가늠할 수 없는 의미
SPECIAL① 토니어워즈 6관왕 이후, '윌휴' 콤비가 마주한 생각들
글: 이솔희 사진: 표기식
2025.11.12
작게
크게

연말 특집_<무대를 둘러싼 이야기>
우린 왜 여전히 무대 위에, 무대 곁에 존재하는 걸까?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무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 더 나아가 예술가로서의 생각과 신념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담. 첫 번째 인터뷰이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박천휴-윌 애런슨 콤비입니다.




 
그 후 10년, 300석 규모의 대학로 소극장에서 시작한 이 '작고 조곤조곤한 창작뮤지컬'의 여정은 1,000석 규모의 뉴욕 벨라스코 극장에서 한 차례 분기점을 맞았다. 브로드웨이에서의 성공적인 개막에 이어, 토니어워즈 6관왕이라는 새 역사를 쓴 것. <어쩌면 해피엔딩>, 그리고 그 작품을 탄생시킨 박천휴·윌 애런슨 콤비에게 스포트라이트가 향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두 사람의 애정과 취향의 집약체인 이 작품이 국내외 공연계의 주목을 받는 지금, <어쩌면 해피엔딩>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됐을까? 확실한 것은, 그 의미는 단지 트로피의 개수나 공연장의 크기로는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 재즈 선율을 흥얼거리고, 여전히 올리버의 마지막 선택에 심장이 울렁이는 두 사람은 국내 초연 10주년을 맞은 이번 시즌에도 헬퍼봇들의 마음 아린 사랑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오랜만에 더뮤지컬과 인터뷰로 만났어요. 오늘 촬영을 맡은 표기식 포토그래퍼와도 남다른 인연이 있죠? 
박천휴 2016년 <어쩌면 해피엔딩> 초연을 준비하던 때에, 제가 작가님께 먼저 연락을 드렸어요. 저희 공연의 포스터 사진을 찍어달라고요. 초연 때 감사하게도 저에게 포스터 디자인을 비롯해 일종의 아트 디렉팅을 할 수 있는 역할이 주어졌었거든요. 그 당시에 우연히 작가님의 사진을 보게 됐는데, 필름 사진 느낌의 서정적인 분위기가 작품의 결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작가님께 바로 인스타그램 DM을 보냈죠.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아마 작가님도 기억하실 텐데, 뱀이 나올 것 같은… 되게 우거진 숲에서 촬영했던 기억이 나요.
 
표기식 서울 외곽에 있는 어떤 리조트의 뒷산 같은 곳이었는데, 진짜로 뱀이 나오는 '뱀골'이래요. 그 동네 주민들도 안 들어가는 곳이라고. (웃음) 다행히 뱀은 없었지만 모기가 굉장히 많았던 기억이 나고… 초가을의 정취가 <어쩌면 해피엔딩>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던 기억이 있어요. 무엇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건 그 당시 천휴 작가님의 태도예요. 
 
박천휴 그때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촬영 디렉팅을 거의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웃음)
 
표기식 맞아요. 저는 그때 천휴 작가님의 모습을 아직도 종종 떠올려요. 왜냐하면, 저는 사진작가로서 어떤 것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주어진 것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천휴 작가님은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구체적으로, 에너지 넘치게 디렉팅 하는데, 심지어 그걸 되게 '부드러운 말투'로 하는 거죠. (웃음) 그게 저에게는 없는 모습이면서, 어떻게 보면 저의 '추구미' 같은 모습이라서 기억에 남았어요. 여담이지만, 그때 올리버와 클레어가 손을 잡고 뛰어가는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그게 초연의 메인 포스터가 됐죠.



윌 애런슨 그 사진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꼭 말하고 싶었어요! <어쩌면 해피엔딩>은 겉으로 보기엔 그냥 로봇의 이야기잖아요. 로봇 이야기라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해진 이미지가 있는데, 숲에서 자연스럽게 찍은 포스터가 사실 우리 작품은 기존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아날로그적인 정서를 담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처음 미국 공연을 준비할 때도 소개 자료에 항상 초연 포스터 사진을 포함했어요. <어쩌면 해피엔딩>을 처음 알게 된 사람들도 그 사진을 보면 이 작품이 평범한 로봇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빠르게 인식하더라고요. 
 
박천휴 포스터 촬영을 잘 끝내고, 초연 개막을 앞뒀을 때도 『더뮤지컬』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도 표기식 작가님이 저희의 사진을 찍어주셨어요. 그때 찍은 사진이 오래도록 저희의 '페이보릿'이었죠. 저희 둘의 사진을 써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꼭 사용하는. 그 후에 2020년 <어쩌면 해피엔딩> 세 번째 시즌 때도 작가님과 작업했고요. 뭐랄까, 저희의 한 챕터가 시작할 때마다 저희 사진을 남겨주시는 것 같아서, 오늘 다시 만난 것도 참 의미가 깊어요. 
 
표기식 저야말로 이렇게 옛날부터 알던 사람들이 갑자기 토니어워즈에서 상을 받고, TV에 나오니까 얼마나 감회가 남다르겠어요. 두 사람의 성공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요.



포스터 촬영을 포함하여 모든 과정에 애정을 쏟았던 초연 이후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브로드웨이에서 관객을 만나다가 다시 한국 관객에게 공연을 선보이는 기분이 어떤가요.
박천휴 너무나 익숙한 곳으로 돌아온 건데, 되게 긴장돼요. 우선, 저희 공연에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시는 건 당연히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사실 <어쩌면 해피엔딩>은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관객분들이 충분히 찾아와 주시는 공연이었잖아요. 이 작품이 지금까지는 우리만의 소중한 비밀이었다면, 이제는 그 비밀이 많은 분에게 탄로 난 느낌이에요. (웃음) 이제 새로운 분들이 ‘나도 한 번 봐볼까‘라는 호기심을 품고 공연장에 와주실 텐데, 그게 마치 우리끼리, 잘 통하는 친구들끼리 놀다가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나랑 잘 맞을까?‘, ’나를 좋아해 줄까?‘ 하는,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마음이랄까요. 
 
윌 애런슨 저는 원래도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라 휴 말에 완전히 공감해요. 하지만 그 긴장감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자고 스스로 되뇌고 있어요. 배우들, 스태프들 모두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도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박천휴 처음 <어쩌면 해피엔딩>을 만들 때만 해도 윌과 저 둘 다 완벽주의자였어요.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포스터부터 시작해서 작은 부분까지 다 제가 컨트롤하려고 했죠. 마음에 들 때까지, 혹은 마음에 드는 것만.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제 내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작은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산타모니카 해변의 큰 파도에 몸을 맡기는 서퍼의 입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퍼는 어떤 파도가 나에게 올 지 컨트롤할 수 없잖아요. 그저 내게 오는 파도를 즐기기 위해 노력하죠. 저 역시 그러려고 해요. 모든 게 완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고 안절부절못하다 보면 내가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게 될 테니, 그러지 말자는 다짐을 최근 들어 자주 하고 있어요.
 
그 어느 때보다 파고가 높은 파도를 마주하고 있는 요즘은 어떤가요. 몸을 맡긴 채 흘러가고 있나요?
박천휴 요즘은 어떤 파도를 만나든 즐겁고 감사해요. 무엇보다 제게 어떤 파도가 치든 그 파도를 함께 헤쳐나가 주는 윌이 옆에 있어서 큰 힘이 돼요. 
 
윌 애런슨 갑자기 이런 생각도 들어요. 예전에는 휴와 저 자체가 파도였어요. 갑자기 휴라는 파도가 저한테 밀려왔죠. 그냥, 자연스럽게 마주쳤다는 표현이 더 맞겠어요. 각자의 파도를 헤쳐나가던 중에, 글과 음악, 미술 모든 면에 재능이 있는 휴에게 뮤지컬이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함께 뮤지컬 작업을 하자고 제안했고, 그게 제 삶에서 탁월했던 선택 중 하나예요. 제 인생의 분기점을 만들어 준 순간이었어요. (웃음)
 
박천휴 윌은 저를 만나기 전부터 뮤지컬 작업을 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윌의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가 같은 정서를 지녔다는 걸 느꼈고,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봤어요. 제게도 그때가 인생의 분기점 같은 순간이에요. 윌을 만났을 때, 윌과 함께 <어쩌면 해피엔딩>을 만들었을 때.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2012)가 두 사람의 첫 공동 작업이었다면, <어쩌면 해피엔딩>은 온전히 두 사람의 손으로 만든 첫 작품이죠. 나의 첫 작품이 10년 동안 생명력을 잃지 않고 무대 위에 살아있다는 건 창작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박천휴 감사한 일이고, 기적 같은 일이죠. 가끔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조금 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 
윌 애런슨 꿈만 같은 일이에요 사실. 물론 저 역시 '우리가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 때 이 작품을 썼더라면 더 잘 썼을 텐데' 생각할 때가 있긴 해요. (웃음) 
 
시간이 흐르고, 나의 상황과 감정이 달라지면서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예를 들어, <어쩌면 해피엔딩>이 과거의 저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 해"였다면, 지금은 "영원한 마음 같은 건 없어"로 읽히거든요. 두 분이 <어쩌면 해피엔딩>을 쓰던 당시와 지금, 작품을 다른 시선으로 읽어내리게 되는 지점이 있나요. 
윌 애런슨 저는 <어쩌면 해피엔딩>의 매 시즌이 다르게 읽혔어요. 미국 공연을 포함해서 거의 1~2년에 한 번씩 공연을 준비했으니, 그때마다 작품을 새롭게 들여다보면서 저 스스로 새로운 집중 포인트를 찾았던 것 같아요. 주로 어떤 감정의 측면에서요. 그래서 지난 시즌에는 ''그게' 제일 중요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면, 이번 시즌에는 '아니야 '그게' 아니라 '이게' 더 중요해!'라고 말하게 되더라고요. (웃음)
 
박천휴 우리가 쓴 이야기 안에서 10년 넘게 살아있어야 한다는 건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에요. 이 이야기에 시니컬해지지 않으려고, 쉽게 말해 질리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하죠. 그래서 요즘은 작품과 거리를 두고, 이 공연을 처음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야기와 캐릭터를 바라보려고 노력해요. 이렇게 객관화하지 않으면 너무 익숙한 시선으로만 이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게 되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누군가와 가까워지거나, 혹은 가까워져서 상처를 받는 등의 감정을 누릴 여유조차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어쩌면 해피엔딩>의 이야기가 유독 크게 와닿아요.



토니어워즈에서 작품상 시상을 맡은 린 마누엘 미란다가 < Maybe Happy Ending >을 외치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해요. 브로드웨이에서 지난 10년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인 뮤지컬 <해밀턴>을 탄생시킨 천재 예술가가 두 사람을 무대 위로 불러 세우는 모습이, 조금 과장하자면 <해밀턴>이 지난 10년간 지켜온 왕관을 < Maybe Happy Ending >에게 수여하는 모습 같았어요. (웃음)
윌 애런슨 와, 저는 이 얘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 Maybe Happy Ending >이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린 마누엘 미란다가 공연을 보러 왔었어요. 심지어 공연이 끝난 후 바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저희 공연에 대한 좋은 평가를 남겼죠. 정말 놀랐어요. 
 
박천휴 보통 그런 특별한 손님이 오면 공연이 끝난 후에 백스테이지에서 인사를 나누는데, 저는 미국에서도 ‘I’형 인간이었던 터라(웃음) 따로 백스테이지에 안 들르고 바로 퇴근했거든요. 그런데 집 가는 길에 린 마누엘 미란다가 저를 팔로우했다는 인스타그램 알림이 뜨는 거예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플레이빌' 책자 사진과 함께 공연 리뷰도 남겼더라고요. 프리뷰 기간이어서 티켓 판매량이 그리 좋지 않았을 때였는데, 저희 작품을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포스팅을 해 준 거죠. 본인의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본인도 잘 아니까요. 정말 고맙더라고요. 
 
윌 애런슨 그 정도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한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리뷰조차 올라오지 않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공연인데도 ‘내가 이 공연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기꺼이 남겨준다니, 정말 관대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어요. 
 
박천휴 막상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가, 한참 지나고 윌이 얘기를 꺼낸 뒤에야 깨달았던 기억이 나요. "그러고 보니까 린 마누엘이 우리를 ‘베스트 뮤지컬’로 호명했었네?" (웃음) 
 
윌 애런슨 린 마누엘이 작품상 수상자로 저희를 호명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는데, 왜냐하면, 저는 시상식장에서 계속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긴장감 때문에 온몸이 마비된 느낌이기도 했고,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요. 수상 결과를 알기 전까지 저희는 그저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상태잖아요. 근데 만약에 상을 받지 못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실망하게 될 테니까, 행복감을 더 오래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결론적으로는 많은 부문에서 상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서 그때로 돌아간다면 시상식을 완전히 집중한 상태에서 즐기고 싶어요. (웃음)
 
박천휴 토니어워즈 개최 전부터 업계 내에서는 여론을 주도하기 위한 일종의 '캠페인'이 시작되거든요. 자신들의 작품을 굉장히 치열하게, 체계적이고 산업적인 방법으로 어필해요. 근데 저희는 그런 경험을 처음 해보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자니 공연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려고 보니 그전까지는 서로의 작품을 아껴주고 칭찬해 주던 사람들을 경쟁자로 돌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사실 그 분위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윌이 그때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후보에 오른 것 자체로 좋은 일이니 이 순간을 즐기자고. 그 말이 힘이 됐어요.



토니어워즈 이후 두 사람에게 정말 많은 관심이 쏟아졌어요. 관심의 중심에 서는 것도 참 힘든 일인데, 그 관심들을 잘 소화하고 있나요? 
박천휴 감사하게도 저희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결과물에 대한 관심이잖아요. 1~2년이 아니라 10년이라는 시간을 이 공연과 함께 보낸 다음에 이런 칭찬을 받게 되어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으면 ‘임포스터 신드롬‘(가면 증후군)을 느꼈을 거예요. 저 스스로가 가짜인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사실 요즘도 ‘내가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아도 되나‘라는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한국의 관객들과 쌓아 온 10년의 세월을 떠올리면서, ’그래,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해 왔잖아. 칭찬받아도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버텨요. 얼마 전에 친한 동료와 통화하면서도 '나 너무 신기하고 너무 행복해. 아직도 믿기지 않아.' 이런 얘기를 했거든요. 부담감이 들 때도 있고, 힘든 순간도 있지만,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이 훨씬 더 커요. 
 
윌 애런슨 아까 휴가 말했듯이, 저한테 완벽주의자 같은 면모가 아직 남아있거든요? 공연은 몇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충분히 준비한 다음에 선보일 수 있는 반면, 요즘에는 콘서트나 인터뷰 같은, 긴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때로는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가 많잖아요. 그래서 그 짧은 순간의 결과물만 보고 저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그게 작가로서 지금의 제게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아직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고민이에요. 
 
극 중 넘버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에서 클레어가 "영원한 마음 같은 건 없다"는 걸 사람들로부터 배웠듯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 환경, 사람이 바뀌면서 새롭게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토니어워즈 이후 지난 반년을 돌아봤을 때,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면요.
박천휴 안그래도 요즘 되게 많이 생각하고 있는 질문이에요. 방송에, 심지어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저를 많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저를 좋지 않게 보는 분들도 생겼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 자신에게 떳떳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겠다’라는, 지금까지의 제 성격과는 반대되는 다짐을 끊임없이 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앞에서 말했듯 완벽주의자적인 성향도 더 내려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게는 이게 제일 어려운 건데, 이걸 해내지 않으면 모든 게 괴로워질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박진주 배우가 어딘가에서 찍힌 제 사진을 보고 ’마음에 안 들지 않아요?’라고 묻는 거예요. 제 취향을 잘 아니까, 제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사진이라는 걸 캐치한 거죠. 그래서 ‘맞아요, 이상해. 근데 뭐 어쩌겠어.’라고 대답하니까 놀라더라고요. 그러면서 박진주 배우와 이런 얘기를 나눴어요. 한 가지만 보여줘도 됐을 때는 그 한 가지를 완벽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이 컸는데, 이제는 동시에 열 가지, 스무 가지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수많은 일 중에 몇 개는 내 마음대로 안 돼도 괜찮다는 마음이 누적된 것 같다고. 또, 예전에 비해 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게 되면서 '내 취향만 중요한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쓰임새는 다를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이렇게 변화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게 요즘 제 목표예요.



그렇게 삶에 치일 때는 세상과 단절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하잖아요. 한국에서의 작업을 마치면 다시 뉴욕으로 돌아갈 텐데,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세상과 단절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예정인가요.
박천휴 요즘 유독 뉴욕과 서울을 오갈 일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전 이제 비행기 안에서 잘 자는 성격이 되었어요. (웃음) 원래 아무리 오랜 시간 비행을 해도 2~3시간밖에 못 잤는데, 이제는 비행기가 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됐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과 단절되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홀가분한 마음도 들고요.


윌 애런슨 이번에는 자고, 영화 보고, 다시 자고, 영화 보고.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예요. (웃음) 


박천휴 올해 초, 뮤지컬 <고스트 베이커리> 공연할 때까지만 해도 윌이랑 저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일했거든요. 함께 대본 쓰고, 음악 작업하고… 그때는 일상에서 조금 떨어져서, 우리 둘에게만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서 오히려 더 좋기도 했어요. 아! 얘기 나온 김에, 『더뮤지컬』이니까 조심스럽게 이 얘기도 해보고 싶어요. 사실 미국에서는 윌과 저 둘 다 주로 'writer'로 불려요. 말 그대로 '쓰는 사람'이요. 그게 텍스트건, 음악이건. 저희 둘이 항상 공동으로 대본을 쓰고, 음악을 만드니까요. 굳이 구분하자면 저는 writer, lyricist(작가, 작사가)이고 윌은 writer, composer, lyricist(작가, 작곡가, 작사가)인 거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저희를 작가, 작곡가로 확실히 구분하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그게 자연스럽게 들리긴 하지만, 윌을 그저 '작곡가'라고만 호칭하면 글 작업을 할 때 윌이 얼마나 많은 몫을 해내는지 사람들은 모를 테니까. 이 부분을 꼭 짚어보고 싶었어요.
 
짧게는 3~4개월에 걸쳐 한 작품을 공연하고, 길게는 수년에 걸쳐 한 개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10년 넘게 반복하고 있잖아요. 아플 줄 알면서도 기억을 지우지 않는 올리버의 모습 같기도 하고, 어쩔 땐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우린 왜 이 일을 계속하는 걸까.'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박천휴 저희 같은 프리랜서들은 다들 공감할 텐데, 오히려 쉬는 게 힘들어요. 할 일이 없으면 더 괴롭죠. (웃음) 반복해서 할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좋아요. 제가 알차게 쉬는 법을 모르는 성격이라, 오히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런 정해진 루틴이 있어야 몸과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요. 내가 좋아하는 일로 삶의 루틴을 채우는 인생을 살 것인지, 그러지 않을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겠지만, 그래도 저는 한 번 뿐인 인생에서 최대한 내 마음에 드는 루틴으로 일상을 채우는 삶을 살고 싶어요. 
 
윌 애런슨 한 편의 공연을 만드는 과정은 물론 반복되지만, 공연마다 제게 주어지는 문제들이 매번 다르기 때문에 반복된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휴처럼 저도 정해진 하루 루틴이 있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오후에는 집에서 음악을 쓰는. ‘글과 음악을 쓴다’는 전체적인 틀은 같지만, 그게 어떤 텍스트인지에 따라 매일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기 때문에 지겹지 않아요. 
 
박천휴 저랑 윌의 뉴욕 집은 걸어서 5분도 채 안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고 있어요. 매일 아침 제가 시간을 보내러 가는 카페도 윌의 집에서 코너만 돌면 바로 있을 정도로 가깝고요. 근데 막상 윌은 매일 아침 15분쯤 걸어야 나오는 다이너에 가요. 장례식장 바로 옆에 있는. (웃음) 거기서 스크램블드 에그를 먹으면서 이메일을 보내고, 저한테 전화를 걸어서 오늘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죠. 이 단편적 장면이 저희의 성격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요. 각자의, 또 상대방의 루틴을 굳이 바꾸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요. 둘 다 고집이 센데(웃음) 오히려 그래서 이렇게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건가 봐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Writer Avatar

이솔희

뮤지컬 전문 매체 <더뮤지컬> 기자. 좋아하는 건 무대 위의 작고 완벽한 세상.

Writer Avatar

표기식

사진 작가.